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를 바탕으로
델핀 드 비강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끝*까지 사실과 허구 사이에서 방황하다 [실화를 바탕으로]

 

내가 만약 소설가가 된다면, 첫 이야기는 아마 자전적 소설의 형태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책으로 쓰면 열 댓권은 될 거다."

흔히, 신산한 세월을 보내 온 많은 할머니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처럼 말이다.

천진난만하고 아무 것도 모를 것 같던 어린 시절에 박혀 버린 뾰족한 유리 같은 기억들과 와장창 깨져 버린 청소년기의 혼란스러움, 어른이 되어서도 이루고 싶은 것을 이루지 못한 채 어정쩡하게 정착해버린 한숨 나오는 이야기들을 이렇게, 저렇게 버무리면 잘 짜여진 한 권의 책은 되지 않을까...

막연하게 생각만 할 뿐, 그 꿈을 실제로 이루어 보려고 하지는 않았기에 소설가의 길은 아직도 '가지 않은 길'로 남아 있다.

하긴, 창작의 고통이 뭔지 알아보려는 시도조차 해 보기 전에 '대단한' 고전들과 눈부신 신작들을 섭렵한 결과 소설가의 길은 나에게는 너무 버거운 짐이 될 것이라 지레 짐작하고 주저 앉은 주제에 무슨 할 말이 있을라고. [실화를 바탕으로] 를 읽고 난 직후에 더욱더, 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특별히 없는이야기를 실제 있는 것처럼 그럴 듯하게 꾸며 내는 재주가 있거나  거짓말에 능한 것도 아니고, 남들이 찬탄할 만한 글쓰기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주야장천 남이 쓴 글을 읽고만 있으니 더욱 그렇다. 쓸 만한 "꺼리"를 포착할 줄도 모르고 하물며 그"꺼리"가 눈 앞에 잘 차려진 잔칫상처럼 떡하니 놓여 있어도 그것을 잡아채서 제대로 문장으로 꿸 줄도 모르니...

요즘 유행하는 말처럼,

"이러려고 이 책을 읽었나, 자괴감이 들고..."

소설가 혹은 작가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독자의 편에 서서 우러르기만 할 줄 알았을 뿐,

실제 창작 과정에 들어간 작가들의 고뇌를 알 길이 없었던 중에

이 책은 작가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이유에서건 스스로의 희생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작가가 창조하는 세계가 '자아'와 '세계'의 대결에 관여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소설'이라는 범주 안에 넣는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아마도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아슬아슬 하게 넘나들게 될 것이다.

작가는 바로 그 부분, '현실'과 '허구'의 어느 부분에 중점을 두어야 하는지, 혹은 그 둘을 어떻게 버무리고 배합해야 하는지 하는 부분에 있어 고뇌하는 중에 있는 것 같다.

독자들이 바라는 것이 '실화'인지, 실화에 가까운 허구인지에 대한 답을 발견하는 과정에서 책 속 주인공인 '델핀'과 'L'은 무수한 설전을 벌인다.

실제 작가가 당면해 있는 문제를 피력한 듯, 대화 속 그들의 설전은 현실감이 넘치며 철학적인 문제를 포함, 문학의 본질에 파고들 정도로 세밀하고도 깊이 있게 들어간다.

 

델핀 :자기 자신에 대한 모든 글쓰기는 소설이야. 이야기는 환상이야. 실재하지 않는 거라고. 다만 어떤 책에도 대놓고 그렇게 적는 게 용납되지 않을 뿐이지.-90

 

L  : 글쓰기는 진실을 추구해야 해. 그러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야. 만일 네가 글쓰기를 통해 너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면, 너에게 깃든 것을, 너를 이루는 것을 뒤지려 하지 않는다면, 너의 상처를 다시 열어 건드리고, 네 손으로 후벼파려 하지 않는다면, 네 인격과 뿌리와 환경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다면, 그건 무의미해. 글쓰기는 자기 자신에 관한 것이어야 해. 그 밖의 것은 중요하지 않아.-91

 

 

 

[실화를 바탕으로]의 주인공 '델핀'은 사실, 작가인 '델핀 드 비강'과 거의 판박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아이의 엄마이고, 거식증으로 고통받은 경험, 어머니의 자살을 담은 자전소설로 데뷔했으며 연이어 베스트셀러를 내면서 유명작가의 대열에 합류하게 되는데...

예상을 초월하는 전작의 성공으로 '다음' 작품에 대해 중압감을 느끼던 중, 수수께끼 같은 여자 L 이 나타난다. L 은 왼손잡이인 델핀에게

"나도 왼손잡이야. 왼손잡이는 서로 알아보는 거 알아?" 라는 말로 경계를 허물어뜨리고 살금살금 다가온다. 델핀은 유명인사들의 대필 작가라고 자신을 소개한 L 에게서 사랑 혹은 우정을 느끼게 되고, 어느새 가족보다 더 가까운 사이로 L 을 인식하게 된다. (대필 작가 L 은 자신이 쓴 유명인의 전기 끝에 끝*이라는 표시를 남기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고 했다.)

 

 

내가 그녀 앞에서 모든 자양분을 비워내는 사이, 그녀는 일을 했고, 집과 바깥을 오고 갔고, 지하철을 탔고, 식사를 준비했다. 그녀를 관찰할 때면 종종 나 자신을 보는 기분, 아니, 나보다 더 강하고 능력 있고 긍정적인 에너지로 충전된 튼튼한 분신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나에게는 파삭하게 말라부은 살갗만, 껍질만 남을 터였다.-264

 

이들이 친밀함을 쌓아가는 과정은 커다란 솜사탕을 야금야금 빨아먹는 기분으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빨리 녹아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인식할 무렵, 이야기는 커다란 반전으로 뒤덮인다.

델핀이 <미저리>의 유명한 플롯이 절로 떠오를 정도로 유사한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야금야금 빨아먹던 솜사탕 먹기는 잠시 제쳐두고 심리 스릴러의 긴장된 상황으로 빨려들어간다.

비밀에 싸여 있던 L 이 과거 이야기를 '스스로' 털어놓고, 델핀은 그 놀라운 이야기, 바로 L 의 진실을 소설로 써야겠다고 마음 먹고 있는 힘을 다해 그 이야기를 보존하려 하는데...

책 좀 읽었다, 영화 좀 봤다 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L 의 이야기에서 '표절'의 흔적을 바로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럴 듯한 이야기의 조합에 긴가민가, 하면서 혼란스러웠고 소설의 끝*에 가서야 여기저기 기운 것을 알아챘다. 그 뿐인가? 델핀과 L 이 어쩌면 한 사람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했고,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허구인지 고민하면서 끝에 도달했다.

[실화를 바탕으로]는 문학의 본질에 관한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면서도 표절 문학의 함정에 빠지기 쉬운 작가의 정체성에 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역시 작가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며...

사실과 허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빙빙 도는 이 소설 속에서 한참 동안 나를 잊고 자유롭게 유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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