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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티의 지층들 - 현대사회론 강의
이진경 엮음 / 그린비 / 2007년 3월
평점 :
“현대사회의 지층을 탐사하는 대중지성의 모험”
들뢰즈(그리고 가타리)의 노마디즘과 접속되어 새롭게 생성된 맑스의 코뮨주의를 지속적으로 ‘다르게’ 반복하고 있는 이진경의 학문세계에 대해서 “훈고학 혹은 극단적 인문학의 레토릭의 폐쇄적 재생산”에 몰두하는 것이라며 비판하는 목소리가 줄기차게 계속 있어왔지만, 정작 이진경 본인은 스스로를 “불모가 된 폐허의 땅 ‘이념의 대지’를 헤집으며 새로운 혁명의 꿈을 찾는 몽상가”로 규정하고, 자본주의적 가치법칙에 따른 교환과는 다른 방식으로 구성되는 삶의 방식으로서 코뮨주의를 탐색하는 연구자의 길을 계속 가고 있다.
그리고 이제 그런 그의 ‘몽상’과 ‘탐색’이 현대사회를 총체적으로 분석하는 집단적인 연구의 성과로 또 한 번 나타났다. 그의 말에 따르자면,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사회학개론 등의 수업을 강의한 경험을 통해, 현대철학이나 사회이론이 그 사유의 심도가 깊어지고 분석의 의외성이 확장된 탓에 이론적으로 훈련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에 따라 이론 자체의 소외까지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현대사회를 포괄적으로 소개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근대성에 대한 포괄적인 개요에서 시작하여, 자본주의 및 근대사회를 구성하는 몇 가지 요소들을 각각의 축으로 삼아 ‘포스트모던’한 양상까지 아우르는 하나의 시대로서 ‘모던’을 이론적으로 분석하고 있는 이 책 『모더니티의 지층들』을 기획하고 출간했다는 것이다.
책은 총 14개의 강의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각 주제 별로 네 개의 부로 다시 나누어져 있다. 제1부 근대성의 이론은 책 전체의 서론으로서 편저자 이진경이 모더니티와 합리성을 개념적으로 설명하고 있는「근대사회와 모더너티」가 실려 있다. 이 글에서 그는 모더니티, 혹은 근대성이 근대적 형태의 합리성을 뜻하고, 그것은 계산가능성을, 그리고 계산에 따른 통제가능성을 그 원리로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모더니티의 폭력이 이른바 봉건사회를 어떻게 근대사회로 변모시켰는지를 제2부 근대자본주의에 실린 네 편의 글들이 각각의 차별화된 관점에서 조망하고 있는데, 제2강「자본주의, 혹은 자본의 공리계」(이진경)에서 제출된 테제인 “자본주의는 욕망의 체제이다”를 기초로 하여, 제3강「자본주의와 노동의 체제」(이수영), 제4강「화폐의 권력, 반화폐의 정치학」(디디), 제5강「자본주의와 계급이론」(조원광)의 논의가 펼쳐지고 있다. 특히 조원광의 글「자본주의와 계급이론」은 이진경이 이미 『미-래의 맑스주의』에서 개진한 바 있는 “한 개의 계급이론”이 한결 명료하게 제시되고 있다. 예컨대, 욕망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 체제에는 오직 하나의 계급, 곧 부르주아 계급만이 있을 뿐이며, 노동자도 자본주의의 공리계를 욕망하는 한 부르주아의 일부일 뿐이라는 논쟁적인 해석이 제기된다. 부르주아는 자본의 논리에 복종하는 한에서 노예계급이며, 모든 계층이 다 부르주아 계급이므로,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는 하나의 노예계급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진정한 계급투쟁은 맑스와 들뢰즈ㆍ가타리를 접속시켜 “프롤레탈리아트-되기”, 즉 자본주의의 공리계를 거부하고 자본주의 질서의 '외부'를 만들어가는 “계급 대 비(非)-계급”의 투쟁으로 지양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제3부 근대적 체제에서는 자본주의가 근대인의 일상과 습속을 어떻게 변모시켰는지가 설명된다. 그리고 제4부에서는 모더니티를 규정하는 합리성-계산가능성-통제가능성이 만들어낸 근대사회의 여러 가지 양상들이 탈근대로 명명되는 현대사회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단절ㆍ지속되고 있는지가 분석된다. 특히 마지막에 실린 두 편의 글이 주목할 만한데, 먼저 현민이 쓴 13강「소수자와 차이의 정치」는 그간 소수자의 개념적 정의ㆍ계급의 정치ㆍ인권과 시민권ㆍ다문화주의적인 차이의 인정ㆍ정치적 올바름(PC, political correct)ㆍ정체성의 정치 등의 논점들과 결부되어 <연구공간 수유+너머>가 주도하고 있는 “소수자 정치 혹은 차이의 정치” 담론을 향해 제기된 비판들에 대하여 조목조목 반론을 펴고 있는 점이 돋보인다. 그리고 정정훈의「전지구화, 혹은 제국과 다중」은 현재까지도 맑스주의 학계 내부에서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의 문제작『제국』(Empire, 2001)과『Multitude』(2004)의 내용을 기초로 하여 전지구화된 자본주의 및 전지구적 정치질서, 그리고 그에 저항하는 반란의 집합적 주체성을 새롭게 분석하고 있는데, 이 역시 최근 사회과학의 발전된 자본주의론을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이 책에서 아쉬운 점을 한 가지만 지적하자면, 14편에 달하는 글들이 한결같이 모더니티의 두 가지 측면 중 하나의 측면인 정치-경제적 및 사회적 모더니티에만 집중하여 모더니티를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데 최근 문화사회학 분야에서 제출된 모더니티 관련 연구들을 보면, 미학적-문학적 모더니티의 측면이 정치-경제적 및 사회적 모더니티와 구별되어 논의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미학적-문학적 모더니티는 정치-경제적, 사회적 모더니티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동시에 그것들과 끊임없이 긴장과 갈등, 그리고 투쟁 관계에 있다. 물론 이 두 가지 측면의 모더니티는 모두 모던 세계의 역사적 산물에 속한다. 이러한 사실은 근대 이후에 지속적으로 진행되어 온 사회적―문화적 분화 과정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멀리는 프리드리히 니체에서부터 가깝게는 게오르그 짐멜이나 발터 벤야민에 이르는 미학적-문학적 모더니티의 탁월한 이론가ㆍ비평가들의 작업이 이 책에서 보충되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어쩌면 이 책이 주로 사회이론 강의에 집중하고 있다 보니 모더니티에 대한 설명을 정치-경제적 및 사회적 모더니티에만 제한하고 있는 측면이 없지 않으나, 이는 아마도 이 책의 다음 시리즈로 기획되어 지난 4월에 출간된『문화-정치의 영토들』(현대문화론 강의)에서 보완되고 있으리라 기대해 본다.
* 합리성-계산가능성-통제가능성-진보의 신념 그리고 그 물적 실현인 근대화 과정의 규범적 지향을 내재적으로 비판하는 또 다른 흐름이 근대성의 영역에서 동시대적으로 생성되었던 바, 야우스, 버만, 래쉬, 푸코 등의 상이한 논자들이 공통적으로 포착하고자 했던 이 근대 내부의 대항근대성(counter-modernity)을 미학적-문학적 모더니티 혹은 예술적-문화적 모더니티로 개념화하는 경향이 최근 문화사회학계를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다. 문화적 모더니티는 19세기 중ㆍ후반으로부터 20세기 초반에 이르는 유럽의 지성사, 예술사, 문학사의 영역에서 다양하게 표출되었던 근대적 삶과 사유의 양식에 대한 비판적 사유와 감수성의 표현들로 구성된 일종의 담론 구성체이다. 그것이 담론 구성체인 한에서 문화적 모더니티는 다양한 저자, 개념, 수사(修辭), 전망, 전략, 감수성, 테마 등을 포괄하는 복합적 성좌(constellation)를 구성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다성적 담론 구성체를 관통하는 일관된 문제의식 중의 하나가 바로 시간과 역사에 대한 독특한 관점이라는 점에서, 김홍중은 그것을 '순간의 역사시학'이라 명명하고 그 대표적인 예로 발터 벤야민을 거론한다(김홍중, 2006). 수용미학의 창시자 야우스(Hans Robert Jauß)가 사용한 미적 모더니티(ästhetische Moderne)라는 개념은 영미문학이론에서 하나의 장르로 파악되는 ‘모더니즘’이라는 협소한 개념과는 달리, 루소, 독일낭만주의, 괴테, 보들레르, 프루스트, 아방가르드, 미래파, 입체파,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등 다양한 근대예술현상과 니체, 짐멜, 벤야민, 아도르노 등의 문화비판의 흐름을 포괄하는 근대의 독특한 미학적 선회를 특화시켜 지칭하는 용어이다(Jauß, 1970; Jauß, 1989). 야우스의 이러한 입론은 마샬 버만이나 스콧 래쉬처럼 다양한 문학작품들과 예술작품들을 폭넓게 소화하면서 모더니티의 개념을 미학의 영역을 중심으로 탄력적으로 사용하는 영미권의 논자들의 의견과도 은밀히 조응하고 있으며(Berman, 1982/1988; Berman, 1992; Lash, 1994), 모더니티를 기본적으로 시대 구분으로 파악하는 대신에 자기 시대에 대한 성찰적 거리 혹은 에토스로 설정하는 푸코의 논의와도 맥을 같이 한다(Foucault, 1984:1387). 근대성 내부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두 개의 상충하는 모더니티(Calinescu, 1977: 53)에 대한 천착은 모던/포스트모던의 이분법적 사유를 지양하면서 문화적 산물들에 대한 심층적인 논의를 펼치고 있는 최근의 인문, 사회과학적 흐름 속에서 폭넓게 수용되고 있다(Bohrer, 1994; Habermas, 1984: 26-35; 남진우: 2001). 김홍중은 이러한 논의들의 핵심을 이루는 모더니티의 ‘미적’ 차원을 ‘문화’의 차원으로 확장시켜 ‘문화적 모더니티’라는 개념을 사용한다(김홍중, 2006). 한편 박성환은, 짐멜의 ‘사회학적 미학’에 대한 논의를 통해서 ‘문화적 근대’라는 용어를 이미 사용한 바 있다(박성환, 1999). 또한 독일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 출신의 짐멜 연구자인 김덕영 역시 니체를 미학적-문학적 모더니티의 최초의 해석자로 규정하고 베버와 짐멜이 이러한 니체의 반(反)-사회학적인 모더니티 이론을 사회학적으로 전용하였음을 분석한다(김덕영,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