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려, 그 사람
지강유철 지음 / 홍성사 / 200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한국 보수 기독교의 영원한 스캔들, 장기려"

 

   평전(評傳)은 단순히 비범한 한 인간의 일생을 다룬 ‘전기'(biography)가 아니라 그 인물에 대한 집필자의 일정한 평가와 해석이 담겨 있는 ‘비평적 전기’(critical biography)를 의미한다. 물론 그 어떤 전기이든 해당 인물에 대한 일정한 평가와 해석이 들어 있기 마련이지만, 일반적인 전기와는 달리 그 인물에 대한 뛰어난 업적과 더불어 한계와 인간적인 약점도 함께 드러내는 것이 올바른 의미의 평전이다.

 

  나아가 ‘평전’은 문제적 개인의 일대기를 사실적으로 재구성하면서도 거기에 평전 작가의 서사적 상상력이 상당부분 개입하는 이른바 ‘사실적 허구’의 양식이다. 이러한 두 가지 특성 때문에 평전은 평전 작가의 비평적 해석과 평가가 깊이 매개될 수밖에 없는 인물 비평 양식인 것이다. 좋은 평전을 통해 우리는 한 시대의 중요한 인물을 둘러싼 사상 ․ 철학 ․ 역사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고, 그 인물의 생각과 행동이 시대의 흐름을 따라 변동하는 양상에 대한 평전 작가의 날카로운 비평적 안목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다.

 

  올해 2월에 출간된 『장기려, 그 사람』(지강유철 著, 홍성사 刊行) 역시 불우한 시대를 자신만의 독특한 신념으로 맞서 나갔던 문제적 개인의 삶을 통해 우리 시대 종교와 윤리의 의미를 전체적으로 통찰하게 하는 종교적 평전 문학의 속성을 잘 보여주는 570여 쪽의 방대한 노작(勞作)이다. 보수 근본주의적 개신교를 신앙 배경으로 하는 칼럼니스트이자 인터뷰어인 지강유철이 성산기념사업회의 장기려 서거 10주기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기획한 평전 저술의 담당을 맡아 2년여의 자료 섭렵과 취재와 인터뷰를 통해 공들여 펴낸 책이다.

 

  성산 장기려 선생은 생존해 있을 때부터 이미 ‘한국의 슈바이쳐’, ‘살아있는 성자’, ‘작은 예수’로 칭송을 받았던 저명한 기독교 의료인이다. 비록 그 자신은 한국 기독교계에서 가장 근본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예수교 장로회 고신 교단에 소속되어 있었음에도, 재야 운동권 및 진보적 기독교계에서 확고한 위상을 차지하던 씨알 함석헌 같은 이들과 일생에 걸쳐 깊은 교류를 나눌 정도로 열려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데도 선생의 소속 교단이나 월남 인사로서 북한체제에 대한 비판적인 정치성향 때문에 그의 전체적인 삶에서 발견되는 다른 긍정적 측면들이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예컨대, 선생이 6 ․ 25 전쟁 이후 우직스럽게 무료 병원을 계속한 것이나 아미동에 있는 부산의대 병원 뒤편 창고에 아무렇게나 방치된 행려병자들을 식구처럼 돌보았던 것, 부산 간질 환자들의 모임인 ‘장미회’의 초대 회장이 되어 죽을 때까지 그들을 섬겼던 것, 정부가 의료보험을 시작하기 10년 전에 이미 가난한 환자들을 위한 의료보험조합을 설립했던 것, 그리고 정부가 영세 사업자를 위한 의료보험을 포기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23만 명의 회원을 둔 의료보험조합을 만들었던 것, 평생을 무소유와 무권력, 무명예로 일관하고자 했던 모습들을 거의 주목하지 않았다.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함석헌이나 안병무, 김재준, 문익환, 리영희, 강원용 등과 정치적 ․ 신학적 ․ 교파적 배경을 달리 했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삶까지도 전부 수구적이고 퇴행적인 근본주의적 기독교의 색채를 띠었을 것이라고 막연한 편견을 가져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통당하는 이들 속에서 함께 고통당하는 신(과 예수)의 모습을 보고, 그 수난에 자신도 동참함으로써 이웃과 신(과 예수)와 자신의 구원을 총체적으로 이루어가고자 했던 선생의 행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신앙적 ․ 윤리적 ․ 정치적 실천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더욱이 그가 ‘부산 모임’이나 ‘종들의 모임’ 같은 무교회주의적 성향의 급진적 소종파 신앙운동에 동참한 것에 대해서도 우리는 진지하게 재평가해야만 한다. 말년으로 갈수록 선생은 오늘날의 교회가 과연 예수나 바울이 추구했던 자유와 해방과 탈주의 공간으로서의 에클레시아 코뮌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을 본격화했다.

 

  그리고 마침내 신앙과 삶이 결합된 공동체들 가운데서 기존의 제도적 교회에서 벗어나 목사도 없이, 교리도 없이, 그리고 교단적 세력도 없이 침묵하고, 기다리며, 영성적으로 촉발되는 삶을 사는 이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하여 복음의 본질적인 측면보다는 비본질적인 의례나 직제, 교리, 문서, 예배당 따위를 위하여 헌신하게 하고 마치 그것들이 있어야만 고통으로부터의 구원이 가능한 것 인양 신도들을 호도하고 있는 교회 지배자들과 그는 더 이상 타협할 수 없게 된다. 선생에게 그러한 문제의식은 자기 실존, 즉 자신의 삶을 살아가면서 적당히 타협하며 궁극적인 질문을 자신의 불성실로 상쇄시키고 약화시키는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달리, 스스로 진실하고 성실하게 그러한 진리 앞에 자신을 먼저 복종시켰다는 점에서 실로 독특한 것이었다.

 

  오랜 교회생활도, 장로의 직책도, 교우들과 지인들의 신뢰와 선망도 그러한 진리에 대한 그의 열정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되지 못했다는 데서 우리는 교파와 신학과 교리마저도 복음의 정신 앞에서 철저히 상대화시킬 수 있었던 그의 자유로움을 엿볼 수 있다. 선생의 삶은 소위 이념적으로 또는 관념적으로만 진보적인 우리들의 삶을 부끄럽게 한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 예수가 자신의 대중들과 당했던 고난의 길을 오늘 여기서 이어간다는 것, 바로 그것을 장기려 선생은 하나의 가능한 실제 사례로서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의 역할을 충실히 하며 우리 사회에서 고통과 소외가 재생산되는 데 솔선수범하고 있는 한국 교회 앞에 그네들이 자랑하는 정통주의 기독교인 장기려의 ‘이단적’ 삶은 영원한 ‘스캔들’로 남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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