당신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엘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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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드 창의 SF 단편 소설집. 서점가에서는 엄청나게 유명한 책인데다 최근 출판된 그의 두 번째 소설집, <숨>과 함께 많은 화재를 낳은 작품으로, <컨택트>(2016)라는 영화의 원작으로 알려지면서 더 유명해진 책이다. 그래서인지 처음에는 장편 소설인줄 알았다. 멋지게 만들어진 영화라는 것에는 반론이 없지만 오감과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재미 중심의 영화가 판을 치는 마당에 굳이 '휴먼영화'의 원작을 찾아 읽기가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숨>이 베스트셀러를 기록하면서 테드 창에 대해 관심이 가게 되었고, 특히 '창'이라는 한국적인 성씨(사실 테드 창은 중국계 미국인)에도 호기심이 난 것도 사실이다.

 

  첫 번째 소설 <바빌론의 탑>은 성서와 고대 역사서에 등장하는 바빌론에 세워졌다는 전설적인 탑을 소재로 한다. 뱀이 똬리를 틀듯 하늘로 뻗어 올라가는 탑을 쌓고 있는 인간은 곧 하늘에 닿을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다. 이 공사에 참여한 힐라룸은 아득히 높은 탑 정상에서 하늘 천장과 마주하게 되고, 백색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천장을 뚫기 시작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천장이 뚫렸고 쏟아지는 하늘 호숫물을 헤엄쳐 가까스로 살아남는다. 하지만 하늘이라 믿었던 그곳은 바로 자신이 떠나온 지상 이었던 것. 아무도 믿어주지 않겠지만 원통 표면처럼 하늘과 땅이 연결되어 있었던 것.

  점점 높아지는 바벨탑에서의 생활과 풍광이 히말라야의 고봉을 등정하는 것처럼 신비롭게 다가온다. 지상에서의 근심에서 벗어나 더 높이 올라간 우리는 마침내 하늘과, 이상과, 신과 맞닿았다. 하지만 그 너머에는 언젠가 돌아가야 할 우리의 현실이 있었다. 진정한 유토피아는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 있는 것...

  합성 약물을 통해 뇌의 비활성화된 부분을 깨워 초인적인 능력을 갖게 되는 영화 <루시>(2014)를 떠올릴 만큼 따른 속도와 흥미로운 전개로 독자를 빨아들이는 <이해>는 뇌 손상을 당했지만 호르몬 K 치료를 통해 놀라울 정도로 지능이 발달하게 된 리언의 이야기다. 그는 자신을 연구대상으로 삼으려는 CIA를 따돌리고, 호르몬을 훔쳐 자신의 한계를 시험한다. 생각과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고, 자신과 주변 환경을 완벽하게 컨트롤하게 된다. 하지만 그와 맞먹는 능력의 존재가 나타나는데...

  평범한 인간의 시선을 넘어서 각성해버린 그의 생각을 따라잡기 어렵다. 세상에 대한 완벽한 통찰과 조절을 통해 텔레파시로 의사소통하는 만화 속 외계인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까닭에 책을 읽는 동안 리언이 어떤 생각을 하고 말을 하는지 잘 이해되지 않았다. 하긴, 발아래 지렁이가 하늘 위 갈매기를 이해하기는 어려운 법. 하지만 테드 창의 머릿속에 그려지는 상상력과 긴박하게 엮어가는 이야기에는 힘찬 박수를 보낸다.

  <영으로 나누면>은 수학에 몰두한 르네의 이야기. 하지만 수학적 지식이 부족한 나에게는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다. 어떤 수라도 영으로 나눌 수 없다는, 나눠서는 안된다는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의 말처럼...

  <네 인생의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로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소설의 뼈대가 되는 언어와 문자에 대한 전문지식이 부족한 것도 맞지만, 이 글을 원작으로 만들었다는 영화 <컨택트>에서 느꼈던 시간에 대한 새로운 통찰(구체적인 영화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도 느낄 수 없었다. 그저 '어렵다' 는 느낌뿐...

  <일흔두 글자>, <인류 과학의 진화> 역시 마찬가지로 난해하다. 천사의 강림이 일상화 되어버린 세상을 다룬 <지옥은 신의 부재>는 소재는 신선하게 다가왔지만 그래서 어쨌다는 말이진 감을 잡기 어려웠다.

  <외모 지상주의에 관한 소고 : 다큐멘터리>는 모든 사람의 얼굴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보이게 하는 장치인 칼리의 의무 착용을 두고 벌어지는 펨플턴 대학의 투표전을 다루고 있다. 인터뷰 형식의 짧은 글들로 구성되어 마치 다큐멘터리나 뉴스를 보는 것 같았다.

  컴퓨터, 스마트폰 등 미디어의 문제점을 지적한 넷플릭스 시리즈물인 <블랙 미러>를 보는 것 같다. 기발하고 참신한 기획으로 오늘날의 우리를 되돌아보게 한다. "아름다움 자체는 문제가 아니에요. 그걸 오용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 문제"라는 타메라의 독백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테드 창은 굉장히 전문적인 것 같다. 종교와 역사, 수학과 과학, 언어와 문자와 같이 인문학의 최고 정점을 기발한 상상력으로 그려놓았기에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 책장을 넘길수록 집중력이 더 흐려진것 같다. 아니면 지나치게 문명화된 나의 생활과 반복적인 스트레스로 쫓겨다니는 직장생활로 인해 내 머리가, 아니 내 이해력이 퇴화한 것은 아닐까 우려스럽다.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SF~

  <컨택트>, <루시>, <블랙 미러> 등의 영화나 <멋진 신세계>(1932), <1984>(1949) 등의 고전을 읽은 후 보면 좀더 이해의 폭이 넓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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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바다, 프리다이버 - 지구 가장 깊은 곳에서 만난 미지의 세계
제임스 네스터 지음, 김학영 옮김 / 글항아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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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5월, 처음으로 프리다이빙 강습을 신청하고 5m 풀장으로 향했다. 예전에 무거운 산소통을 메고 잠수하는 스쿠버다이빙을 약간 배워봤지만 수압을 견디게 하는 이퀄라이징(압력평형기술)이 제대로 되지 않아 고생을 많이 했었다. 그래서인지 수영을 통해 물과 바다에 친해진 다음에도 물 속 세계는 여전히 도달하기 힘든 넘사벽의 공간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구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세계를 그대로 내버려 두기에는 잠수에 대한 열망이 컸다. 바다에서 수영을 할 때에도, 동남아에서 호핑투어를 나갔을 때에도 바다 속 세계를 좀 더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

  이렇게 신청한 프리다이빙 강습이었지만 이퀄라이징에 대한 불안한 경험처럼 귀가 잘 뚫리지가 않았다. 남들은 몇 번의 시도 만에 도달하는 5m 바닥도 강습 첫날에는 닿지 못하고 두 번째 강습 때에 가서야 겨우 만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이퀄라이징에 대한 자신이 없으니 귀는 여전히 먹먹하고 아프기만 했다. 계속 연습하면 좋아질 거라고 강사님도 이야기 했지만, 얼마나 걸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두세 번의 다이빙으로 프리다이빙 라이센스를 취득하기도 하지만 몇 달, 아니 해를 넘기기도 한다는 말에 자신감을 갖고, "까짓것, 언젠가는 되겠지!"하는 마음으로 차에서도, 직장에서도 압력평형 기술(프렌젤)을 연습하고 익혔다. 특히 유투브의 설명이 많이 도움이 되었다.

  회를 거듭할수록 모호하던 프렌젤이 몸에 익어가고, 5m 수심의 풀장도 비좁게 생각될 무렵 바다에서 해양실습을 진행했다. 높은 파도와 2~4m 전후의 짧은 시야는 검푸른 바다 속을 더욱 두렵게 했다. 라이센스를 취득하기 위해서는 10m 이상을 내려가야 하지만 7m를 넘어가니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이퀄라이징은 잘 되지 않았고, 꽉 조인 슈트는 더욱 갑갑해졌다. 바다 속 부유물은 세포 속 박테리아처럼 징그럽게 다가왔다. 함께한 교육생들은 덕다이빙으로 10m를 잠수하고, 레스큐(구조)를 멋지게 성공시켰지만 나는 아직 10m도 내려가보지 못했다. 과연 올해 안에 10m를 내려갈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강사는 바다에 다섯 번을 도전해 성공한 사람도 있다고 안심을 줬지만, 진행 속도가 너무 더뎠다.

  하지만 계속되는 실습을 통해 귀는 압력변화에 적응하고 있었고, 몸은 점점 수심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갑갑하던 마음도 조금씩 바다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결국 두 번째 해양실습에서 10m를 내려갈 수 있었고 한결 몸과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경남 욕지도에서 진행한 실습에서는 13m, 20m를 내려갔고, 레스큐도 통과해 5개월 만에 프리다이버(SSI Level1)가 되었다.

 

  프리다이빙을 시작한 나를 지켜보던 아내가 신문에 난 광고를 보고 추천한 책이 <깊은 바다, 프리다이버>다. 왠지 이 책을 펼치는 것만으로도 바다를 좀 더 이해할 수 있고, 더 깊이 잠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선선한 가을, 따뜻한 커피 한 잔과 함께 제이스 네스터(저자)의 책을 펼친다. 프리다이빙을 시작한다.

  우연한 기회에 프리다이빙 대회를 취재하게 된 것을 계기로 바다와 프리다이빙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 프리다이빙의 의미와 방법, 경기종목과 훈련방법, 그리고 수심에 따른 수압과 우리 몸의 변화를 이야기하고 이를 극복해가는 프리다이버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바다 속에서의 생활을 연구하고 실험하는 과학자를 만나 수압의 힘을 알게되고, 상어를 연구하는 생물학자와 함께 바닷 속 생명체의 존재와 이들의 생활방식을 듣는다. 고대로부터 내려온 잠수의 역사와 함께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는 해녀를 찾아 나서고, 상어와 함께 수영하며 이들이 해변에 출몰하는 원인을 찾아나선다. 고래의 의사소통 방법을 연구하기 위해 향유고래를 기다리고, 잠수정을 타고 에베레스트 산과 맞먹는 높이의 해구 속으로 들어가 생명의 기원을 찾아본다.

 

  최근 프리다이빙이 텔레비전 속 체험 프로그램을 통해 많이 소개되고 있는데다, 긴 핀을 차고 바닷속을 누비며 열대어와 인생 샷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인해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지만 책에서는 그런 화려함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지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바다를 이야기하며 정복하고 지배해야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야할 우리의 일부라고 설명한다. 

  또한 무모한 깊이 경쟁으로 다이빙의 본질에서 벗어나고 있는 프리다이빙 경기도 질책한다. 바다와 친밀한 관계를 갖기 위한 다이빙이 아니라 이기심과 경쟁만 남은 무모한 숫자 경쟁을 되돌아보게 된다. 철저한 준비와 자기 수련이 없으면 피를 토하거나 기절하고, 심지어 죽을 수도 있다는 다이빙의 현실을 말하기도 한다. 

  책은 프리다이빙을 넘어 바다와 인간이 살아가는 방법을 이야기한다.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충분한 준비호흡이 필요하다. 욕심을 부려서도 안되고, 자만해서도 안된다. 자신을 비우고 물결의 흐름에 몸과 마음을 맡겨야 한다. 자신을 내려놓고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프리다이빙은 "바다와 가장 직접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맺기" 위한 최고의 방법이라고 말한다.

 

나는 다시 바다로 간다.

희미해지는 라인을 향해 핀을 찬다.

바다를 채운 부유물이 마스크를 스쳐간다.

우주 속, 별들 사이를 고요히 유영한다.

나는 프리다이버다.

 

(욕지도 프리다이빙, CWT 2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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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이유 - 김영하 산문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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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처럼 방문한 처남에게 집 안을 전쟁터처럼 만들어버리는 세 아들을 보내버리고 안방 침대에 누워 느긋하게 책을 펼쳤다. 그때 아내의 텔레비젼 켜는 소리가 들렸고 이야기 속에서 여행, 글, 소설이라는 단어를 얼핏 들은 것 같았다. 하지만 간만에 집어든 책인데다 뭔가 잘 읽히고 있던 책이라 앵앵거리는 텔레비젼 소리는 무시한 채 김영하의 새 산문집 <여행의 이유>를 읽었다.


  책은 제목 그대로 김영하가 생각하는 여행의 이유를 풀어놓았다. 어떤 나라에 가면 꼭 방문해 봐야할 유적이나 숨은 맞집이 표시된 것이 아니라, 여행은 우리에게 과연 어떤 의미가 있고, 사람들은 왜 여행을 떠나려는지, 그리고 먼 여행지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은 무엇인지 작가의 경험을 통해 풀어놓는다.

  운동권 대학생 시절의 우연한 기회에 떠나게 된 중국 여행을 시작으로 작가가 되기 전의 여행과 작가가 된 이후의 여행을 이야기하고, 글쓰기와 여행, 인생과 여행의 공통점을 이야기한다.  

 

  나 역시 대부분의 사람과 마찬가지로 여행을 좋아하고 시간과 경제력이 된다면 자주 떠나려고 한다. 물론 공부와 담을 쌓은 대학생 때는 약간의 충동만 갖고도 쉽게 국내 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지만, 지금은 가족과 직장이 내 생활의 중심을 이루고 있기에 쉽게 떠나기는 어렵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그러하듯, 어떻게 보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리고 마음먹기에 따라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일년에 한 번은 5일 이상의 여행을 떠나려고 마음먹고 있고, 어느 정도 실현하고 있다.

  이렇게 가끔 여행을 하다보면 왜 이렇게 떠나려고 하는지 스스로 자문할 때가 있다. 이럴 때마다 드는 생각은 "한국만 뜨면 좋아~"라는 생각이었는데, 정말이지 김영하 님이 말한 '상처를 몽땅 흡수한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가 아닐까 싶다. 삶의 무게가 있고, 일상의 책임에서 잠시라도 벗어날 수 있다면, 그곳이 바로 몰리브요 하와이가 아닐까 싶다. 비행기가 뜨면 나를 잡고 있는 사회의 밧줄도 함께 끊어져 버린다. 나를 사로잡고 있던 탯줄을 끊고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다. 물론 이런 도피 후에 다시 나를 받아 줄 수 있는 보금자리가 있다는 것 때문에 이런 일탈이 더 기다려지는 것이겠지만... 

  이런 생각 때문인지 여행의 스타일도 휴양 중심으로 바뀌어버렸다. 빡빡한 일정표에 맞춰 명승지를 둘러보거나 하루종일 박물관에서 역사공부를 하기보다는 나를 숨길 수 있는 곳으로 휴양을 떠나는 것이다. 하지만 세계가 점점 좁아지고 있는 까닭에 그 어디에도 나와 가족, 한국에서의 사회망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점점 오지나 섬과 같은 구석을 찾아 들어가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에게 여행은 일상에 대한 도피이자 탈출이었고, 일 년을 버티게 하는 최고의 목적이 되어버렸다. 이런 나에게 김영하 님은 더욱 풍성하고 다양한, 그럴싸한 이유를 알려줬다. ^^

 

  여행의 의미와 가치, 이유는 물론, 작가의 말까지 다 읽고 <여행의 이유>를 덮은 후 거실로 나가 아내가 보고 있던 텔레비젼 프로를 봤다. 유희열이 진행하는 <대화의 희열>로 사회 여러 분야의 유명인을 초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토크쇼로 몇번 본 적은 있었다. 그런데 이번 방송의 초대손님이 바로 김영하 님이 아니던가.

  김영하 작가와 이름 발음이 비슷한 아내는 얼마 전에 그의 모든 소설을 다 읽은 터였고, 나 역시도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1999), <검은꽃>(2003), <살인자의 기억법>(2013), <오직 두 사람>(2017), 그리고 <여행의 이유>(2019)까지 그의 책을 제법 읽었기에 관심을 갖고 텔레비젼을 시청했다.

  아마 이 책에 출판되고 홍보차원에서 출연한 토크쇼였기에 책의 내용과 많이 중복되기는 했지만, 텍스트에서는 볼 수 없었던 입체적인 입담을 들을 수 있어 좋았다. 마치 여행기나 가이드북에서만 봐왔던 하나우마 베이(하와이)를 실제로 체험했을 때의 느낌이랄까. 산들바람이 불어오는 따뜻한 해변를 지나 푸르도록 시원한 바다를 유영하며 출렁이는 물 속 열대어와 멀리 수평선을 동시에 바라보던 것처럼 생생했다. 

  다음 여행은 좀더 여행다운 여행이 될 것 같다. 여행 경비나 목적지를 결정하기에 앞서 여행의 이유와 가치를 먼저 생각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여행 가방에는 김영하 님의 <여행의 의미>가 들어있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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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 인간 열린책들 세계문학 186
허버트 조지 웰즈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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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한번쯤은 투명인간이 되면 어떨까라는 상상을 해본다. 학교에서 자신을 괴롭히던 친구를 맘껏 때리거나 선생님 책상의 시험지도 몰래 훔쳐볼 수 있다. 백화점이나 마트에 들어가 갖고 싶은 게임과 옷을 챙길 수도 있고, 음식점에서는 돈 걱정 없이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성 친구의 샤워 장면을 몰래 숨어들 수도 있다. 특히 공부하라는 사람이 없으니,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투명인간>에서는 이런 소소한 재미에 반하는 엄청난 시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차나 물건, 사람들에게 쉽게 부딪쳐 다치거나 생명이 위험했다. 옷을 입자니 유령처럼 보일 테고, 벗고 있자니 추위와 싸워야 했다. 밥을 먹더라도 식도를 따라 내려가는 음식물이 그대로 보여 기괴한 모습이었다. 보이지가 않으니 남들 앞에 말을 걸 수도, 물건이나 음식을 살 수도 없었다. 문제는 이런 어려움을 이야기할 가족이나 친구도 사라졌다. 자유가 아니 외로움만 남은 것이다.


  <투명인간>은 <우주전쟁>, <타임머신>과 같이 우리가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고전을 쓴 하버트 조지 웰스의 작품으로, 1897년에 출판되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체계적이고 신선했다. 투명인간이 된 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위기상황부터 소설이 시작되는 것이나, 사건의 흐름에 맞춰 시간과 공간을 거슬러 올라가 구성해 놓은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빛을 굴절시켜 사물을 투명하게 만든다는 근거도 나름대로 진지하게 나와 있고, 투명인간이 된 직후의 즐거움과 재미에 반해 수없이 다가오는 난관이 잘 대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깨끗이 닦여진 유리창과의 거리를 가름하는 것처럼 투명인간의 행동과 움직임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이 책의 최고 클라이맥스인 보이지 않는 대상과의 육박전의 생동감이 조금 반감된 느낌이다. 


  투명인간은 약간 비현실적이긴 하지만 누구나 한번쯤 상상해봤을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인해 최고의 소재가 되었다. 수많은 소설과 영화로 리메이크되었고, 최근에는 마블과 DC에서 만들어내는 슈퍼히어로 영화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 것 같다. 투명인간이 자신의 특수성을 좀 더 좋은 방향으로 발전시켰으면 아이언맨이나 슈퍼맨을 뛰어넘는 ‘원조 슈퍼 히어로’가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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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슨 크루소 열린책들 세계문학 163
다니엘 디포 지음, 류경희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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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빈슨 크루소를 모티브로 한 책이나 드라마가 계속 유행 중이다. 사람의 발자취가 없는 원시림에서 의식주를 해결하는 목적지를 찾아가는 외국 프로그램이 국내에 알려지게 되면서, 오지에서 생존할 수 있는 기술과 팁을 만화로 풀어쓴 만화 시리즈도 유행했고, 김병만이 주축이 되어 무인도와 같은 제한된 환경에서 생활해나가는 예능프로그램의 인기도 식을 줄 모른다. 마치 지구 문명이 멸망하고, 돈으로 해결되는 경제구조가 무너진 영화 속의 상황들이 곧 현실에 닥칠 것처럼 사람들이 열광하고 있다. 목적 없이 1등만을 위해 달려가는 우리의 삶이 너무 팍팍해서 그런가? 아니면 거품처럼 부풀어진 경제적 환상에 염증을 느껴서인지 모르겠지만, 돈벌이 기계가 되어 맹목적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이 갑자기 자연에서 자급하며 살아가는 법을 찾는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아무튼 이런 생존기를 볼 때마다 로빈슨 크루소가 대체 누구냐 하는 궁금증은 커져갔다. 그의 이름이야 여기저기서 많이 알고 있지만, 정작 그가 어느 책에서 등장했고, 그 책이 어떤 내용인지는 여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무지했다. 소인국과 대인국을 여행했던 걸리버와 혼동하기도 했고, 급기야 실존인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던 중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라는 책이 <로빈슨 크루소>(1998)의 이야기를 리메이크한 소설이라는 소개글을 보게 되었다. 거기에 로빈슨의 모험 이야기를 언급하며 자본주의와 물질문명을 풍자한 최고의 소설이라는 평을 보고, 로빈슨의 삶도 정확히 알아보고, 어떤 게 내용이 바뀌었을까 궁금한 생각이 들어 두 권 모두 구입했었다.

 

   로빈슨 크루소는 평범하지만 안정적인 생활을 추구하는 부모님을 떠나 더 넓은 사회로 여행을 떠난다. 아니 갑갑한 현실에서 도망치듯 영국행 배에 오른다. 하지만 첫 항해에서 배가 난파되어 죽을 고비를 넘겼고, 두 번째 항해에서는 해적에게 납치되어 노예로 팔려가기도 했지만 탈출에 성공해 브라질에 정착한다. 그는 농장을 꾸리며 안정적인 생활을 시작했지만, 마음 깊은 곳의 방랑벽에 충동적으로 기니로 출발했고, 이 때 만난 폭풍으로 배가 난파되어 홀로 무인도에 버려졌다. 망망대해의 무인도에는 숲과 바다, 하늘뿐이었고, 낮과 밤이 전부였다. 하지만 해안에 밀려온 난파선에서 필요한 물건을 챙기면서 자급하는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사실 그의 무인도 생존기를 보고 있으니 이런 무인도에 홀로 생활해보고 싶다는 생각부터 든다. 푸른 바다와 하얀 해변에서 하루 종일 뒹굴 거리면서 자유롭게 수영하는 모습은 생각만 해도 즐거웠다. 물론 몇 달, 몇 년을 이렇게 '여유롭게' 생활할 수는 없겠지만, 다람쥐 쳇바퀴 같은 삶에서 벗어나 며칠만이라도 이렇게 아무 일 없이, 목적 없이 살아보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무인도라는 공간적 낭만보다는 한국, 아니 가족과 직장이라는 구속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부러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1719년 출판된 소설답지 않게 로빈슨의 심리상태가 세밀하게 그려져 있어 놀라웠다. 합리적이라 생각하고 행동한다지만 늘 충동이 앞서고, 그에 따른 자부심과 후회, 갈등이 혼재한 모습이나, 하나의 결정 뒤에 숨어있는 복잡한 감정 변화가 다채로웠다. 한 사람의 일생을 몰래카메라로 촬영해 전 세계에 방영한다는 <투르먼 쇼>에서 짐 캐리가 보여준 것처럼 만족, 분노, 사랑, 질투, 각성 등의 감정변화를 실시간으로 드러난다. 로빈슨의 여행은 감정변화를 객관적으로 보여주면서 우리들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한다. 죽음 앞에선 자신을 책망하며 신을 찾다가도 그 고비를 넘기면 온갖 방법으로 자신을 합리화하는 오만함을 반복하는 모습은 이성적이라만 다중적고도 모순적인 우리들의 심리상황을 보는 것 같다. 하루에도 열 천 번도 더 변하는 사람의 마음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아이나 어른이나, 동양이나 서양이나 변화가 없어 보인다.

 

   특히 신과 야만인에 대한 로빈슨의 태도 변화가 인상적이다. 평소에는 하느님의 존재나 의미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었지만, 폭풍우로 인해 배가 좌초되어 운명이 경각에 달려있을 때는 그간의 행동을 반성하며 주님을 찾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평온함이 익숙해지자 이런 절대자에 대한 믿음도 약해졌다. 이런 롤러코스터 같은 그의 마음이 재미있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안쓰러웠다. 신은 인간을 만들었고, 인간을 신께 의지하는 오랜 기독교적인 가치관이 주변의 위기상황에 따라 손바닥 뒤집듯 변하는 모습에서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고, 의존적인 생명인지 깨닫게 된다.

   그리고 로빈슨이 표류하고 있는 섬에 찾아와 식인을 하는 야만인들 보고 처음에는 죽여 없애야 할 인류의 적으로 생각했지만, 자신이 어떤 권리로 그들을 판단하고 처단하는지 의문을 갖게 되면서 자신과 그들의 문화적 차이를 인정하게 된다.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지만 그렇다고 없어져야할 존재들이 아니라 다른 문화 속을 살아가는 독립된 존재들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로빈슨은 목숨만 남은 동물이 되었다가, 도구를 이용하는 사람이 되기도, 생각하고 갈등하는 인간이 되기도, 넓은 아량으로 야만인을 용서하는 신이 되기도 했다. 어쩌면 로빈슨의 모험은 육체적 생존을 위한 모험기가 아니라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을 거쳐 정신적 깨달음을 찾아가는 인간의 본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로빈슨 크루소>의 저자 다니엘디포가 타고난 이야기꾼이라는 사실에 동감하지 않을 수 없다. 다양한 이야기와 스피디한 전개, 그리고 섬세한 심리묘사까지 1719년에 출판되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다채롭다. 한정된 공간 속에서 보여지는 인간의 오감과 희로애락은 무인도에 갇힌 톰 행크스 주연의 영화, <캐스트 어웨이>(2001)의 확장판을 본 것 같았다.

   이 여세를 몰아 이 책의 리메이크 작인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를 펼친다. 원작과는 이야기가 어떻게 다르고,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다시금 로빈슨과 함께 긴 항해를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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