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받을지라도 패배하지 않기 위하여 - 원재훈 독서고백
원재훈 지음 / 비채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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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재훈 독서고백 [상처받을지라도 패배하지 않기 위하여]

 

대체로 다독을 하기는 하되 잡식성이기에 내가 읽은 "문학"은 얼마 되지 않는다.

학창 시절 "고전" 목록을 보고 대충 구색 맞추어 읽어야겠다는 "강제적 압박" 때문에 대부분의 이름난 저서들은 휙 훑어보았다고 해야 맞다.

이제 그 때 읽었던 이른바 대문호, 유명작가들의 문학들에 대한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고전을 청소년기에 읽으라고 추천하는 이유는 인생의 길잡이가 될 문구들이 있기에 유념하여 두라는 뜻이었을 거다.

하지만 입시공부에 찌들려 있던 그 때 그 시절에는 어지간한 문학소년, 소녀 아니고서는 그 위대한 작가들의 글줄에서 인생의 빛, 위대한 유산을 잡아채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두툼한 단테의 [신곡],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펄 벅의 [대지] 이런 책들을 펼쳐 놓고 앉아 있으면 친구들은 신기한 녀석일세~ 하는 시선으로 기웃거려 보다가 읽던 책을 홱 뒤집어 제목을 보고 "우와~"하고는 금세 내 주위를 떴다.

나는 아마도 두툼한 책으로 벽을 쌓고 아이들과의 시시껄렁한 잡담에서 벗어나려 했을 거다.

무엇이든 까발리지 않고는 못배기는 사춘기적 감성 때문에 내 얄팍한 자존심이 상처받을까 두려워 책을 방패 삼아 친구들의 호기심을 물리치려 했던 것이다.

그러니 문학이 제대로 내게 밝은 빛이 되어줄 리 만무했다.

엄청나게 어려워 보이고 제목조차 발음하기 어려운 책들 뒤에 숨어서 눈으로만 글을 좇아 읽었으니 작가의 철학이 읽힐 리 없고 제대로 된 안목이 길러질 리 없었다.

지금 와서는 그 때 기왕 고전문학을 읽는 김에 제대로 읽어 둘 걸 하는 후회가 든다.

호시절에는 작가와 작품과 주인공 이름까지 주루룩 읊어대며 팽팽한 기억력을 자랑했는데 이제는 늘어진 피부만큼이나 느슨해진 기억 때문에 [도전 골든벨] 문제에서 문학작품 문제가 나오면 머릿속은 몇 초 동안 블랙아웃이 된다. 늙었어, 늙었어...

 

더 나이들기 전에 고전문학에 도전해야겠다는 의지가 불타오르는 순간이다.

원재훈의 독서고백 [상처받을지라도 패배하지 않기 위하여]를 읽을 때야말로...

 

저자만큼 거창한 이유-상처받을지라도 패배하지 않기 위하여-를 생각해내지는 못하겠다.

하지만 가끔 만나는 진짜 문학을 제대로 이해하고 넘어가자는 다짐을 해본다.

웬만큼의 경험이 몸 곳곳에 아로새겨진 지금, 문학을 단지 어렵다는 이유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내치고 싶지는 않다.

수험생만큼의 엉덩이 힘을 자랑하지는 않더라도 멋진 작품을 만났을 때 몇 시간 정도는 집중해서 읽을 수 있는 여력이 남아 있다.

읽어낸 책을 나의 경험에 비추어 멋지게 글로 재해석해내는 경지에 이르지는 못하더라도 내용 요약, 짤막한 감상 정도는 엮어낼 수 있도록 단련해야겠다.

 

저자가 소개해 준 책 중에 대부분은 읽어본 적이 있는 것이지만 내가 읽어낸 감상에 비해 풍부하고 심도 깊은 독서기록에 큰 감명을 받았다.

[필경사 바틀비]는 [백경]으로 유명한 허먼 멜빌의 작품인데 아직 읽지 않았다.

워낙 입소문이 난 작품이라 언젠가는 읽어야지 하고 미뤄두었던 책인데 저자의 소개를 읽고 급 검색해서 기어이 장바구니에 담아 놓았다.

최근 문학동네판이 많이 소개되었지만 저자는 창비판을 추천한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보다는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가 좀 더 우리에게 가깝게 다가와 말하는 것 같다는 단순한 이유에서라고 한다.

'하고 안하고'는 바틀비라는 특이한 인물이 보여주는 존재의 고독으로 보기 때문.

 

비채에서 발간된 바 있는 [미국의 송어 낚시], [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 편에서는 나도 읽은 적 있는 [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를 이해하는 방식에서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고 말하고 싶다.

생태주의 문학이란 형식을 처음 접했던 내겐 분명 난해한 단편들이 수록되어 있었는데, 저자의 기록을 읽고는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거란 자신이 생겼다.

전통적인 소설이 품고 있는 플롯이 없어도 너~ 무 없다며 일단 작품의 독특함을 인정한 다음에는 이 책 나름의 매력을 어필하고 있기 때문이다.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소설에서 문장을 보았다며 '무심코 집으려다가 손을 베이게 되는 유리조각 같은 문장들이 나태한 문장을 혼내고 있다'는 표현을 한다.

아! 그랬었지.

분명 이야기로 풀어나가기는 어려웠지만 뭔가 캘리포니아의 반짝이는 햇빛처럼 가슴을 찌르는 문장, 촌철살인의 문장들이 있었단 말이지...

그렇다면 나도 한 번 "살아 꿈틀거리는 싱싱한 송어낚시"를 경험할 수 있을까.

 

이런 식으로 나의 독서와 저자의 독서를 비교해가며 읽는 재미도 있고, 내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새로운 독법을 배우는 뿌듯함도 있다.

카뮈, 헤밍웨이, 하루키, 생텍쥐베리, 얀 마텔...

문학 속에서 '대단한' 작가들을 소환해내고 삶의 비밀을 숨겨 놓은 문장을

찾아나서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린다.

얼마만의 '의욕'이 불타오르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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