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야의 유령
밀로스 포먼.장 클로드 카리에르 지음, 이재룡 옮김 / 현대문학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이성의 잠은 유령을 낳는다”
  
 

한 화가가 있었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희망과 유명해지고 싶다는 욕망을 모두 충족시키는 삶을 살고자 했던 화가는 돈의 중요성을 결코 과소평가하지 않으면서도 서민으로서 권력에 저항하는 이중적 삶을 영위했다. 그의 성격은 다소 수줍은 편이었으나 혼란과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만큼 늘 타협하는 자세를 취했다. 재능이 있는 촌뜨기에 불과했던 화가는 프레스코, 테피스트리 밑그림, 초상화, 인물화, 판화로 스페인의 수석 궁정화가로 출세한다. 그의 작품세계는 현실과 환상의 갈림길에서 보여주는 인간에 대한 진실한 표현으로 불린다. 초상화, 종교화를 막론하고 현실을 그 근원까지 직시하면서 무의식적 상황 하에서 인간성의 번뇌 내지는 육체의 불건전한 상태를 풍자적이고 혁신적으로 그려 리얼리즘을 준비한 이 화가의 이름은 바로 프렌시스코 고야(Francisco de Goya, 1746~1828)이다.


고야는 ‘이성’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았던 점에서 계몽주의 사고를 가졌던 18세기 화가에 속했지만, 앙드레 말로가 지적했듯이, “근대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젖혔던” 위대한 예술가로 평가받아 왔다. 또한 그의 작품이 스페인의 독특한 니힐리즘에 깊이 뿌리박고 있으며, 그 당시 절망적인 사회상을 직접 체험했고 이를 풍자하고 있어 인생과 인간 자체에 대한 성찰을 할 수 있게 도와준다는 사실로 인해 그의 그림과 일생은 소설이나 영화의 좋은 소재가 충분히 될 만하다. 그런 기대가 비로소 실현 되어 현대의 독자 혹은 관객과의 만남을 시작하였다. 영화 ‘아마데우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등으로 널리 알려진 체코 출신의 거장 밀로스 포만 감독과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등 세계적 작가들의 원작을 영상으로 옮겨 금세기 최고의 시나리오 작가로 손꼽히는 장 클로드 카리에르가 영화를 만들기 위해 미리 직접 함께 집필한 소설 『고야의 유령Goya’s ghosts』이 작년 12월에 번역 출간되었다. (영화 ‘고야의 유령’ 역시 올해 상반기 중으로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다고 한다.)

소설은 중세의 끝자락에서 저물어갔던 스페인 제국의 한 가운데서 반역과 혁명의 시대를 민중들과 함께 맞이했던 위대한 화가의 시선을 통해 두 남녀의 비극적 운명을 다루고 있다. 명석한 두뇌와 재주로 권력과 출세의 욕망에 사로잡힌 남자 로렌조 신부, 또 그 남자에게 순정을 빼앗긴 여자 이네스, 이들의 운명적인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비극적인 재회가 혼란스러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펼쳐진다. 또한 작가들은 어둡고 혼탁했던 고야의 그림에서처럼 단지 겉으로 드러난 역사의 현장 이외에도 핏빛으로 얼룩진 소시민들의 삶까지 조심스럽게 조명하며 역사의 이면에 숨겨진 인간 삶의 진실을 보여주고 있다. 소설의 갈등 구조는 이네스가 누명을 쓰고 종교 재판소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면서 비등점을 향해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로렌조는 감옥에 갇힌 이네스를 사랑하게 된다. 이네스의 아버지는 딸을 구하기 위해 성당 재건 비용을 부담키로 하는 등 백방으로 노력한다. 그는 로렌조를 심문해 종교재판소를 모독하는 허위문서를 강제로 받아낸다. 결국 로렌조는 해외로 추방되고, 세월은 훌쩍 20여 년을 뛰어넘는다. 로렌조는 프랑스 나폴레옹 정권의 핵심 간부가 되어 스페인에 돌아온다. 그는 종교가 아닌 이성과 혁명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야망을 품는다. 한편 이네스는 감옥에서 로렌조의 딸을 낳아서 수녀원에 보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로렌조는 딸을 찾아다니지만, 수녀원을 뛰쳐나간 딸은 우여곡절 끝에 거리의 여자가 되고 만다. 로렌조는 딸의 존재가 자신의 야망 실현에 걸림돌이 될 것을 우려해 마드리드의 모든 창녀들을 해외로 보내는 정책을 추진하는데… 화가 고야는 나이가 들어 귀가 들리지 않는 상태가 되지만, 엎치락 뒤치락하는 운명의 엇갈림 속에서 이네스와 그녀의 딸을 도우려는 수호천사가 된다.
 

고야의 작품 인생에 가공의 두 남녀의 사랑과 이별 이야기를 잘 연결시킨 이 소설은 그 자체로서 마치 당대의 역사적 사건을 주제로 한 고야의 수많은 그림들 중 하나가 실제로 그랬을 법하다는 상상을 갖게 한다. 고야의 그림을 제대로 이해하고 감상하기 위해서는 우선 고야가 살던 당대의 혼란과 중요한 사건들뿐만 아니라 근 일세기에 달하는 스페인 및 유럽 역사에 관한 긴 안목이 함께 요구된다는 점에서 이 소설 역시 주인공들의 운명에 어느 정도 공감하기 위해서는 작품의 배경이 되는 스페인의 역사적 문맥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작품의 제목 ‘고야의 유령’에서 ‘유령’은 궁정화가로서 누구보다도 상류층의 삶을 동경했던 고야로 하여금 끝내는 인간의 탈을 쓴 괴물들이나 나폴레옹 전쟁의 참상, 종교재판과 전체주의에 대한 조소와 분노, 민중의 빈곤 등을 본능적으로 그리게 한 ‘기억들’, 즉 상기되는 것을 거부하고 억압된 무의식을 가장하여 화가에게 돌아오려고 몸부림친 기억들을 의미함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시간의 안개로부터 엄습해오는 유령과 괴물들. 그것은 묻히고 감추어졌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돌아오는 어떤 것이다. 회상을 거부하게 만드는 기억이 바로 고야의 그림 속에 존재하는 유령이다. 철학자 리처드 커니가 트라우마적인 기억 혹은 “불가능한” 기억이라고 부른 그것이 결국은 고야의 그림들을 존재하게 했다는 사실을 소설은 영화적인 묘사로 가득한 서사 전개의 기법을 통해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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