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서 온 아이
에오윈 아이비 지음, 이원경 옮김 / 비채 / 2016년 6월
평점 :
품절


동화와 현실의 완벽한 결합[눈에서 온 아이]

 

나에게도 누군가가 수집하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러시아어 동화책이 있었으면 좋겠다.

아주 커다란 정사각형 모양으로 가죽 장정이고, 정교한 눈송이무늬가 표지에 돋을새김되어 있으며, 책등에 눈송이 무늬가 은박으로 찍혀 있는 책.

희귀본이라 아주 조심해서 다루어야 하는 것이라도 아버지의 손때가 묻어 있고, 아버지가 직접 그림을 보며읽어준 기억이 있는 책이라면  좋겠다.

'눈 소녀'가 주인공이지만 안타깝게도 슬프게 끝나는 이야기. <빨간 모자> 이야기와도 다르고 <눈의 여왕>과도 다른 신기한 눈 소녀 이야기는 여러 종류로 전해져 오지만...겨울만 되면 찾아오지만 결국 녹아버리고 만다고 한다.

 

이국의 언어로 적혀 있어서 내용을 하나하나 자세히 해석할 순 없지만 총천연색 삽화를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이야기에 푹 빠지게 되는 책.

첫 장을 넘긴 다음 다음 책장을 넘길 때쯤에는 너무 시간이 오래 지나서 차가 식어 있을 정도로 삽화 하나를 오래 오래 음미할 수밖에 없는 책.

러시아 옻칠화처럼 화려한 색깔에 친근하고 세밀한 그림을 보노라면 어느새 아버지의 굵은 음성이 겹쳐져 떠오르는 추억 속의 책.

 

스네구로치카, 1857(눈 소녀)

 

아름답지만 척박한 알래스카에서 가족과 함께 살며 그곳의 아름다움을 글로 쓰고 있는 저자는 '눈 소녀' 이야기를 모티브로 해서 동화와 현실이 완벽하게 결합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데뷔작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섬세하고 환상적인 묘사가  눈 속에 몸을 파묻고 있는 때만큼이나 시리지만 포근하게 내 온 몸과 마음을 끌어당긴다.

 

1920년 알래스카의 울버린 강.

문학 교수의 딸로 도시에서 자란 메이블은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사산으로 잃고 오직 고요 속에 들어서기 위해 알래스카 황야를 택해 들어왔지만 현실은 달랐다.

 

널마루에 비질을 하면 바닥이 긁히는 소리가 마치 뾰족뒤쥐의 날카로운 이빨에 심장이 뜯기는 듯했다. 설거지를 할 때면 접시와 그릇이 산산조각 날 것처럼 덜거덕거렸다.-10

 

아이를 잃은 뒤 슬픔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서를 거치지 않고 묻어만 두었던 것이 메이블을 자꾸 안으로 침잠하게 하고 죽음을 생각할 만큼 우울하게 만들었다. 서투른 사냥꾼이자 농부인 이들에게 이웃이 있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을까. 완벽한 첫 눈이 내린 날, 부부는 작은 여자아이 모양의 완벽한 눈사람을 만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눈소녀가 그들을 찾아왔다. 파란 천, 붉은 털. 파란색 외투를 걸치고 붉은 여우와 함께 재빠르게 나무들 사이로 뛰어다니는 가녀린 아이. 눈사람이 변해서 소녀가 된 게 아닐까, 동화가 현실이 된 게 아닐까.

이 아이는 메이블과 잭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아이가 아닐까. 계속 의심하게 만드는 상황이 이어지다가 마침내 아이는 부부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잭은 아이의 비밀을 알게 된다. 어디서 왔는지, 가족은 있는지...아이의 이름은 파.이.나. 라고 했다.

정글북 속 모글리처럼 파이나는 알래스카의 눈 속을 누비고 다니며 사냥하고 혼자 사는 법을 터득한 아이였다. 추운 겨울 잠시 부부의 집에 다녀간 아이는 봄이 되자 사라져 버렸다. "눈소녀" 동화 속 이야기처럼 파이나는 겨울만 되면 찾아오지만 따뜻한 봄이 오면 녹아버린 것일까. 다시 겨울이 되자 거짓말처럼 다시 나타난 아이에게 부부는 옷을 만들어주고 음식을 함께 먹고 그림그리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정착할 법도 하건만 파이나는 봄이 되면 다시 숲으로 돌아갔다.

 

세월이 가고 결코 이곳에 적응하지 못할 것 같던 부부는 부부를 제외한 어느 누구의 눈에도 띈 적 없는 비밀스런 눈의 아이 파이나와 이웃인 에스더네 집안의 도움으로 알래스카 생활에 젖어든다. 에스더네 막내 아들 개렛은 부부의 믿음직한 일꾼이 되어주었고 사냥꾼으로서도 흠잡을 데 없다. 그러던 어느날 개렛은 숲 속에서 신비한 여자아이가 덫에 걸린 백조를 잡는 광경을 보게 되는데...

 

손에 닿으면 녹아내리는 눈처럼 금방이라도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이미지를 가진 야생의 소녀 파이나는 동화 속 여주인공처럼 나약하지 않다. 야생의 여전사 같은 느낌으로 알래스카의 눈 덮인 황야를 누비고 다닌다. 금방이라도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도시로 내처 돌아갈 것만 같던 메이블도 알고 보면 꽤 강인한 여성이다. 아버지가 읽어주던 멋진 "눈소녀" 동화책의 환상 속에 빠져 살 것만 같던 그녀는 파이나를 만나 진짜 엄마, 진짜 여성이 되어 간다.

눈소녀 동화가 가진 안타까운 이별의 결말은 소설 속에서 드라마틱하게 구체화된다.

눈의 아이 파이나가 이대로 영영 사라져버리면 이 부부는 어쩌나, 하는 단순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동화 속 환상과 현실의 경계가 명확하면서도 아슬아슬하게 잇닿아 있는 이 스토리가 너무 마음에 든다.

동화와 현실의 완벽한 결합이란 바로 이런 것!

 

환상적인 눈의 세계에서 태어난 눈의 아이 이야기 속에 빠져 드는가 싶으면

혹독한 겨울을 보내기 위해 거대한 무스를 사냥하고 가죽을 바르고 내장을 끄집어내는

생존에 관한 급박한 사정이 다음 장에 나타나면서

거친 숨과 굵은 땀방울을 고스란히 느끼게 하는 진정한 이야기꾼.

 

에오윈 아이비의 데뷔작이 이 정도라면 다음 작품은 얼마나 대단할지 기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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