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의 왕국 미스터리, 더 Mystery The 9
프리드리히 글라우저 지음, 박원영 옮김 / 레드박스 / 2015년 4월
평점 :
절판


영혼은 깨지기 쉽다  [광기의 왕국]

 

요즘 비정상회담 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을 즐겨 본다.

내가 눈여겨 보는 인물은 비공식 중국대표^^ 장위안이지만 재미없기로 정평이 나 있는 이른바 "노잼 선생" 다니엘도 가끔 눈에 들어 온다.

대부분 무뚝뚝한 듯 표정 없는 얼굴로 일관하지만 살짝 웃음기가 감도는 표정을 지을 때면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같다.

다니엘이라는 사람 하나만을 두고 독일 국민 전체를 운운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지만 그가 전하는 말 속에서 대략 독일 사람들의 전반적인 특징을 읽어낼 수 있다. 기계와 건축에 뛰어나고 장인을 우대해주는 나라 독일. 독일하면 생각나는 이미지는 아우토반, 카이저 콧수염, 번쩍번쩍한 자동차 같은 무기질적인 것들이다. 밝고 온화하다거나 '부드러운, 화려한' 등의 수식어와는 정반대의 말들만 떠오른다.

투박하고 거친 발음을 뱉어내는 독일어에서도 느껴지듯이 왠지 부드럽지 않고 그래서 더욱 재미없을 것만 같은 "독일 추리 소설".

익숙지 않은 독일 추리 소설을 프리드리히 글라우저의 슈투더 시리즈로 접하게 되었다.

 

[광기의 왕국]은 형사 슈투더 시리즈 2편이다. 1편을 건너 뛰고 2편부터 읽게 되어 유감이긴 하지만 왠지 작가의 이력을 읽은 후  [광기의 왕국]을 보니 자전적 미스터리라는 말이 확 와닿는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불화로 정신이 피폐해진 작가는 페결핵을 앓던 중 복용한 모르핀에 중독되어 정신 병원 입,퇴원, 자살 시도를 거듭했다고 한다.

'슈투더 시리즈' 다섯 권을 출간했으나 마흔 두살의 나이, 결혼식 전날 뇌출혈로 사망한 그의 인생은 드라마틱하기 이루 말할 수 없다.

제목과 작가의 삶이 드리우는 짙은 우울을 안고 시작했기에 처음부터 무거운 시선으로 읽어내려갈 수밖에 없었는데...

미스터리물에 등장하는 형사 치고는 꽤 고령인 슈투더의 일거수 일투족을 따라가다 보니 실소가 터져 나온다.

왠지 허술해 보이고 왠지 옆에서 도와줘야만 할 것 같은 형사가 과연 사건을 잘 해결해낼 수나 있을까,싶어서였다.

이 형사의 장점은 뭘까??
정년퇴직을 육 년 앞두고 있지만 상관의 노여움을 사 경감에서 좌천당하고 지금은 다시 형사로 돌아온 슈투더.

다행히 그는 술에 쩔어있지는 않고 인간관계가 황폐하지도 않으며 성격이 까칠한 것 같지도 않다.

 

누구나 깊은 잠에 빠져 있을 새벽 5시, 그는 날카로운 전화벨 소리에 잠을 깼다. -7

[광기의 왕국] 첫 문장이다.

꽤 오래 전 작품이니 만큼 추리소설에서 빠지지 않는 단골 소재 "전화벨 소리"가 어김없이 등장한다.

그리고 슈투더는 사건 현장에 제 발로 찾아가는 게 아니라 의뢰인에 의해 사건 현장에 모셔진다.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란트링겐 요양 및 정신병원에서 피에털렌이란 환자가 탈출했고 그와 동시에 '미치광이 병원'의 원장 또한 사라졌다. 슈투더를 직접 찾아와 모셔가는 이는 정신병원의 부원장 에른스트 라두너 박사이다.

 

"이 일을 전부 다 파헤치려고 하면, 사실 지금 이 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예감이 들긴 합니다만, 어쨌든 당신이 파헤치려고 하면 많은 사람들 속으로 기어들어가야 할 겁니다.'

 

어떤 물적 증거보다 누군가의 한 마디가 더 큰 것을 말해준다고 믿는 심리 수사의 일인자답게 슈투더는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 그 대가로 우리는 그가 만나는 사람마다  적어놓는 노트들을 일일이 기억해야만 한다.

사라진 원장과 친자살인범으로 정신병원에 오랫동안 감금되어 살아온 피에털렌에 관한 것은 물론이고 의사, 간호사, 경비원까지 병원에서 만나는 많은 이들의 이름과 정보가 슈투더의 노트에 빼곡히 기록된다.

광기의 영혼, 마토가 지배하는 어둠의 왕국이라는 이 정신병원에서 누가 진실을 말하고 누가 거짓을 말하는 것인지 정신차리고 지켜보아야 한다.

정신이 아픈 사람들과 함께 하다 보면 전염된다는 것이 사실일지?

슈투더가 기억해낸 바로는 부원장 에른스트 라두너 박사는 예전에는 지금처럼 "가면같은 미소"를 짓는 사람이 아니었다.

 

원장의 시신이 발견된 후 더욱 부지런히 이곳저곳을 살피고 다니지만 슈투더가 용의자로 점찍은 이는 창밖으로 뛰어내리고 그 이후로 안타까운 목숨들이 둘이나 더 희생된다.

정황증거가 정신 세계의 복잡성과 한데 엉켜 실타래들을 만들고만 있는데, 이 곳에 오래 머물며 '마토의 지배를 받기' 전에 슈투더는 사건을 해결할 수 있을까?

슈투더는 정신분열증 사이코 패스, 공포 신경증 환자 등 정신이 아픈 사람들을 이해하려다 자충수를 두게 되는 건 아닌지...

 

처음부터 사건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가면의 미소 뒤에 숨어 사건을 관망하고만 있는 라두너 박사의 이해 안되는 행동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그 비밀은 끝에 가서야 밝혀진다.

 

"소위 혁명이라고 불리는 사건들은 사실 사이코패스들의 복수에 지나지 않는다."-275-

 

깨지기 쉬운 유리같은 영혼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 이 곳에서 의사는 영혼의 의사가 되어야 한다.

정신이 무너진 사람이 절뚝거리며 오면 그의 영혼을 곧게 펴고 낫게 해주는 것이라는 라두너의 말은 그래서, 그에게 주어진 힘이 얼마나 큰지,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치게 되는지를 넌지시 암시해준다.

 

꽤나 흥미진진한 사건이 얽히고 설키며 어마어마한 반전히 숨어 있는 등의 거대한 스펙트럼을 자랑하는 추리소설은 아니지만 "도대체 왜?"라는 것에 초점을 두고 본다면 가히 가슴 두근거리는 과정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일반 사회가 아닌, "마토가 지배하는 광기의 왕국"이라는 특이한 곳을 배경으로 삼았다는 점을 감안하고 본다면 그 왕국 안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이들의 입장에 서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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