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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의 유령
밀로스 포먼.장 클로드 카리에르 지음, 이재룡 옮김 / 현대문학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이성의 잠은 유령을 낳는다”
  
 

한 화가가 있었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희망과 유명해지고 싶다는 욕망을 모두 충족시키는 삶을 살고자 했던 화가는 돈의 중요성을 결코 과소평가하지 않으면서도 서민으로서 권력에 저항하는 이중적 삶을 영위했다. 그의 성격은 다소 수줍은 편이었으나 혼란과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만큼 늘 타협하는 자세를 취했다. 재능이 있는 촌뜨기에 불과했던 화가는 프레스코, 테피스트리 밑그림, 초상화, 인물화, 판화로 스페인의 수석 궁정화가로 출세한다. 그의 작품세계는 현실과 환상의 갈림길에서 보여주는 인간에 대한 진실한 표현으로 불린다. 초상화, 종교화를 막론하고 현실을 그 근원까지 직시하면서 무의식적 상황 하에서 인간성의 번뇌 내지는 육체의 불건전한 상태를 풍자적이고 혁신적으로 그려 리얼리즘을 준비한 이 화가의 이름은 바로 프렌시스코 고야(Francisco de Goya, 1746~1828)이다.


고야는 ‘이성’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았던 점에서 계몽주의 사고를 가졌던 18세기 화가에 속했지만, 앙드레 말로가 지적했듯이, “근대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젖혔던” 위대한 예술가로 평가받아 왔다. 또한 그의 작품이 스페인의 독특한 니힐리즘에 깊이 뿌리박고 있으며, 그 당시 절망적인 사회상을 직접 체험했고 이를 풍자하고 있어 인생과 인간 자체에 대한 성찰을 할 수 있게 도와준다는 사실로 인해 그의 그림과 일생은 소설이나 영화의 좋은 소재가 충분히 될 만하다. 그런 기대가 비로소 실현 되어 현대의 독자 혹은 관객과의 만남을 시작하였다. 영화 ‘아마데우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등으로 널리 알려진 체코 출신의 거장 밀로스 포만 감독과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등 세계적 작가들의 원작을 영상으로 옮겨 금세기 최고의 시나리오 작가로 손꼽히는 장 클로드 카리에르가 영화를 만들기 위해 미리 직접 함께 집필한 소설 『고야의 유령Goya’s ghosts』이 작년 12월에 번역 출간되었다. (영화 ‘고야의 유령’ 역시 올해 상반기 중으로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다고 한다.)

소설은 중세의 끝자락에서 저물어갔던 스페인 제국의 한 가운데서 반역과 혁명의 시대를 민중들과 함께 맞이했던 위대한 화가의 시선을 통해 두 남녀의 비극적 운명을 다루고 있다. 명석한 두뇌와 재주로 권력과 출세의 욕망에 사로잡힌 남자 로렌조 신부, 또 그 남자에게 순정을 빼앗긴 여자 이네스, 이들의 운명적인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비극적인 재회가 혼란스러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펼쳐진다. 또한 작가들은 어둡고 혼탁했던 고야의 그림에서처럼 단지 겉으로 드러난 역사의 현장 이외에도 핏빛으로 얼룩진 소시민들의 삶까지 조심스럽게 조명하며 역사의 이면에 숨겨진 인간 삶의 진실을 보여주고 있다. 소설의 갈등 구조는 이네스가 누명을 쓰고 종교 재판소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면서 비등점을 향해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로렌조는 감옥에 갇힌 이네스를 사랑하게 된다. 이네스의 아버지는 딸을 구하기 위해 성당 재건 비용을 부담키로 하는 등 백방으로 노력한다. 그는 로렌조를 심문해 종교재판소를 모독하는 허위문서를 강제로 받아낸다. 결국 로렌조는 해외로 추방되고, 세월은 훌쩍 20여 년을 뛰어넘는다. 로렌조는 프랑스 나폴레옹 정권의 핵심 간부가 되어 스페인에 돌아온다. 그는 종교가 아닌 이성과 혁명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야망을 품는다. 한편 이네스는 감옥에서 로렌조의 딸을 낳아서 수녀원에 보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로렌조는 딸을 찾아다니지만, 수녀원을 뛰쳐나간 딸은 우여곡절 끝에 거리의 여자가 되고 만다. 로렌조는 딸의 존재가 자신의 야망 실현에 걸림돌이 될 것을 우려해 마드리드의 모든 창녀들을 해외로 보내는 정책을 추진하는데… 화가 고야는 나이가 들어 귀가 들리지 않는 상태가 되지만, 엎치락 뒤치락하는 운명의 엇갈림 속에서 이네스와 그녀의 딸을 도우려는 수호천사가 된다.
 

고야의 작품 인생에 가공의 두 남녀의 사랑과 이별 이야기를 잘 연결시킨 이 소설은 그 자체로서 마치 당대의 역사적 사건을 주제로 한 고야의 수많은 그림들 중 하나가 실제로 그랬을 법하다는 상상을 갖게 한다. 고야의 그림을 제대로 이해하고 감상하기 위해서는 우선 고야가 살던 당대의 혼란과 중요한 사건들뿐만 아니라 근 일세기에 달하는 스페인 및 유럽 역사에 관한 긴 안목이 함께 요구된다는 점에서 이 소설 역시 주인공들의 운명에 어느 정도 공감하기 위해서는 작품의 배경이 되는 스페인의 역사적 문맥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작품의 제목 ‘고야의 유령’에서 ‘유령’은 궁정화가로서 누구보다도 상류층의 삶을 동경했던 고야로 하여금 끝내는 인간의 탈을 쓴 괴물들이나 나폴레옹 전쟁의 참상, 종교재판과 전체주의에 대한 조소와 분노, 민중의 빈곤 등을 본능적으로 그리게 한 ‘기억들’, 즉 상기되는 것을 거부하고 억압된 무의식을 가장하여 화가에게 돌아오려고 몸부림친 기억들을 의미함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시간의 안개로부터 엄습해오는 유령과 괴물들. 그것은 묻히고 감추어졌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돌아오는 어떤 것이다. 회상을 거부하게 만드는 기억이 바로 고야의 그림 속에 존재하는 유령이다. 철학자 리처드 커니가 트라우마적인 기억 혹은 “불가능한” 기억이라고 부른 그것이 결국은 고야의 그림들을 존재하게 했다는 사실을 소설은 영화적인 묘사로 가득한 서사 전개의 기법을 통해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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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려, 그 사람
지강유철 지음 / 홍성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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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한국 보수 기독교의 영원한 스캔들, 장기려"

 

   평전(評傳)은 단순히 비범한 한 인간의 일생을 다룬 ‘전기'(biography)가 아니라 그 인물에 대한 집필자의 일정한 평가와 해석이 담겨 있는 ‘비평적 전기’(critical biography)를 의미한다. 물론 그 어떤 전기이든 해당 인물에 대한 일정한 평가와 해석이 들어 있기 마련이지만, 일반적인 전기와는 달리 그 인물에 대한 뛰어난 업적과 더불어 한계와 인간적인 약점도 함께 드러내는 것이 올바른 의미의 평전이다.

 

  나아가 ‘평전’은 문제적 개인의 일대기를 사실적으로 재구성하면서도 거기에 평전 작가의 서사적 상상력이 상당부분 개입하는 이른바 ‘사실적 허구’의 양식이다. 이러한 두 가지 특성 때문에 평전은 평전 작가의 비평적 해석과 평가가 깊이 매개될 수밖에 없는 인물 비평 양식인 것이다. 좋은 평전을 통해 우리는 한 시대의 중요한 인물을 둘러싼 사상 ․ 철학 ․ 역사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고, 그 인물의 생각과 행동이 시대의 흐름을 따라 변동하는 양상에 대한 평전 작가의 날카로운 비평적 안목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다.

 

  올해 2월에 출간된 『장기려, 그 사람』(지강유철 著, 홍성사 刊行) 역시 불우한 시대를 자신만의 독특한 신념으로 맞서 나갔던 문제적 개인의 삶을 통해 우리 시대 종교와 윤리의 의미를 전체적으로 통찰하게 하는 종교적 평전 문학의 속성을 잘 보여주는 570여 쪽의 방대한 노작(勞作)이다. 보수 근본주의적 개신교를 신앙 배경으로 하는 칼럼니스트이자 인터뷰어인 지강유철이 성산기념사업회의 장기려 서거 10주기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기획한 평전 저술의 담당을 맡아 2년여의 자료 섭렵과 취재와 인터뷰를 통해 공들여 펴낸 책이다.

 

  성산 장기려 선생은 생존해 있을 때부터 이미 ‘한국의 슈바이쳐’, ‘살아있는 성자’, ‘작은 예수’로 칭송을 받았던 저명한 기독교 의료인이다. 비록 그 자신은 한국 기독교계에서 가장 근본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예수교 장로회 고신 교단에 소속되어 있었음에도, 재야 운동권 및 진보적 기독교계에서 확고한 위상을 차지하던 씨알 함석헌 같은 이들과 일생에 걸쳐 깊은 교류를 나눌 정도로 열려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데도 선생의 소속 교단이나 월남 인사로서 북한체제에 대한 비판적인 정치성향 때문에 그의 전체적인 삶에서 발견되는 다른 긍정적 측면들이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예컨대, 선생이 6 ․ 25 전쟁 이후 우직스럽게 무료 병원을 계속한 것이나 아미동에 있는 부산의대 병원 뒤편 창고에 아무렇게나 방치된 행려병자들을 식구처럼 돌보았던 것, 부산 간질 환자들의 모임인 ‘장미회’의 초대 회장이 되어 죽을 때까지 그들을 섬겼던 것, 정부가 의료보험을 시작하기 10년 전에 이미 가난한 환자들을 위한 의료보험조합을 설립했던 것, 그리고 정부가 영세 사업자를 위한 의료보험을 포기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23만 명의 회원을 둔 의료보험조합을 만들었던 것, 평생을 무소유와 무권력, 무명예로 일관하고자 했던 모습들을 거의 주목하지 않았다.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함석헌이나 안병무, 김재준, 문익환, 리영희, 강원용 등과 정치적 ․ 신학적 ․ 교파적 배경을 달리 했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삶까지도 전부 수구적이고 퇴행적인 근본주의적 기독교의 색채를 띠었을 것이라고 막연한 편견을 가져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통당하는 이들 속에서 함께 고통당하는 신(과 예수)의 모습을 보고, 그 수난에 자신도 동참함으로써 이웃과 신(과 예수)와 자신의 구원을 총체적으로 이루어가고자 했던 선생의 행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신앙적 ․ 윤리적 ․ 정치적 실천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더욱이 그가 ‘부산 모임’이나 ‘종들의 모임’ 같은 무교회주의적 성향의 급진적 소종파 신앙운동에 동참한 것에 대해서도 우리는 진지하게 재평가해야만 한다. 말년으로 갈수록 선생은 오늘날의 교회가 과연 예수나 바울이 추구했던 자유와 해방과 탈주의 공간으로서의 에클레시아 코뮌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을 본격화했다.

 

  그리고 마침내 신앙과 삶이 결합된 공동체들 가운데서 기존의 제도적 교회에서 벗어나 목사도 없이, 교리도 없이, 그리고 교단적 세력도 없이 침묵하고, 기다리며, 영성적으로 촉발되는 삶을 사는 이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하여 복음의 본질적인 측면보다는 비본질적인 의례나 직제, 교리, 문서, 예배당 따위를 위하여 헌신하게 하고 마치 그것들이 있어야만 고통으로부터의 구원이 가능한 것 인양 신도들을 호도하고 있는 교회 지배자들과 그는 더 이상 타협할 수 없게 된다. 선생에게 그러한 문제의식은 자기 실존, 즉 자신의 삶을 살아가면서 적당히 타협하며 궁극적인 질문을 자신의 불성실로 상쇄시키고 약화시키는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달리, 스스로 진실하고 성실하게 그러한 진리 앞에 자신을 먼저 복종시켰다는 점에서 실로 독특한 것이었다.

 

  오랜 교회생활도, 장로의 직책도, 교우들과 지인들의 신뢰와 선망도 그러한 진리에 대한 그의 열정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되지 못했다는 데서 우리는 교파와 신학과 교리마저도 복음의 정신 앞에서 철저히 상대화시킬 수 있었던 그의 자유로움을 엿볼 수 있다. 선생의 삶은 소위 이념적으로 또는 관념적으로만 진보적인 우리들의 삶을 부끄럽게 한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 예수가 자신의 대중들과 당했던 고난의 길을 오늘 여기서 이어간다는 것, 바로 그것을 장기려 선생은 하나의 가능한 실제 사례로서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의 역할을 충실히 하며 우리 사회에서 고통과 소외가 재생산되는 데 솔선수범하고 있는 한국 교회 앞에 그네들이 자랑하는 정통주의 기독교인 장기려의 ‘이단적’ 삶은 영원한 ‘스캔들’로 남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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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티의 지층들 - 현대사회론 강의
이진경 엮음 / 그린비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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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의 지층을 탐사하는 대중지성의 모험”

  

  들뢰즈(그리고 가타리)의 노마디즘과 접속되어 새롭게 생성된 맑스의 코뮨주의를 지속적으로 ‘다르게’ 반복하고 있는 이진경의 학문세계에 대해서 “훈고학 혹은 극단적 인문학의 레토릭의 폐쇄적 재생산”에 몰두하는 것이라며 비판하는 목소리가 줄기차게 계속 있어왔지만, 정작 이진경 본인은 스스로를 “불모가 된 폐허의 땅 ‘이념의 대지’를 헤집으며 새로운 혁명의 꿈을 찾는 몽상가”로 규정하고, 자본주의적 가치법칙에 따른 교환과는 다른 방식으로 구성되는 삶의 방식으로서 코뮨주의를 탐색하는 연구자의 길을 계속 가고 있다.

 

  그리고 이제 그런 그의 ‘몽상’과 ‘탐색’이 현대사회를 총체적으로 분석하는 집단적인 연구의 성과로 또 한 번 나타났다. 그의 말에 따르자면,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사회학개론 등의 수업을 강의한 경험을 통해, 현대철학이나 사회이론이 그 사유의 심도가 깊어지고 분석의 의외성이 확장된 탓에 이론적으로 훈련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에 따라 이론 자체의 소외까지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현대사회를 포괄적으로 소개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근대성에 대한 포괄적인 개요에서 시작하여, 자본주의 및 근대사회를 구성하는 몇 가지 요소들을 각각의 축으로 삼아 ‘포스트모던’한 양상까지 아우르는 하나의 시대로서 ‘모던’을 이론적으로 분석하고 있는 이 책 『모더니티의 지층들』을 기획하고 출간했다는 것이다.

 

  책은 총 14개의 강의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각 주제 별로 네 개의 부로 다시 나누어져 있다. 제1부 근대성의 이론은 책 전체의 서론으로서 편저자 이진경이 모더니티와 합리성을 개념적으로 설명하고 있는「근대사회와 모더너티」가 실려 있다. 이 글에서 그는 모더니티, 혹은 근대성이 근대적 형태의 합리성을 뜻하고, 그것은 계산가능성을, 그리고 계산에 따른 통제가능성을 그 원리로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모더니티의 폭력이 이른바 봉건사회를 어떻게 근대사회로 변모시켰는지를 제2부 근대자본주의에 실린 네 편의 글들이 각각의 차별화된 관점에서 조망하고 있는데, 제2강「자본주의, 혹은 자본의 공리계」(이진경)에서 제출된 테제인 “자본주의는 욕망의 체제이다”를 기초로 하여, 제3강「자본주의와 노동의 체제」(이수영), 제4강「화폐의 권력, 반화폐의 정치학」(디디), 제5강「자본주의와 계급이론」(조원광)의 논의가 펼쳐지고 있다. 특히 조원광의 글「자본주의와 계급이론」은 이진경이 이미 『미-래의 맑스주의』에서 개진한 바 있는 “한 개의 계급이론”이 한결 명료하게 제시되고 있다. 예컨대, 욕망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 체제에는 오직 하나의 계급, 곧 부르주아 계급만이 있을 뿐이며, 노동자도 자본주의의 공리계를 욕망하는 한 부르주아의 일부일 뿐이라는 논쟁적인 해석이 제기된다. 부르주아는 자본의 논리에 복종하는 한에서 노예계급이며, 모든 계층이 다 부르주아 계급이므로,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는 하나의 노예계급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진정한 계급투쟁은 맑스와 들뢰즈ㆍ가타리를 접속시켜 “프롤레탈리아트-되기”, 즉 자본주의의 공리계를 거부하고 자본주의 질서의 '외부'를 만들어가는 “계급 대 비(非)-계급”의 투쟁으로 지양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제3부 근대적 체제에서는 자본주의가 근대인의 일상과 습속을 어떻게 변모시켰는지가 설명된다. 그리고 제4부에서는 모더니티를 규정하는 합리성-계산가능성-통제가능성이 만들어낸 근대사회의 여러 가지 양상들이 탈근대로 명명되는 현대사회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단절ㆍ지속되고 있는지가 분석된다. 특히 마지막에 실린 두 편의 글이 주목할 만한데, 먼저 현민이 쓴 13강「소수자와 차이의 정치」는 그간 소수자의 개념적 정의ㆍ계급의 정치ㆍ인권과 시민권ㆍ다문화주의적인 차이의 인정ㆍ정치적 올바름(PC, political correct)ㆍ정체성의 정치 등의 논점들과 결부되어 <연구공간 수유+너머>가 주도하고 있는 “소수자 정치 혹은 차이의 정치” 담론을 향해 제기된 비판들에 대하여 조목조목 반론을 펴고 있는 점이 돋보인다. 그리고 정정훈의「전지구화, 혹은 제국과 다중」은 현재까지도 맑스주의 학계 내부에서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의 문제작『제국』(Empire, 2001)과『Multitude』(2004)의 내용을 기초로 하여 전지구화된 자본주의 및 전지구적 정치질서, 그리고 그에 저항하는 반란의 집합적 주체성을 새롭게 분석하고 있는데, 이 역시 최근 사회과학의 발전된 자본주의론을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이 책에서 아쉬운 점을 한 가지만 지적하자면, 14편에 달하는 글들이 한결같이 모더니티의 두 가지 측면 중 하나의 측면인 정치-경제적 및 사회적 모더니티에만 집중하여 모더니티를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데 최근 문화사회학 분야에서 제출된 모더니티 관련 연구들을 보면, 미학적-문학적 모더니티의 측면이 정치-경제적 및 사회적 모더니티와 구별되어 논의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미학적-문학적 모더니티는 정치-경제적, 사회적 모더니티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동시에 그것들과 끊임없이 긴장과 갈등, 그리고 투쟁 관계에 있다. 물론 이 두 가지 측면의 모더니티는 모두 모던 세계의 역사적 산물에 속한다. 이러한 사실은 근대 이후에 지속적으로 진행되어 온 사회적―문화적 분화 과정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멀리는 프리드리히 니체에서부터 가깝게는 게오르그 짐멜이나 발터 벤야민에 이르는 미학적-문학적 모더니티의 탁월한 이론가ㆍ비평가들의 작업이 이 책에서 보충되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어쩌면 이 책이 주로 사회이론 강의에 집중하고 있다 보니 모더니티에 대한 설명을 정치-경제적 및 사회적 모더니티에만 제한하고 있는 측면이 없지 않으나, 이는 아마도 이 책의 다음 시리즈로 기획되어 지난 4월에 출간된『문화-정치의 영토들』(현대문화론 강의)에서 보완되고 있으리라 기대해 본다.

 


 

* 합리성-계산가능성-통제가능성-진보의 신념 그리고 그 물적 실현인 근대화 과정의 규범적 지향을 내재적으로 비판하는 또 다른 흐름이 근대성의 영역에서 동시대적으로 생성되었던 바, 야우스, 버만, 래쉬, 푸코 등의 상이한 논자들이 공통적으로 포착하고자 했던 이 근대 내부의 대항근대성(counter-modernity)을 미학적-문학적 모더니티 혹은 예술적-문화적 모더니티로 개념화하는 경향이 최근 문화사회학계를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다. 문화적 모더니티는 19세기 중ㆍ후반으로부터 20세기 초반에 이르는 유럽의 지성사, 예술사, 문학사의 영역에서 다양하게 표출되었던 근대적 삶과 사유의 양식에 대한 비판적 사유와 감수성의 표현들로 구성된 일종의 담론 구성체이다. 그것이 담론 구성체인 한에서 문화적 모더니티는 다양한 저자, 개념, 수사(修辭), 전망, 전략, 감수성, 테마 등을 포괄하는 복합적 성좌(constellation)를 구성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다성적 담론 구성체를 관통하는 일관된 문제의식 중의 하나가 바로 시간과 역사에 대한 독특한 관점이라는 점에서, 김홍중은 그것을 '순간의 역사시학'이라 명명하고 그 대표적인 예로 발터 벤야민을 거론한다(김홍중, 2006). 수용미학의 창시자 야우스(Hans Robert Jauß)가 사용한 미적 모더니티(ästhetische Moderne)라는 개념은 영미문학이론에서 하나의 장르로 파악되는 ‘모더니즘’이라는 협소한 개념과는 달리, 루소, 독일낭만주의, 괴테, 보들레르, 프루스트, 아방가르드, 미래파, 입체파,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등 다양한 근대예술현상과 니체, 짐멜, 벤야민, 아도르노 등의 문화비판의 흐름을 포괄하는 근대의 독특한 미학적 선회를 특화시켜 지칭하는 용어이다(Jauß, 1970; Jauß, 1989). 야우스의 이러한 입론은 마샬 버만이나 스콧 래쉬처럼 다양한 문학작품들과 예술작품들을 폭넓게 소화하면서 모더니티의 개념을 미학의 영역을 중심으로 탄력적으로 사용하는 영미권의 논자들의 의견과도 은밀히 조응하고 있으며(Berman, 1982/1988; Berman, 1992; Lash, 1994), 모더니티를 기본적으로 시대 구분으로 파악하는 대신에 자기 시대에 대한 성찰적 거리 혹은 에토스로 설정하는 푸코의 논의와도 맥을 같이 한다(Foucault, 1984:1387). 근대성 내부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두 개의 상충하는 모더니티(Calinescu, 1977: 53)에 대한 천착은 모던/포스트모던의 이분법적 사유를 지양하면서 문화적 산물들에 대한 심층적인 논의를 펼치고 있는 최근의 인문, 사회과학적 흐름 속에서 폭넓게 수용되고 있다(Bohrer, 1994; Habermas, 1984: 26-35; 남진우: 2001). 김홍중은 이러한 논의들의 핵심을 이루는 모더니티의 ‘미적’ 차원을 ‘문화’의 차원으로 확장시켜 ‘문화적 모더니티’라는 개념을 사용한다(김홍중, 2006). 한편 박성환은, 짐멜의 ‘사회학적 미학’에 대한 논의를 통해서 ‘문화적 근대’라는 용어를 이미 사용한 바 있다(박성환, 1999). 또한 독일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 출신의 짐멜 연구자인 김덕영 역시 니체를 미학적-문학적 모더니티의 최초의 해석자로 규정하고 베버와 짐멜이 이러한 니체의 반(反)-사회학적인 모더니티 이론을 사회학적으로 전용하였음을 분석한다(김덕영,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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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코레아니쿠스 - 미학자 진중권의 한국인 낯설게 읽기
진중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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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에 각인된 습속을 통해 바라본 한국인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장담컨대, 적어도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 대학에 들어간 세대 가운데 인터넷에 글줄 꽤나 쓴다는 젊은이들치고 자신 있게 진중권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다 말할 수 있는 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1999년 3월 진중권이 계간지 <당대비평> 봄호에 기고한 장장 5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의 “지배의 언어, 탈주의 언어”라는 글이 있다. 진중권 본인의 대학원 시절 문제의식에 대한 언어철학적 자기해답서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글에서 NL(민족해방)진영의 인식은 ‘맹목적 추종’으로, 이진경 고길섶 등으로 대표되던 <문화과학> 진영의 소위 ‘탈근대-맑스주의’는 ‘맹목적 거부’라는 이름으로 거세게 질타 당한다. NL 진영의 언어를 전대협의『불패의 신화』라는 책을 통해 ‘해체-비평’하면서 NL이 ‘시대의 변화에 초연한 영원한 언어’를 쓴다며 맹공을 퍼붓는다. 과학적 논리가 아닌 눈물, 감동, 품성 등 봉건적 언어를 통해 ‘불패의 신화’를 만들고, ‘남한의 식민지성’ 등 비과학적 현상을 ‘증명’하고 있다는 것. PD 진영의 언어는 이진경의 글을 통해서 해체-비평 한다. 그에 따르면 이진경은 근대 비판의 형식으로 과거의 반성을 대충 얼버무리고 있으며 유토피아적 열망에서 디스토피아의 절망으로 이행함으로써 구체적ㆍ현실적 희망의 모색을 포기하고 있으며 가장 큰 문제는 아직도 프랑스산 원전을 숭배하는 낡은 ‘습속’에서 ‘탈주’하기를 거부하는 수행적 모순을 범하고 있다는 것. 진보진영에서는 그간 비판이 암묵적으로 금기시되던 전대협-한총련에 대한 신랄한 비판도 모자라 자신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한 이진경을 그토록 가혹하게 비판한 덕분에 그는 한때 좌파 사회에서 소외-고립되기도 하였다.

 

 물론 그 외에도 그가 벌인 싸움은 한 두 개가 아닌지라 일일이 다 열거하기도 힘들 지경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내 인식의 기초이고, 벤야민은 내 영감의 원천”이라고 자주 말하는 진중권은 그간 파시스트 박정희의 망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우리 사회의 정치적 국가주의와 경제적 자유지상주의와 문화적 보수주의에 대한 비판적 통찰력을 선보이는 다양한 스타일의 수많은 글들을 써왔다. 특히 지난 1∼2년간은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 진행자로 숱한 논란의 한가운데서 누구보다 많은 안티 세력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지난해 여름 진행하던 프로그램을 그만두면서 공적(정치적) 글쓰기를 잠시 중단하겠다고 밝힌 그가 최근 인문학자, 문화평론가로 돌아와 한국인을 조망한 책『호모 코레아니쿠스』를 펴냈다.

 

 “한국 사람들의 독특성을 추적한 책입니다. 정체성이나 국민성은 매우 이념적이고 주관적이기 때문에 ‘하비투스’(habitus)의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살펴봤습니다. 우리말로 ‘습속’이라 번역되는 하비투스는 특정 사회 성원들의 사고방식, 감정구조, 행동양식의 총합이라 할 수 있어요. 한국인을 다룬 기존의 책들이 자화자찬이나 비하가 많은데, 지금 우리에겐 무엇보다 냉정한 자기인식이 필요합니다.” (2007년 1월 19일 국민일보 인터뷰)

 

 진중권이 명명한 호모 코레아니쿠스(homo coreanicus)는 근대화 이후 급변하는 한국 사회에서 살아온 우리들의 자화상을 일컫는다. 서구에선 전근대와 근대, 그리고 탈근대 사이에 비교적 큰 시간차가 있지만 유례없이 압축ㆍ성장해온 한국에선 이 세 가지 시간대가 공존한다. 한국인의 몸 역시 세 가지 층위가 동시대에 존재한다는 것이 진중권의 지적이다.

 

 이에 따라 과시와 체면, 수직적 예법과 가부장적 생활을 여전히 받아들이면서도 인터넷 상에서 미디어의 주체가 되어 여론을 주도하는 기이한 현상이 연출된다는 것이다. 책은 한국의 근대화를 다룬 1부, 근대화 속에 내재된 전근대성을 해부하는 2부, 전근대성이라는 모순적인 토대를 바탕으로 생겨난 탈근대성을 분석하는 3부로 크게 나뉜다. 저자는 ‘박정희’ ‘국가대표’ ‘황우석’ ‘양반’ ‘명품’ ‘카리스마’ ‘된장녀’ ‘회사인’ ‘군대’ ‘놀이’ ‘짝퉁’ ‘디지털’ ‘문맹’ 등의 요소를 통해 한국인의 이미지를 냉정하게 그려낸다. 그는 이러한 한국사회의 분석을 통해 마지막으로 “너 자신을 디자인하라”라고 주문한다. 즉 압축된 한국의 급속한 근대화를 통해 미처 따라가지 못한 정신과 의식의 재배치 또는 디자인을 하라고 주문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러한 니체 식의 “너 자신을 발명하라”로 요약되는 존재미학적 삶의 방식은 이주노동자나 비정규직으로 표상되는 권력의 새로운 생체공학에 여지없이 포획될 수 있음을 인정한다. 진중권의 이러한 생각의 배후에는 미셸 푸코의 자기 통치의 개념이 존재한다. 푸코가 말년에 고민했던 것 즉 지배적인 관계에 의해 포섭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지배관계를 구성하지도 않는 일종의 생명윤리의 한 방식으로서 자기의 테크놀로지. 이 책을 읽으면서, 진중권과 더불어 그리고 푸코와 더불어 신체를 기계화하는 고통스러운 근대의 ‘군대화’적 습속을 해체하고 자신의 삶을 어떻게 미학적으로 디자인할 수 있을까를 함께 고민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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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경제론 - 새로운 발전모델을 찾아서
한반도사회경제연구회 지음 / 창비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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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적 신진보주의의 실현 가능성
 
대통령이 지난달 17일 청와대 브리핑에 기고한 “대한민국 진보, 달라져야 합니다”는 제목의 글이 진보진영 전반에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원래 인터넷 매체인 <레디앙>의 지면을 통해 진보학계 내부에서 시작된 2007년 대선 관련 논쟁에 대통령까지 가세하면서 진보학계와 제도 정치권을 넘나드는 사회적 이슈로 확산된 양상이다.  참여정부의 위기, 혹은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 진보의 위기 등으로 요약되는 일련의 정치상황에 대한 최장집, 조희연, 이병천, 손호철, 정태인, 우석훈 등 진보 진영 내부의 여러 학자들의 다양한 입장과 대안은 물론이고 대통령의 입장까지도 명확하게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이 논쟁은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수 있겠다. 세부적으로는 여러 가지 쟁점이 있겠지만, 다소 거칠게 본다면 이 논쟁에서의 핵심은 단연 87년 이후 노무현 정권 혹은 참여정부에 이르는 현재까지 한국 사회의 제도적 민주화를 견인한 진보개혁세력이 정치경제학적으로 실패했는가 아닌가로 모아지는 듯하다. 진보 진영 내부의 논쟁을 야기한 장본인이자 대통령도 자신의 글에서 거론하고 있는 “참여정부를 매도하는 데 앞장서고 있는 그 학자” 곧 고려대 최장집 교수는 ‘그렇다’를 강하게 주장하고 있고 노무현 대통령은 물론 ‘아니다’를 강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을 제외하고, 논쟁에 참여하고 있는 다른 학자들 역시 노무현 정권 및 진보개혁 세력의 집권이 실패했다는 점에서만은 입장이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러한 한국사회의 진보적 시스템으로의 이행 과정에 관한 공과와 앞으로의 향방을 둘러싼 논쟁의 와중에, 진보개혁 세력의 이념과 능력에 대한 비판을 긍정하는 동시에 그러한 비판에 보다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책임 있게 대응하고자 하는 연구자들의 결과물이 한 권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한반도경제론 - 새로운 발전모델을 찾아서」(창비, 2007년 1월)가 바로 그것인데, 이 책의 출간은 1997년 IMF 관리체제를 부른 동아시아 외환위기 뒤 개방화에 대한 대안연구를 위해 모인 ‘동아시아-한반도경제연구회’가 2005년 7월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회로부터 한국의 정치적, 경제적, 외교적, 사회(복지)적 현실에 부합하는 국가전략의 비전에 관한 연구를 요청받은 것에 계기를 두고 있다. 당시 ‘동아시아-한반도경제연구회’는 13명의 연구팀을 구성하여, 넉 달 간의 토론과 연구를 거쳐 그 결과를 2005년 말 정책기획위원회에 보고했다. 이후 이 연구모임은 ‘한반도사회경제연구회’로 확대ㆍ정비되었고, 2006년 상반기에 십여 차례의 토론모임과 심포지엄을 더 연 끝에 기존 연구자 10명에 새로운 연구자 9명이 보강되어 책을 출간했다. \

[* 이 책의 출간 과정과 관련한 더욱 상세한 정보는 한국사회과학연구소가 발행하는 계간 「동향과 전망」 제67호에 ‘새로운 진보주의의 건설을 위하여’이라는 제목의 특집으로 기획ㆍ게재된 글인 “‘신진보주의 발전모델'이란 무엇인가”(좌담회 녹취록)와 “신진보주의 발전모델과 민주적 발전국가의 모색”(조형제, 정건화, 이정협 공저 논문)을 참조하기 바람. 한편, 이 책의 기초가 된 정책기획위원회의 연구과제 수행에서부터 최종적으로 출간된 책의 집필까지 참여한 학자들 가운데는 한신대 정건화(경제학), 이인재(재활학), 이일영(중국지역학) 교수가 있음.]

저자들은 기존의 진보주의가 지닌 긍정적 요소를 계승하되, 새로운 가치체계를 제시함으로써 능동적으로 진보의 내용을 실현하는 ‘신진보주의 발전모델' 곧 ‘한반도경제론’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저자들이 주장하는 ‘한반도경제론’은 단순한 경제 체제가 아니라 정치ㆍ행정ㆍ외교ㆍ통일ㆍ경제ㆍ사회(복지)ㆍ문화 등을 총괄하는 종합적인 국가전략 모델을 의미한다. 이러한 다양한 국가 발전 전략을 아우르는 이념적 가치는 연대ㆍ개방ㆍ혁신이다. 저자들에 따르면, ‘연대’는 성장의 과실을 평등하게 나누는 것이고, ‘혁신’은 사회 변화의 동력이자 개혁의 추진력이다. 그러나 ‘혁신’은 불가피하게 경쟁을 수반하고, 경쟁은 불평등과 독점을 초래해 ‘연대’의 기반을 잠식할 수 있기 때문에 두 가치는 상충된다. 이 모순을 해소하기 위해 제시되는 것이 ‘개방’이라는 원리이다. 열린 자세로 타자와 협력하는 방법론적 원리가 개방의 원리라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원리 혹은 가치를 대외 협력의 차원으로 확대하기 위해 ‘한반도경제론’이라는 개념이 제시된 것이고, 이때 한반도는 남북한은 물론, 일본, 중국 등의 동아시아를 아우르는 복합적인 공동체를 함의한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제1부 국가발전모델이 책의 전체적인 입론이라면, 제2부 대외전략부터 제6부 지역발전까지 실린 총 18편의 글은 개별 분야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 점에서 각론이라 볼 수 있다. 전통적 좌파 진보주의의 관점에서 본다면 분명 이 책은 ‘新진보주의’의 입장을 강하게 담고 있다. “자본주의가 혁신해온 성과와 자유주의 이론이 추구해온 가치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라고 밝히는 대목(15쪽)이나 “국가는 방관자가 아니라 사려깊은 조정자로서 민주적 관여를 수행하면서 결사체를 통한 사회자본의 형성과 민주적 거버넌스의 창출에 기여해야 한다”라고 진술하는 대목(439쪽)에서 볼 때 확실히 이 책의 이념적 지향성은 한국판 ‘제3의 길’이라 할 만하다.

안타까운 것은 이 책의 저자들이 탁월하게 제시하고 있는 새로운 발전 모델을 실현해 나갈 정치적 주체가 한국 사회에서는 현재 부재한다는 사실. 애초에 이 책이 나오게 된 배경이 된 참여정부는 한미 FTA 추진 과정에서만 보더라도 이미 그 무능함과 시대 역행적인 ‘反-민중성’을 여실히 드러냈다. 학자들이 현실에 대한 정치한 분석과 진보적인 대안을 내놓아도 정작 이를 실행해나갈 정치적 주도권이 진보진영에게 없다면 과연 이 모든 구상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 책에서 제시된 신진보주의 발전 모델의 실현을 위해서 우리는 새로운 정치적 주체로서의 민중과 그러한 민중의 정치를 대변할 진보정당 내지는 진보적 사회운동의 정치적 세력화를 다시금 모색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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