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나는 더 행복하다 - 스물넷에 장애인이 된 한 남자와 그가 사랑한 노들야학의 뜨거운 희망 메시지
박경석 지음 / 책으로여는세상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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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에서 청소년적십자(RCY) 활동을 지도하면서 매월 나가는 곳이 있다. 반여동(부산)에 위치한 사랑샘장애인자립생활센터로 장애인의 자립 생활을 돕고 지원하는 단체이다. 그곳에서 매월 셋째 주 토요일에 장애인식개선거리캠페인을 진행하는데 여기에 정기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장애인 이동권을 안내하고 홍보하는 활동으로 인도의 턱을 없애고 건물 입구에 경사로를 만들자는 내용으로 거리의 행인과 점포의 주인들에게 설명도 하고 전단지도 나눠주며 활동한다.

  처음에는 장애인들과의 활동이 어색하거나 주변의 시선이 신경 쓰이기도 했지만, 장애인들과 함께 먹고, 웃고, 땀 흘리고, 소리치다보니 이웃이나 친구들처럼 자연스러워졌다.

  무엇보다 활동이 불편하고 생활 여건이 좋지 않은 가운데서도 늘 밝고 활기차게 생활하는 모습이 놀라웠다. 전동휠체어가 지나갈 수 없는 길을 만나도, 장애인을 보는 주변의 시선에도 거리낌 없이 웃음이 가득했다. 자신의 환경을 불행으로만 여기고 현실을 포기해버리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사회에 대항하며, 살아가며, 싸워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물론 아직까지 싸움은 계속되어야 하지만...

  그 싸움의 중심에서 노들야학을 운영하고 있는 박경석 님이 쓴 책이 바로 <지금이 나는 더 행복하다>이다. 해병대를 제대한 혈기왕성한 젊음의 시절에 행글라이딩 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된 저자는 자신을 둘러싼 무감각 속에서 죽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자살여행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읽기 시작한 성경을 통해 세상에 나갈 용기를 얻게 되었고, 노들야학에서 장애인을 가르치고, 생활하고 있다.

   노들야학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조직을 운영하는 내용도 있지만 상당부분은 장애인 운동에 대한 이야기가 차지하고 있다. 장애인 교육도 중요하지만 교육받은 내용을 활용해 자립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저자의 말이 기억 남는다. 그래서 박경석 님은 거리로, 관공서, 법원으로 뛰쳐 나갔다. 

  집 밖으로 쉽게 나올 수 없는 장애인의 현실과 여러 위험에 노출된 이들의 안전이 안타까웠고 여러 가지 사고를 통해 우리 사회가 이렇게나 장애인에게 관심이 없었나 자책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비장애인인 내게는 아직 체감하지 못하는 부분도 많은 것도 사실이다. 오래 전부터 봉사관련 동아리와 단체에 속해 남들보다는 많은 관심과 이해를 하고 있다고 자부해왔지만 책을 읽다보니 나 역시도 겉으로만 장애인과 이들의 사회활동을 고민하는 척하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되었다. 그럴싸한 구호나 명함에 적힌 가입단체만으로 그들의 입장을 이해한다고 생각한 것이 얼마나 속 좁은  행동인지, 사회가 아직 장애인에 대한 많은 고정관념과 편견을 갖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들과 함께 공부하고, 노력하고, 행동하고 있는지 알수 있었다.

  아직 모르는 것이 많지만 장애인과 장애인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다. 매달 나가는 활동에서도 좀 더 밝고 열린 마음으로 장애인을 대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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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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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킬로까지는 '이번에는 좋은 기록이 나올지도' 라고 생각하지만, 35킬로를 지나면 몸의 연료가 다 떨어져서 여러 가지 일에 대해서 화가 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텅 빈 가솔린 탱크를 안고 계속 달리는 자동차 같은 기분'이 된다. 하지만 완주하고 나서 조금 지나면, 고통스러웠던 일이나 한심한 생각을 했던 일 따위는 깨끗이 잊어버리고, '다음에는 좀 더 잘 달려야지'하고 결의를 굳게 다진다. 아무리 경험이 쌓이고 나이가 들어도, 결국은 똑같은 일의 반복인 것이다." (p107)

 

  춘천마라톤(2012년, 5시간15분)과 중앙서울마라톤(2014년, 4시간59분)을 완주했지만 마라톤은 여전히 두렵고 낯선 것이 사실이다. 하나의 대회를 완주하기 위해서는 몇 개월 전부터 수 십, 수 백 km씩 연습을 해야할 뿐만 아니라 상당한 끈기와 자기 절재가 필요하다. 퇴근 이후의 나른한 몸은 오늘의 연습을 내일로 미루게 만들고, 모처럼 있는 회식자리에서도 마음대로 즐기지 못한다. 거기다 이른 아침이나 늦은 저녁, 쌀쌀한 날씨 속을 달리기 위해 집 밖을 나간다는 것 또한 상당한 고역이다. 이런 어려움들은 섣불리 마라톤 대회 참가를 망설이게 만든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마라톤 대회 신청과 출전에 상당히 신중해질 수 밖에 없다. '연습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부터 '5시간을 달릴 수 있을까', '무리하게 달리다가 다치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까지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든다.

 

  하지만 어떻든 대회를 신청하고 나면 스스로를 단련하며 연습하지 않을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나 같은 초보 러너에게는 기록보다는 뛰다가 죽지 않기 위한(?), 완주를 위해 달리는 거리를 늘리는 것이 연습의 주목적인지라 이런 중차대한 행사를 '지름'으로 해서 운동의 필연성을 만들기도 한다. 풀코스 완주라는 하나의 목표의식은 나를 달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 자의든 타의든 꾸준한 연습을 하도록 한다. 그리고 대회에 출전해 수많은 사람들과 호흡을 섞으며 달리는 동안 살아있다는, 하나의 목표에 도전하고 있다는 것에 매료된다. 물론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골인 뒤의 내 모습을 상상하며, 한 걸음씩 내 딛는 것이다.


  최근 들어 수영에 빠지면서 달리기에 소홀해졌다. 하지만 트라이애슬론(수영+사이클+달리기) 완주이라는 또 다른 욕심이 생긴 마당에 달리기를 등한시 할 수 없게 된 상황이라, 나의 다리를 자극할 뭔가를 찾게 되었고 이렇게 골라든 책이 바로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무라카미 하루키)이다. 몇 년 전에 이 책을 읽으면서 풀코스를 뛰어보고 싶다는 열망를 키웠던 기억도 있는데다 달리기 과정에서 오는 심정을 아주 사실적으로 그려놓았기에 상당히 공감하면서 봤었다. 이제, 하루키의 뒤를 따르면서 나를 채찍질하려 한다...

 


  "중요한 것은 시간과의 경쟁을 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만큼의 충족감을 가지고 42킬로를 완주할 수 있는가, 얼마만큼 자기 자신을 즐길 수 있는가, 아마도 그것이 이제부터 앞으로의 큰 의미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 아닐까. 수치로 나타나지 않는 것을 나는 즐기며 평가해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제까지와는 약간 다른 성취의 긍지를 모색해가게 될 것이다." (p187)

 

  하루키의 영향이 금세 나타났다. 일요일 새벽 백양산 산길을 한 시간 동안 달린데 이어 어제 퇴근 후에도 동네하천변을 10km 달렸다. 오랜만에 제법 먼 거리를 달려서그런지 움츠려버린 근육에선 난리가 났다. 종아리부터 허벅지까지 당기지 않는 곳이 없고 계단을 오르거나 내려올 때는 잔뜩 긴장한 체 힘을 주어야 한다.

하지만 이런 뻐근함이 싫지만은 않다. 이런 상태는 이 삼일이면 없어질 테고 곧이어 이정도의 훈련강도에 맞추어 몸이 적응할 테니까. 내 몸은 잊어버렸던 러너의 기억을 서서히 되살리고 있는 중이다.

 

  책 표지에 난 사각형의 구멍으로 오아후 알라모아나 공원(하와이)을 달리는 하루키의 뒷모습이 보인다. 나는 하루키의 모습 위에 지난 2014년 중앙서울마라톤대회 때 골인장면을 붙여놓았는데 마치 내가 쓴 책이라도 되는 것처럼 뿌듯해졌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하루키가 썼지만 그 속의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였다. 살을 빼기 위해 조깅을 시작했고 10km대회에 참가해 완주메달을 받았다. 그리고 거리를 늘려 하프코스(21km)를 완주했으며 2012년과 2014년에는 풀코스(42.195km)를 무사히 달렸다. 그리고 올해(2015년 9월)는 트라이애슬론에 출전한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하루키의 회고록인 동시에 나의 이야기인 것이다. 아니 치열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모든 달림이들의 '완주기'인 것이다.


* 2010년 글 보기 :  http://freeismnet.cafe24.com/xe/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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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15-07-16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멋! 저는 새 판본이 나온 줄 알았어요 호호호

프리즘 2015-07-17 08:41   좋아요 0 | URL
오래된 책이지만 좋은 책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서울의 시간을 그리다 - 풍경과 함께한 스케치 여행, 개정증보판
이장희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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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교 졸업식이 있던 날 서울로 상경한 나는 한남동의 한 주택에 급조된 자취방에서 몇 년을 보냈다. 부산과는 달리 정신이 하나도 없고 엄청 복잡한 서울이었지만 한국의 수도답게 다양한 문화재며 건축물, 도시 곳곳에서 펼쳐지는 문화공연들로 한시도 지루할 틈이 없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종로에서 새벽까지 술을 마시기도 했고, 대학로 거리에서 우연히 록그룹의 공연을 보기도 했다. 그리고 시간이 나면 홀로 종묘나 명동성당을 둘러보며 이런저런 감회에 잠겨보기도 했다.

  그렇게 3년간의 화려한 서울생활을 마치고 부산에 돌아왔지만 서울에서 받은 문화적 해택은 쉬 잊혀지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서울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 싶은 마음에 책방을 찾았다가 서현 님의 <그대가 본 이 거리를 말하다>를 읽게 되었다. 건축가의 시선으로 서울의 도심과 문화가 세세하면서도 자상하게 담겨있었는데 내가 경험한 서울은 그저 껍데기에 불과한 정도로 작은 부분이었다. 내가 놀았던 종로거리와 대학로의 또 다른 모습을 알 수 있었고 종묘와 명동성당의 가치도 새롭게 느낄 수 있었다.

 

  이번에 읽은 이장희 님의 <서울의 시간을 그리다> 역시 서울의 본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경복궁에서 시작해 명동, 광화문 광장, 종로, 혜화동, 인사동, 숭례문 등 서울시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그 누구라도 한번쯤은 지나쳐봤을 서울의 거리를 이야기한다. 오래된 고궁의 내력에서부터 개발의 여파에 갈 길을 잃어버린 우리 문화는 물론 길거리에 방치되다시피 한 표지석에 이르기까지 서울의 도심과 골목길을 돌아본다.  

  특히 현장감 가득한 그의 스케치는 단순히 셔터만 눌러 찍어놓은 디지털 사진과는 확연히 구별된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대상과 오랜 시간을 한 공간에서 보내야 하고 주변에는 무엇이 있으며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꼼꼼하게 확인해야 한다. 점 하나, 선 하나를 그리기 위해 몇 번이고 대상을 쓰다듬어야 한다. 이렇듯 그의 그림에는 서울에 대한 애정이 점과 선으로 연결되어 면을 채웠고 여백과 '서울의 시간'이 되었다.

  그림 중간에 삽입된 글 또한 우리가 무심코 지나쳐버렸거나 알지 못했던 서울 속 이야기를 차분하게 들려준다. 부드럽지만 때로는 날카로운 일갈을 통해 서울이 놓쳐버린, 아니 우리가 놓아버린 소중한 것들을 아쉬워한다. 유홍준 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보고 있을 때처럼 잔잔한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그림에 대한 관심으로 구입한 책이지만 오히려 저자의 소소한 글맛에 더 반해버렸다. 자꾸만 책 표지에 적힌 '이.장.희'라는 이름 석 자에 눈이 간다.

 

  작년부터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되고 내 주변의 모습을 조금씩 그려보면서 이와 관련된 블로그를 많이 찾게 되었다. 입이 절로 벌어지는 이들의 그림과 모습들을 보면서 내가 너무 재미없게 살아온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든다. 이제는 세상을 좀 더 찬찬히 들여다봐야겠다. 바쁜 걸음을 잠시 멈추고 세상과 나를 보살펴야지. 그러면 나도 언젠가는 부산의 시간을, 가족의 시간을, 나만의 시간을 멋들어지게 그릴 수 있지 않을까...

 

( 이장희님 네이버 블로그 : http://blog.naver.com/tthat )

 

스케치로 서울을 담고자 한 첫번째 이유는 서울을 `더 잘 알고 싶어서`였다.
한 장의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스케치노트와 대상물을 수없이 번갈아 보는 일은 속사정까지는 몰라도 적어도 그 외형을 알게 되는 최선의 방법이다. 선 하나하나를 따라가며 사물(혹은 인물)을 알아가는데 어떻게 가까워지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일련의 행동 사이에서 평범한 골목길도, `내 스케치 속 골목길`로 바뀐다. (p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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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도 학교가 두렵다 - 교사들과 함께 쓴 학교현장의 이야기
엄기호 지음 / 따비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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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실과 교무실에서 일어나는 학생과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가감 없이 들려준다. 요즘 학생들은 어떤 모습이며 어떻게 학교생활을 하고 있는지, 아니 어떻게 학교와 담을 쌓게 되었는지 몰래카메라가 설치된 교실을 보는 것처럼 사실적으로 그려놓았다. "설마, 저 정도일라고" 하는 우려가 나올 정도로...

  사실 기성세대가 아는 학교는 자신들이 다녔던 2000년 이전의 모습 70%에다가 뉴스나 영화, 혹은 자신의 자녀를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한 30%의 모습이 합쳐진 낭만적인 이미지가 많았다. 엄격하고 강압적이었지만 일사분란했고, 선생님의 말은 모든 진리에 우선하는 최고의 가르침이었다. 출세의 지름길이었던 공부와 대학 이외에는 별다른 관심거리도, 어려움이나 문제도 없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교실은 모든 것이 변했다. 지식은 더 이상 선생님의 전유물이 아니었고 학원과 인터넷에 넘쳐나기 시작했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인정하면서 책임과 의무는 소홀해졌다. 맞벌이부부가 늘면서 학생들은 방치되었고 점점 게임에 빠져들었다.


  우리는 누구나 몇 년에서 몇 십 년 이상씩 학교생활을 해 왔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교의 문화나 현실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제와는 차이가 많다.

  더이상 선생님을 존경하지도 않을 뿐더러 무서워하지도 않으니 교육은 물론 대화 자체도 점점 힘들어진다. 자극적이고 즉각적인 컴퓨터게임에 길들여져 오랜 끈기를 필요로 하는 작업은 해내지 못하고 자그마한 일에도 발끈하며 달려든다. 학원 공부에 매달린 체 정작 교실 수업에서는 엎드려 자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입시와 관련 없는 과목은 아에 듣지도 않는다. 뜻대로 되지 않는 학교생활의 스트레스는 십 원짜리 욕설과 친구에 대한 맹목적인 폭력, 따돌림으로 풀어버린다.

  영화에서나 보이는 이런 모습들은 지금 우리의 학교에서 흔히 일어나는 모습이다. 인정하기 싫겠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우리는 어쩌면 학교라는 최소한의 가치를 잊지 않았기에, 이를 외면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학교나 교사에게도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다. 산업화와 IMF, 인터넷과 스마트 세대를 겪으면서 사회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했고 각종 영양가 없는 소모성 공문에 묻혀
수업과 학생을 소홀히 했다. 또한 수업을 연구하고 평가받는 것을 주저하는 동안 교수법은 발전하지 못했다.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펼치기에는 기간제교사라는 딱지가 너무 컸다.

  학교와 교사는 관료주의의 병패를 답습하며 정체된 모습도 많이 보여줬기에 사교육으로 돌아선 학생과 학부모를 무조건 탓할 수만은 없었다. 위축된 학교는 교육의 역전현상을 바로잡기 위해 조급해할 수밖에 없었고 이런 영향은 공교육의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는 이런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학교와 교사, 학생과 학부모의 각성을 유도한다.

  하지만 학교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칠 뿐 뭔가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물론 이 한 권에 우리학교의 문제를 다 해결할 수는 없겠지만, 문제점과 불만을 잔뜩 털어놓고는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사라져버리는 것처럼 무책임하게 보이기도 한다.

  또한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우호적인 시선도 조금 불편하다. 마치 이들만이 진정으로 교육을 생각하는 단체이고 그 말만 잘 들었어도 우리 교육이 이처럼 망가지지는 않았다는 얘기처럼 들린다. 전교조가 우리나라 교육발전에 이바지한 공은 알겠지만 자기자식만을 지나치게 편애하는 학부모의 고집처럼 답답하기도 했다.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는 자조 섞인 제목이 가슴 아프다. 하지만 모든 학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 많다고는 하지만 많은 교사들은 더 나은 학생들의 미래를 위해 오늘도 애쓰고 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학교와 학생을 지켜보면서도 이들에 대한 사랑은 여전하다. 교사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두려움이 희망으로 바뀔 수 있는 날을 기대해 본다.

 

( www. freeism.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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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우리가 미안하다 - 따뜻한 신념으로 일군 작은 기적, 천종호 판사의 소년재판 이야기
천종호 지음 / 우리학교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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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년법정의 모습을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다. 고개를 숙인 어린 나이의 피고인과 눈물로 선처를 호소하는 부모님의 모습을 뒤로하고 판사의 엄중하고 단호한 판결이 내려지고 있었다. 폭풍같이 질타를 하는가하면 부드럽게 타이르기도 하는 모습이 검은 법복과 어울려 상당히 인상깊었다.

   그리고 얼마 전 같은 학교, 같은 생활지도부에 근무하는 부장 선생님으로부터 한 권의 책을 선물 받았다. 꾀 묵직한 책의 띠지에는 검은 법복 차림의 한 사람이 실려 있었다. 천종호, 얼마 전 인터넷으로 본 그의 영상이 떠오르며 고요한 법정을 울리던 그의 호통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부산에서 어려운 유년시절을 보내고 부산대 법대를 졸업하고 부산지방법원, 부산고등법원 판사를 거처 현재 창원지방법원 부장판사로 있다는 그의 내력보다 '소년부 판사'라는 말이 더욱 현실적으로 와 닿았다. 그만큼 그와 소년법정은 따로 때어놓고 생각할 수 없어 보였다. 때로는 호랑이의 일갈로 꾸짖기도 하고 어머니의 따스함으로 보듬어주기도 하는 모습이 그가 겪은 법정 속에 가득했다.

   특히 그의 교육관, 직업관까지 엿볼 수 있는 다음 말이 인상 깊었다. "살다 보면 누구나 실수를 할 때가 있다. 실수를 하지 않도록 지도하는 것이 교육이라면, 실수로 인해 발생한 사태를 수습해나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도 역시 교육이다."(p135)

   사건을 결과를 통해 원인을 분석하고 법의 강제성을 이용해 어린 날의 실수를 예방하려는 법조인의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법의 영향력이 미치기 이전의 환경, 소년 소녀들을 제대로 키워내지 못한 가정과 학교에 대한 질타도 녹아있는 듯 보였다. 대부분의 문제가 그렇듯 청소년 문제의 상당부분도 결손 가정이나 불안한 학교생활에서 시작되는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말이다.

   물론 청소년 문제에 있어 가정과 함께 자유로울 수 없는 부분이 바로 학교지만 밖에서 보는 학교와 실제 안에서 겪어보는 학교의 모습은 많이 다른 것도 사실이다. 학생을 지도하고 징계하기에 앞서 폭력이나 왕따와 같은 일이 생기지 않도록 사전에 예방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겠지만 교과수업에다 공문처리, 각종 업무를 처리하다보면 생각처럼 쉽게 되지 않는다. 결국 사건에 대한 후속 조치를 하기에도 급급한 경우도 많았다.

   이런 의미에서 책은 가정과 학교의 문제를 보는 시각이 지나치게 단순한 것은 아닌가 의아스럽기도 했다. 법이라는 강제성을 전제로 하기보다는 사랑과 관심을 통해 오랜 시간 공을 들이는 작업이기에 법의 시각에서 보면 모순되고 불안정하게 보일 수도 있었겠다.

   젊은 날의 실수가 반복해서 일어나지 않도록 지도하는 일차적인 장소는 물론 가정과 학교다. 하지만 가정과 학교는 법정과는 달리 '실수'의 의미까지도 다시 생각해보는 근원적 교육 장소인 것이다. 단순히 사건의 결과만 놓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의 원인의 근본적인 문제까지 들여다보는 공간이기에 사건 후의 합의사항이나 판결문만 놓고 보기에는 좀더 신중해져야겠다.

 

  일선 교육현장에서 직접 학생들과 대면하다보니 <아니야, 우리가 미안하다>에 등장하는 많은 이야기들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학교생활에서 피해를 입었거나 고통을 당한 아이들이 바로 우리의 아이들이라 생각하니 건성으로 학생을 마주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규칙과 징계를 내세우기에 앞서 좀 더 진지하게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건넸더라면 어땠을까. 보고서를 잠시 밀쳐두고서라도 이들의 어려움을 살펴봤다면 하는 아쉬움이 제일 크다.

   어쩌면 학생들을 지도해야하고 가르쳐야 할 대상으로만 한정짓는 이런 권위적인 태도 때문에 그들의 문제를 키웠는지도 모르겠다. 나에게도 문제가 있듯 그들에게 존재하는 어려움을 인정하고 출발해야겠다. 좀 더 열린 마음으로 학생들과 마주해야겠다. 한 명씩 이야기를 주고 받다보면 누구하나 나쁜 아이가 없지 않던가. 알고 보면 이 모든 문제는 '우리'라는 거울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던가...

   가정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소외되고 방치되었던 아이들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그래, 우리가 미안하다..."

 

 

( www.freeism.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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