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계급사회 우리시대의 논리 11
손낙구 지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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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 국민이 다함께 읽고 한 자리 모여 세미나를 해야 할 책!”
―손낙구, 『부동산 계급사회』(후마니타스, 2008년 8월)

 때로는 장황하게 서평을 쓰는 것마저 민망하게 느껴지는 책이 있다. 그저 “일단 읽어 봐라”, “반드시 읽어라”, “읽고 나서 얘기해보자”, 뭐 이런 말밖에 할 수 없는 책이 가끔 있는 법이다.

 작년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는 우석훈과 박권일의 『88만원 세대』가 단연 그런 책이었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책이 제기한 ‘청년실업’ 혹은 ‘청년백수’는 단 순히 20대 청년들만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10대들을 입시라는 족쇄를 채워 인질로 잡아놓고 20대부터 50대까지 세대 간 경쟁을 벌이고 있는 ‘베틀 로얄’의 무한경쟁사회”이자, 그러한 “세대 간 경쟁의 구조에서 상대적으로 사회적 자본이 취약한 20대를 윗세대(특히 386세대)가 악랄하게 착취하고 있는 사회”이며, “민주화라는 이데올로기의 이름하에 더욱 강화된 신자유주의, 독과점의 강화로 특징지어지는 승자독식사회”가 되어버린 대한민국의 전체적 모순 구조가 20대들에게 이르러 특수화된 사례가 바로 ‘88만원 세대’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 책은 결국 세대를 막론한 한국 사회 전체 구성원들을 향해 긴급히 토론을 요구하는 책이었고, 그 자체로 하나의 ‘아젠다(agender)’가 될 수밖에 없었다.

 올해 그 역할을 할 책이 바로 손낙구(http://blog.daum.net/bomnal3)의 『부동산 계급사회』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어떤 의미에서는 『88만원 세대』보다 더 보편적이고 그만큼 오래된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 그 핵심부를 정면으로 건드리고 있는 책이다. 다행히 책의 내용이나 구성은 그리 어렵지도 복잡하지도 않다. 정말로 고등학생 수준의 독해 능력만 되어도 무난히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그러나 쉽다고 그 가치를 폄하할 수는 없다. 이 책이 갖는 여러 가지 측면의 중요한 담론적 가치와 별개로, 지금까지 나온 많은 양의 부동산 관련 책들과 대조하여 특징적으로 구별되는 점을 두 가지만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는 이 책이 부동산 투기의 문제를 경제사회학적 차원에서 분석적으로 접근하고 그 실상을 정치사회학적 차원에서 비판적으로 조명하고 있는 점이다. 그러니까 부동산 재테크의 비법 따위나 알려주겠다고 선전하는 수다한 책들과는 이데올로기적으로 다른 포지션을 취하고 있다는 말이다.
 두 번째로 이 책은 그 모든 이야기를 철저하게 통계로 뒷받침하려는 시도를 성공적으로 완수해냈다. 부동산과 관련한 좌파적 혹은 공동체주의적 관점에서의 비판적 담론이야 계속 있어 왔지만 정작 부동산 문제가 ‘언제부터’ ․ ‘어떻게’ ․ ‘왜’ ․ ‘누구에 의해’ 이 지경이 되었나 하는 문제의 실체는 보다 정교하게 해명되지 못하고 원론적인 차원에서의 도덕적 비판으로만 그치고 말았던 것이 사실이다. 저자는 그와 같은 기존 담론의 한계를 실증적인 자료와 통계를 무기삼아 한결 진일보된 방법론으로 돌파하고 있다.

 저자가 제기하는 한국사회 부동산 문제는 너무 빨리 오른다→서민들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싸다→부동산 보유 여부 및 부동산가격 인상 여부에 따라 소득 및 재산 격차가 순식간에 심화된다→부동산 가격 상승으로 인해 발생하는 불로소득을 사유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정도로 요약이 가능할 듯싶다. 더 간단히 말하자면 부동산은 당대 한국 사회에서 계급적대 혹은 빈부격차의 주범이라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 한국 사회의 계급적 불평등을 초래하는 근본적 모순이 부동산에 있는 것이다. 부동산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재산 가치이다. 당연히 이 부동산 소득 격차가 곧 계급 격차로 이어지고 있으며, 한번 부동산을 보유한 사람은 부동산 가격이 올라가게 됨에 계속 부자가 되고, 부동산을 소유하지 못한 이들은 영원히 가난한 신세를 못 벗어난다. 부동산 소득 수준이 곧 계급이기 때문이다. 부동산 격차가 교육, 문화적 향유 수준의 차이를 넘어 건강 및 평균수명의 차이로까지 연결되고 있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라는 사실 앞에서 독자들은 절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세계 그 어느 나라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내 땅 내 집 내 맘대로 한다’는 논리는 장구한 인류 역사에서는 물론이고 자본주의사회 안에서도 ‘돌연변이’에 가까울 정도로 극단적으로 비뚤어진 부동산관이라고. 이토록 천박하고 무례한 자본주의적 투기꾼의 궤변이라고나 할 억지 논리는 이것을 뒷받침하는 법과 제도의 극단적인 사유재산 제일주의, 정부의 주택정책, 부동산 학자와 언론의 이데올로기와 결합해 수 십 년 동안 투기와 불로소득의 사유화를 비호하는 신념체계로 우리 사회 깊숙히 무의식처럼 자리 잡았다. 그리고 오늘도 부동산 계급 카르텔은 끊임없이 부동산 신화를 불러들여 불로소득을 얻기 위한 새로운 음모를 꾸미고 있다.

 그런데 어떡하랴? 부동산 재산만 382억원(그 중 빌딩 재산이 무려 330억에 달하는)을 가졌다고 신고하신 분 그러니까 부동산 공직자 종합 1위를 차지하신 그 분이 우리나라의 대통령이며, 집권여당의 의원들은 물론이고 청와대 비서진과 행정부 고위 공직자들 대다수가 부동산 투기로 그간의 부를 축적한 이들인데, 과연 부동산 문제가 잘 해결될 수 있을까 모르겠다. 2008년 초 현 정권의 첫 환경부 장관에 내정됐다가 땅 투기 의혹으로 사퇴한 박 모 교수는 “자연의 일부인 땅을 사랑했을 뿐 투기와는 상관없다”며 항변했다가 엄청난 비난에 시달렸는데, 그녀는 아직도 자신의 생각이 왜 잘못되었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을지 모른다. 농사도 안 지으면서 농지를 사랑해서 땅을 사는 게 바로 투기라는 아주 상식적인 진리를 말이다.

 이 책을 읽지 않고 현 시기 한국 사회의 위기와 고통에 관해 논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하는 의문마저 들 지경이다. 문득 올 한해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쇠고기수입 반대 촛불문화제를 두고 ‘국민 MT’라고 한 어느 역사학자의 말이 떠오른다. 그에 빗대어 나는 이 책이 ‘국민MT’에 가져가 다함께 밤새워 읽고 ‘세미나’라도 해야 할 그런 책이라 말하고 싶어진다. 세미나 같이 한 번 해보고 싶으니 독자 여러분들도 꼭 좀 읽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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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의 문화에서 현실의 정치로 - 민주화 20년 민주주의는 누구의 이름인가 당비의생각 1
당대비평 기획위원회 엮음 / 산책자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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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의 정치에서 다시 현실의 문화로”

―『광장의 문화에서 현실의 정치로』, 당대비평 기획위원회 엮음, 산책자(2008년 6월)
 

   

당대비평이라는 잡지가 있었다. 흔히 당비라고 불렀던 이 잡지는 한국의 비판담론의 공간에서 꽤나 특이한 위치를 차지했다. 일단 우파적 성향의 잡지는 결코 아니었다. 한국 사회의 숨겨진 야만과 모순을 읽어내는 시각이 너무나 불온했고 급진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좌파라고 할 수도 없었던 것이 이들의 비평 대상에 바로 좌파 또는 진보진영이 단골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랬는지 몰라도 이 잡지는 여타의 다른 진보적 인문사회과학 비평지가 다루지 못했던 신선한 기획들을 많이 선보였다. 일상적 파시즘, 대중독재, 기억의 정치학, 우리 안의 이분법, 세대 갈등, 한국 사회의 고통과 차별의 구조, 민주화체제의 이면, 한국 사회의 소수자들, 테러의 정치학 등등.

 

촛불집회가 한창이던 6월 말 당대비평 기획위원회의 이름으로 책이 새로 하나 나왔다. 책의 제목만 봐도 다분히 촛불집회를 의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광장의 문화에서 현실의 정치로”라는 제목에 “민주화 20년, 민주주의는 누구의 이름인가”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서동진이 서문에서 말하고 있듯이, 민주화 체제가 마감되고 난 지금 그 체제가 생각하고 있었던 민주주의에 대한 정치적 상상력을 다양한 각도에서 되돌아보는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민주주의를 사고하기 위해 다루지 않을 수 없는 쟁점들을 1부에서 검토한다. 예컨대 경제주의에 함몰된 기업형 사회의 등장(홍기빈, 「CEO 대통령, 주식회사 코리아」), 그 누구에게도 견제 받지 않은 채 사익에 따라 움직이는 사회 귀족들의 득세(홍세화, 「사회 귀족 체제와 촛불 광장」), 촛불시위로 상징되는 혹은 대표되는 새로운 여론형성 문화의 기저에 자리 잡은 ‘네티즌’들(이상길, 「인민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기러기 가족과 이주자 가족 혹은 동성 생활공동체, 반려동물 가족 등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야 할 가족 형태의 등장(임옥희, 「욕망의 민주화는 가족을 어떻게 변화시켰나」) 등을 차례로 살피고 있다. 이와 같은 변화는 민주화로 대변되는 한국 사회의 체제의 변화를 근본적으로 다시 들여다보는 실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부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새로이 등장한 권력들에 대한 탐색과 함께 정치적 힘들이 작동하는 장소들에 대한 세밀한 관찰들도 돋보인다. 모든 것을 법으로 해결하는, 그리하여 오히려 정치의 공간이 소멸되는 상황들(서동진, 「소송하는 사회, 불평하는 주체」), 국가가 보장해야 할 국민의 안전이 보험으로, 즉 개개인의 책임으로 환원되는 현실들(이택광, 「자본주의라는 공포물에서 살아남기」), 제도권의 순치로 실천적 교양의 자리를 잃어버린 지식인의 초상들(김원, 「대학 속의 지식인,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 빈곤의 위협에 처한 이들에게 책임을 환원시키는 능동적 복지의 허상들(최예륜, 「생산적 복지에서 능동적 복지로」)을 차례로 접하면서 우리는 이 시대 빈곤한 정치적 삶의 형식들을 성찰할 수 있게 된다. 즉 이러한 민주화 이면에 존재하는 삶의 형식을 통해 빚어지는 사회적 주체라고 하는 것들이 능동적인 시민이든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들이 역설하는 ‘21세기의 성공적인 인재’이든 결국엔 ‘신자유주의적 발전’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피지배자의 형상에 불과할지 모른다는 섬뜩한 진실을 깨닫게 되는 것.

 

닫는 글로 실린 김진호의 글이 특히 압권인데, 지금 광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시민들의 저 축제가 어쩌면 사회적 배제 담론으로 표상되는 빈곤계층에 대한 사회적 학살을 은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도발적인 문제제기를 던지고 있기 때문. 시민사회의 주변부를 배회하고 있는, 오로지 외국의 학계에서 빌려온 언어를 통해서만 부분적으로 묘사되고 있을 뿐인, 그래서 존재하고 있으나 전혀 만날 수 없고, 우리 주변에 엄연히 살아 있으나 단 한 번도 그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는 이들에 관한 이야기로 과연 사회란 무엇이고 또 정치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

 

덧붙여 한 가지 생각해볼만한 것이 있다. 이 책을 만든 이들은 아마도 “광장의 문화”가 “현실의 정치”와 대립되는 그 무엇으로 상정했던 것 같은데, 하지만 촛불집회는 문화적 축제의 수준을 넘어 그 자리에서 새로운 정치적 주체를 탄생시키고 이를 통해 정치에 대한 새로운 개념까지 만들어내지 않았던가? 따라서 광장의 문화가 있고, 현실의 정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부터 이제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나아가 광장이 정치가 되었고, 오히려 현실이 문화가 되어버린 세계 앞에서 우리는 질문의 방식을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광장의 정치 즉 현실에 존재하지 못하던 정치를 창출한 그 축제의 공간이 현실의 문화의 한 단면은 아닌가 하는 질문 말이다.

 

이제는 거의 다 꺼져버린 촛불을 계속 이어나가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촛불집회가 우리에게 보여준 정치적 삶의 형식과 그것을 실행할 정치적 주체들의 형상을 발굴해나가는 작업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작업의 첫 번째 밑거름이 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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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섭이 가라사대
손홍규 지음 / 창비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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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홍규, ‘소설적 진실’의 용기

―손홍규 소설집, 『봉섭이 가라사대』(창비, 2008년 4월)











문학이론가로 자신의 이력을 시작한 르네 지라르(Rene Girard)는 첫 저서인『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1961)에서 소설 속 등장인물의 대상을 향한 욕망이 타자(혹은 대상) 자체가 아닌 타자와 주체 사이에 존재하는 제3의 중개자를 통해 갖게 된 ‘모방적’ 성질의 것임을 인정하는 태도를 ‘소설적 진실’로, 반면에 욕망이 중개자에 대한 모방적이 아닌 자발적이라고 믿는 태도를 ‘낭만적 거짓’으로 명명했다. 이후의 지라르는 문학에서 인류학으로 그 관심을 이동해갔고 사실 소설보다는 성서, 신화, 고대 비극, 인류학적 기록지 등을 통해 의식들의 심리적 투쟁인 모방욕망이 문명 형성의 원리가 되는 희생양 메커니즘으로 발전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사회적·집단적 폭력이 동반되는 것을 발견한다.



적어도 문화인류학자 혹은 신학자로 변모한 후기 지라르의 사유까지 염두에 둔다면, 초기에 그가 문학이론가로서 말한 ‘소설적 진실’의 궁극적 함의는 “주체의 모든 욕망이 대상 그 자체가 아닌 중간의 매개자를 모방하는 데서 비롯된 것임을 현시하”는 것을 넘어선 보다 복합적인 층위에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소설적 진실과 낭만적 거짓의 대립구도가 후에는 성서적 진실과 신화적 거짓의 대립구도로 대체되는 데서 확인되듯이, 사회적·집단적 폭력을 야기한 잠재적 원천으로서의 모방욕망과 그러한 모방욕망에서 기인한 폭력의 현실태로서 희생양 제의 즉 사회적 배제와 차별의 메커니즘이야말로 그가 말한 인간사의 문화적 진실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일찍이 문학비평가이자 불문학자인 김현은 지라르의 이론에 관해 ‘모방욕망’과 ‘희생양’이라는 두 키워드를 묶어 그 핵심을 ‘폭력의 구조’라고 말한 바 있다(『폭력의 구조』, 김현 문학전집 제10권).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항상 ‘소설적 진실’로서 폭력의 구조에 대해 궁금했지만 감히 지라르에게 묻지 못했던 것들을 대신 답해주는 소설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지난 4월에 출간된 손홍규의 두 번째 단편집 『봉섭이 가라사대』에 실린 10편의 소설들을 일컬음이다.



소설가 손홍규는 누구인가? 자주 인용되는 프로필대로라면 그는 이런 소설가이다. “2001년에 등단해 소설집 『사람의 신화』와 장편 『귀신의 시대』를 출간하여, 공동체적인 삶이 파괴된 채 약육강식의 원칙만이 존재하는 폭력적 현실에 적응하지 못했으나 내면 깊이 변혁 의지를 품은 인간 군상을 희화화하고 풍자적으로 그려낸 작품들을 발표해온 75년생의 젊은 소설가” 그런데 그와 동년배 어느 비평가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는 우리 세대가 아닌 것만 같습니다.”(신형철, 「비인(非人)의 인간학, 신생(新生)의 윤리학」) 또 다른 어느 젊은 비평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손홍규 소설을 잘 읽기 위해서는, 생물학적 젊음과 문학의 젊음(새로움)을 거의 등치시키는 관습적 사고, 그리고 과거 리얼리즘 미학의 계보로 환원시키고 싶어지는 정치적 무의식과도 거리를 두어야 한다.”(김미정, 「비루함과 존엄 사이, 도약하는 반인간·비인간」). 궁금하지 않은가? 도대체 어떤 소설이기에....



이 소설집에는 2005년부터 2년 남짓한 기간 동안 발표한 단편 10편이 실려 있다. 한 편 한 편이 그야말로 주옥같다. 길어봐야 40 페이지, 짧게는 30 페이지 내외의 소설들로만 엮었음에도 한 편씩 읽고 나면 어지간한 장편소설은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묵직한 현실감과 삶에 대한 성찰의 중압감을 경험하게 된다. 마음 같아서야 열 편 모두를 상세히 소개하고 싶지만, 지면 제약 상 그럴 수는 없고, 필자가 보기에 이 소설집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주고 있다고 판단되는「이무기 사냥꾼」을 중심으로 손홍규의 소설이 드러내는 ‘소설적 진실’의 의미를 간략히 짚어보고자 한다.



「이무기 사냥꾼」에는 사면발이와 동거하며 일용잡부직을 전전하는 용태와, 밀입국자이면서 불법체류자인 알리가 등장한다. 알리는 파키스탄에 있을 때 죽은 척하면서 목숨을 부지했던 경험이 있다. 알리가 ‘죽은 시늉’을 통해 캐나다 입국심사장 사람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고, 아파트 건설현장의 두둑한 일당을 챙기는 것을 목격한 용태는, 급기야 그 재주를 이용해서 함께 사업을 벌일 생각을 하게 된다. 이주노동자를 배제하는 악랄한 사회적 법망의 틈새를 이용하여 불법으로 돈을 버는 일을 해가던 두 사람은 끝내 서로를 배신하는 파국으로 치닫고 만다. 한편, 용태의 독백을 통해 알려지는 용태의 부모의 삶과 그 내력은 그야말로 우리 시대 민중의 사회적 전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을 사람들은 용태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오누이라 생각했고, 따라서 그들을 ‘상피붙은 자식’이라는 딱지를 붙여 마을로부터 완전히 배제시킨다.



그러나 기실 그것만이 배제와 폭력의 근거는 아니었다. 근친상간의 혐의는 표면적인 것이고, 오히려 마을 사람들의 증오심의 심층에는 용태의 부모들이 빨치산과 그 빨치산의 자식을 보호한 이들의 후손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 레드컴플렉스가 도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적대감은 다시 이들이 가진 땅을 선망하는 공동체의 탐욕과 결합되어 매우 합리적인 그러나 잔혹한 폭력으로 자행된다. 이데올로기 대립의 역사와 집단적 레드컴플렉스(그리고 이면의 물질적 탐욕)는 ‘상피붙은 자식’이라는 ‘다른 사람’ 즉 이방인을 만들어내고, 그들을 공동체 밖으로 추방하는 동력으로 기능한다. 용태의 부모는 공동체의 위기와 붕괴를 막고 이들의 결속감을 확인시켜주기 위해 필요한 희생양인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용태의 아버지는 죽은 것처럼 꼼짝하지 않음으로써 마을 사람들의 폭력을 견뎌내고, 어머니는 흙집에 시체처럼 누워 말없이 눈물만 흘린다. 이것이 이들이 택한 그들만의 생존법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용태 부모의 이야기와 알리의 이야기는 용태를 중심으로 매개된다. 그렇다면 “힘없고 나약한 것들은 일쑤 이처럼 죽은 체하게 마련”(73쪽)이라지만, 살아남기 위해 그저 “개새끼맨키로 납작 엎져서”(84쪽) 삶을 견뎌낼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과연 인간다운 삶이란 가능할 것인가? 이런 이들이 자발적으로 인간이 아닌 ‘동물-되기’나 윤리정치학적 ‘탈주선’을 그리고 있다는 식의 긍정적 전망을 내놓는 것은 사회적 배제보다 더한 담론적 폭력을 가하는 것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손홍규의 인물들이 택한 반인간 혹은 비인간으로서의 동물 되기는 사회적 폭력에 의해 강제된 조건 속에서 주체들이 선택한 불가피한 결과물이다. 따라서 손홍규의 소설을 통해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러저러한 유형의 비정상적이고 비일반적인 ‘사람’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공동체 밖의 공간 즉 “개인 외부에 있고, 강제적 힘을 부여하며, 그렇기 때문에 개인을 통제하는 행위양식, 사고양식, 감정양식의 총체”로서 발명된 우리의 ‘사회’ 그 자체라는 것이다. 나아가 바로 이러한 ‘사회’가 작동시키는 은밀한 합리적 폭력의 기원과 메커니즘을 탐사하고 있는 것이 그의 소설이다.



손홍규의 소설집 『봉섭이 가라사대』에 실린 대부분의 소설들은 모든 공동체들의 바깥이라고 할 수 있는, 즉 공동체들의 사이의 공간에서 살아 있으되 죽은 존재와 다름없는 이른바 ‘산주검’(un-dead)으로 남겨져 있는 이들을 증언하고, 그들을 그렇게 배제하고 침묵케 하는 사회적 폭력의 메커니즘을 추적하여 폭로하는 ‘소설적 진실’을 성취하고 있다. 이렇게까지 쓸 수밖에 없었는가, 라는 물음이 들 수밖에 없는 그의 소설들, 부조리에 온몸으로 부딪히며 전복과 위반을 도모하는 ‘반(反)영웅’도 되지 못한, 결코 될 수 없는 그런 존재들이 그의 소설 주인공들이다. 어느 비평가의 지적대로 비유컨대 이것은 ‘카니발’은 커녕 차라리 ‘비참극(悲慘劇)’에 가까운 뉴-웨이브 리얼리즘 소설이라 해야 할 것이다(김영찬, 「비루한 동물극장」, 『비평극장의 유령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것이 우리네 삶의 엄혹한 진실인 것을. 폭력의 구조를 은폐하고 현실을 기만하는 이데올로기적 수사로 가득찬 요즘 소설들의 ‘낭만적 거짓’의 길을 거부하고, 비루한 존재들의 빈곤과 절망, 가학―피학, 침묵과 망각, 배제와 차별의 망상으로 버무려진 비참극 속에서 숨길 수 없는 우리 사회의 실재를 대면하는 ‘소설적 진실’을 선택한 작가의 용기에 박수를! 테리 이글턴이 말했듯이, 비극이라고 하는 장르는 운명의 관철을 통해서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우리 속에 있으면서 동시에 우리 밖에 존재하는, 존재의 엄엄한 힘을 보여주는 가장 탁월한 문학적 재현양식이다.



비극적 장르의 시각에서 무언가 비틀린 상태를 성찰한다는 것은 성찰을 통해 그 비틀림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이지만, 그 비틀림의 힘은 성찰의 과정을 비틀리게도 할 만큼 심층적인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소설적 진실과 마주하는 소설가의 그런 비틀린 태도에는 역설적으로 성찰적인 측면과 정직의 측면이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우리 사회의 비틀린 상태를 정직하게 성찰하는 소설적 진실을 향한 비극적 사유의 용기일지 모른다. 그러므로 진실과 마주할 용기 있는 자만이 이 소설집을 끝까지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자, 준비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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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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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주제 사라마구, 『눈 먼 자들의 도시』(Ensaio sobre a Cegueira)를 읽고

 





 


1. 모두 눈이 멀다

 

신호등에 빨간 불이 켜진다. 달리던 차들이 일제히 멈춘다. 잠시 후 파란 불이 켜지고 다시 차들이 내달리기 시작한다. 그런데 중간 차선의 선두에 있던 차 한 대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뒤쪽에 늘어선 차들은 미친 듯 경적을 울려대고, 급기야 일부 운전자는 차에서 내려 멈춰 선 차의 창문을 거세게 두드려댄다. 안에 있던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든다. 그리고 한 마디, 아니 정확히 세 마디를 내뱉는다. “눈이 안 보여!”

 

어느 날 아무 이유 없이 갑작스럽게 눈이 멀어버린 최초의 그 남자로부터 그와 접촉한 사람들이 하나 둘 씩 실명에 빠지기 시작한다.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보이는 소위 “백색실명의 공포”가 도시 전체를 뒤덮고 있다. 그렇게 눈먼 사람들을 강제로 수용소에 격리시키기 만 할 뿐 아무런 해결책도 내놓지 못하는 무능한 정부집단, 눈먼 이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하는 폭력적인 군인들, 눈먼 사람들 각자가 보여주는 극단적인 동물성의 행태들, 무기를 소유함으로써 수용소 안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범죄 집단, 도시에 넘쳐나는 약탈과 쓰레기들, 아내가 보고 있음에도 본능에 따라 다른 여자와 몸을 섞고 마는 의사 등 자본주의 현대문명의 이면에 존재하던 야만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면서 “눈 먼 자들의 도시”는 말 그대로 지옥이 되어 버린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단 한 사람, 안과 의사의 아내만이 눈이 멀지 않는다. 이 세상 모두가 눈이 멀었는데 단 한 사람만이 볼 수 있다. 만일, 신이 있다면 그녀의 눈만 멀지 않은 것이 과연 신의 축복일까 아니면 저주일까? 그녀는 아직 볼 수 있어 운이 좋은 사람인가 아니면 보지 말았어야 할 것을 보게 되어 가장 불행한 사람인가? 답은 본다는 것과 보지 않는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이냐를 해명하는 데서 찾아질 것이다.

 

 


2. ‘보는 것’이란 무엇인가?

 

이 소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질문 꺼리로 던져준다. 소설 속에서 전개되는 사건들을 통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상황이 어느 지역, 어느 국가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세상에 보편적으로 해당된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 작품에서 등장인물들의 이름이나 장소 등의 명칭을 보통명사로 제시하지 않고 있는 것도 그러한 구체적 개별성의 흔적을 철저히 지우고, 소설이 제기하는 문제를 보편적인 층위에서 자리매김하려는 작가의 의도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 인간들이 모두 ‘눈이 멀었다’는 사실 그 자체일 뿐이다. 도대체 인간이 ‘눈이 멀었다’는 사실이 함의하는 바가 무엇인가? 눈이 멀었다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눈이 멀기 이전 상태 즉 인간이 ‘눈을 통해 사물을 본다’는 것의 문제를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눈을 통해) 본다’는 것의 의미가 먼저 분석되지 않고서는 ‘눈이 멀어 볼 수 없다’라는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약간의 사회과학적 상식 혹은 철학적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본다’는 것의 의미가 자연스럽고 생리적인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보는 행위는 신체 기관으로서의 눈이 수행하는 시지각 이상의 것으로서, 그가 속한 사회의 문화적 내용들에 의해 매개되는 것이고, 이에 따라 특정한 시대 특정한 사회는 사람들이 일상 생활 속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일정한 ‘보는 방식’(way of seeing)을 규정한다. 따라서, 시각 또는 보는 방식이란 항상 역사적으로 형성된 것이며, 사회적으로 공유되고 학습되는 것이란 측면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에서 눈이 멀었다는 사실은 단순히 신체 기능의 일부인 시력의 감퇴 혹은 상실을 의미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적어도 눈이 멀었다는 사실은 인간이 그동안 지녀왔던 모든 사회적 능력을 상실했다는 의미이며, 어쩌면 현대사회 안에서 만들어진 특정한 종류의 인간이 완전한 죽음을 경험하는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시각의 능력 자체가 사회 문화적으로 매개된다는 점에서, 그것은 개인을 일정한 방식으로 주체로 구성하는 사회적 과정과 긴밀히 결부되어 있는 것인데, 만일 그 능력이 상실된다고 한다면 개인은 더 이상 사회 속에서 자신을 주체로 구성할 수 없다는 것이다. 주체란 인간 개인의 삶의 조건을 구성하는 다양한 현실적 관계들 속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치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이상 자신의 눈에 지각되는 가시적 세계 안에서 자신을 시각적 주체로 위치시킬 수 없다면, 그것은 곧 주체화의 실패를 의미하며, 그 결과는 주체의 소외라고 해도 무방한 것이다.

 

인간이 시각의 능력을 통해 접하는 가시적 세계 속에서 주체 위치란 주체가 가시적 대상들을 바라볼 때 획득되는 위치이다. 이 위치를 많은 철학자들이나 사회학자들은 ‘시점’(the point of view)로 정의해 왔는데, 시각이 사회 문화적으로 매개되고 주조된다는 것은 특정한 시점이 개인에게 해당되고 이 시점에서 가시적 대상들과 관계 맺음으로써 개인이 ‘보는 주체’(the seeing subject)로 구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보는 행위가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것이며 가시적 세계 속에서 ‘보는 주체’를 구성한다면, 우리는 이 소설을 시각의 정치학적 견지에서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즉 이 소설은 시각의 능력을 상실한 인간들의 도시가 처한 위기와 혼란을 통해 그동안 인간이 얼마나 특정한 시대 특정한 사회의 지배적이고 당연시된 ‘보는 방식’에 길들여져 있었는가를 문제제기하고, 나아가 이데올로기가 특정한 방식으로 개인을 주체로 호명하듯이, 보는 방식 역시 특정한 방식으로 주체를 구성해왔음을 철저히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시각을 상실한 인간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서 있었던 모든 주체의 기반을 상실했던 것이며, 이것은 육체적 차원의 죽음이 아닌 사회적 의미에서 주체의 죽음과 동일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 검은 색안경을 썼던 여자와 검은 안대를 한 노인이 “두려움이 실명의 원인”이었다고 말하는 것일지 모른다. “우리는 눈이 머는 순간 이미 눈이 멀어 있었소, 두려움 때문에 눈이 먼거지, 그리고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계속 눈이 멀어 있을 것이고.” 이 두려움은 지금까지 소유해 온 모든 것을 다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 다름 아니다. 본다는 것은 항상 “~을 본다”는 것이므로, 그 대상을 필연적으로 전제로 한다. 그런데 이제 대상을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시각을 통해 대상의 직접적 소유를 확신해왔던 인간은 그 모든 것이 부재하는 것과 같은 충격을 겪을 수밖에 없다. 본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안다는 것으로 이어지며, 다시 안다는 것은 내가 그것을 소유하고 있음을 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지 못함은 내가 그것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물질(자본 및 상품)에 대한 사적 소유는 필수불가결의 기본적인 생존 양식이다. 적어도 자본주의 사회는 개인으로 하여금 자신들이 물질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와 자신들이 소유한 물질의 허구적 가치를 통해 인간으로서의 가치와 존재를 확인하게끔 의식화해왔다. 맑스주의자들은 바로 그것을 이데올로기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처럼, 이 소설은 눈이 먼 자들의 모습을 통해 그동안 인간이 사회 속에서 주체를 형성하고 타자 혹은 대상과의 관계를 형성해왔던 방식 자체를 문제 삼고 있는 것이다.

 

 

3. ‘인간’이란 무엇인가?

 


시각을 상실한 이후에도 인간은 여전히 인간으로 남을 수 있을 것인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형성된 소유 주체로서의 인간이 아닌 전혀 다른 조건에서의 인간으로서의 주체화가 과연 가능할 것인가? 이 소설이 근본적으로 실험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새로운 인간화의 길의 가능성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둠은 물지도 않고 공격하지도 않”지만 어둠 속에 갇힌 인간들은 서로를 물어뜯고 난도질하는데, 과연 인간은 자신들 앞에 닥친 이 어둠의 백색 공포를 이겨내고 인간으로서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작가는 소설 속 인물의 입을 빌려 우리에게 말한다. “우리가 전에 지니고 살았던 감정, 과거에 우리가 사는 모습을 규정하던 감정은 우리가 눈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야. 눈이 없으면 감정도 다른 것이 되어버려.” 소설의 거의 끝부분에서 나오는 장면인 베란다에서 “세 여인, 세상에 처음 왔을 때처럼 벌거벗은 세 여인은 마치 미친 것 같이” 목욕하는 장면은 시각의 능력을 상실한 이후에 인간이 이제 새로운 의미와 조건에서 인간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에덴동산에 들어가기 위해 지금껏 갖고 있었던 모든 때를 씻어 내며 다른 차원과 다른 조건에서 새롭게 인간되기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보는 것의 상실 이후에 그리고 소유하고 있던 것의 부재를 경험한 이후에도 과연 인간은 인간일 수 있을까. 작가의 대답은 물론 지극히 회의적이다.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눈이 먼 사람들은 눈이 멀고 나서 비로소 볼 수 있게 되었지만, 스스로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오히려 그 사실을 인식하는 것은 유일하게 볼 수 있었던 사람인 의사의 아내였고, 그녀는 이제 사람들이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들이 더 이상 아무 것도 보지 않는 진짜 눈 먼 사람들이 되어 버렸다고 말한다. 여기서 그녀가 말하는 본다는 것은 결국 시각의 능력에 의존하지 않고 다시 말해 대상을 지배하고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 보는 것이 아닌 새로운 차원에서 사물과 타인 그리고 자신을 인지할 수 있는 ‘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쩌면 모두가 비자발적으로 눈이 멀었을 때, 유일하게 스스로 눈이 멀어버렸던 의사의 아내만이 이 새로운 차원의 시각 능력을 조금씩 터득해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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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동아일보사 / 2004년 3월
평점 :
품절


소설의 세계, 소설의 문제, 소설의 해결에 관하여

―존 쿳시, 『추락』 (Disgrace, 1999)을 읽고

 

 

 



1. 소설 속 세계의 현실성 - “아파르트헤이트, 그 이후

 

1994년 4월 드디어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가 종식되고 남아공은 최초의 흑백연합정부를 수립했다. 흑인을 대표하는 아프리카민족회의(ANC)와 백인 기득권층을 대표하는 국민당(NP)이 연합하여 구성된 남아공 연합정부는 “보복 없는 과거청산”이라는 대명제를 구현하기 위해 1995년 11월 “진실과 화해 위원회”(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를 발족시켰다. 이 위원회는 아파르트헤이트 시대 백인정부가 저지른 수많은 인권탄압과 잔악행위는 물론 ANC를 비롯한 반(反)정부진영이 투쟁 과정에서 빚어낸 보복적 폭력 행위의 진실을 밝히고 피해자들에게 경제적ㆍ법률적 보상을 관장했다. 위원회는 청문회를 통해 사면을 신청한 가해자들의 고백과 관련자들의 증언을 듣고 그 고백의 진실여부에 따라 가해자의 사면을 결정하고 피해자에게 보상을 하는 독특한 방식을 취해 국민통합과 화해를 모색했다. 위원회는 1995년 12월부터 1998년 7월까지 2년 7개월 가량 존속했으며, 2000년 11월까지 총 7,112명이 사면을 신청해 그 중 849명이 사면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의 핵심인물들은 사면을 신청하지도 않았으며, 신청자들의 대부분은 흑인 경찰을 비롯한 하위직 공직자들이었다. 실제적인 차원에서 보더라도 아파르트헤이트의 가해자들이 위원회에서 한 증언들은 자신의 죄과에 대한 깊은 참회와 반성에 바탕을 둔 진실의 고백이라기보다는 사면을 얻기 위한 하나의 통과의례에 가까웠다. 그리고 증언의 과정에서 자신을 체제의 또 다른 희생자로 합리화하는 경향도 나타났다. 죄과의 사실에 대한 인정은 있었지만, 그것을 진실하게 참회하는 것은 부족했으며, 이러한 제도적 절차만으로는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졌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남아공에서 ‘진실과 화해’의 문제는 어떤 면에서 이 위원회의 활동이 종료된 1998년 7월 이후의 시점부터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진실과 화해 위원회”가 법률적 사면을 통해 부여한 국가적 차원의 제도적ㆍ행정적 용서 및 화해가 일상을 살아가는 개인들 간의 용서와 화해로 곧바로 직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화해는 중앙정치의 제도적 장에서 상징적으로 구현되는 것에 머무를 수 없는 것이었다. 이는 적어도 남아공에서 진정한 화해란 사회구성원 사이의 사회적ㆍ경제적ㆍ정치적 조건의 평등이 구체적으로 실현되었는가 하는 문제와도 깊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남아공에서 그 평등 실현의 가시적인 지표는 다름 아닌 ‘토지’ 즉 땅이었다. 지난 시절 남아공 백인정권의 역사는 한 마디로 흑인들을 토지에서 유리시킨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13년에 제정된 ‘원주민 토지법’은 흑인들이 ‘거류지’라고 불리는 지역 외에서 토지 소유는 물론 백인 소유의 토지 소작마저 금지했다. 1936년의 ‘원주민 토지법’과 1950년의 ‘집단 거주법’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법으로 흑인들의 자유로운 토지 보유와 거주를 점점 더 엄격하게 제한했고, 그런 법을 근거로 흑인들에게서 조직적으로 몰수한 토지를 백인들에게 재분배했다. 그랬기 때문에 아파르트헤이트의 종식과 더불어 흑인들의 토지 귀환 욕구가 증폭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고, 그들의 귀환은 필연적으로 백인농부들과 토지 소유권을 둘러싼 첨예한 갈등을 유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갈등은 더 나아가 흑인들에 의한 백인농부들의 무차별적인 살해라는 ‘전쟁 상황’으로 발전했다. 

 

여기서, 소설 『추락』이 발표된 시기(1999년)가 바로 “진실과 화해 위원회”가 활동을 종료한 시점과 정확히 맞아 떨어진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쿳시가 어떠한 현실 가운데서 이 소설을 쓰게 되었으며, 이 소설이 어떠한 역사적 현실을 관통하는 작품인지를 우리는 분명히 인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추락』을 관통해 흐르는 두 가지 중요한 역사적 사건은 “진실과 화해 위원회”의 활동 및 “토지 귀환을 둘러싼 전쟁 상황”이었다. 전자가 이데올로기적 차원의 문제라면, 후자는 남아공의 인종 및 계급 간의 불평등을 구조적으로 뒷받침 하는 정치경제학적 토대의 문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두 가지는 포스트-아파르트헤이트의 현실을 겪고 있던 남아공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상황이 이러하다면, 『추락』은 기본적으로 포스트-아파르트헤이트 시기 남아공이 부딪치고 있는 이런 두 가지 역사적 과제에 대한 소설적 은유로 읽힐 수밖에 없는 것이다.

 

 




2. 소설 속 문제의 현실성 - “그러니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진실과 화해’를 통한 이데올로기적 과거사의 청산 그리고 ‘토지의 귀환’을 통한 잔존하는 사회경제적 차원의 불평등 해결, 이 두 가지 차원의 변혁적 과제를 수행하는 중에 극심한 갈등과 혼란을 경험하고 있던 1999년의 남아공, 이 소설 속의 세계가 처한 현실이었다. 그러니 이제 이 혼란의 세계 앞에서 나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이 세계에서 두 주인공 루리와 루시는 따로 또 같이 제 몫의 선택을 요구받는다. 바로 이것이 이 소설의 ‘문제의 현실성’을 구성한다. 예컨대, 루리가 멜라니를 성희롱한 혐의로 대학 조사위원회의 조사를 받는다는 설정은 정확히 “진실과 화해 위원회”의 은유라 볼 수 있는데, 루리는 여기서 스스로를 향해서 진실한 내면의 참회를, 멜라니를 향해서는 형식적 차원의(즉 절차적 차원의) 사과를 넘어서는 인격적ㆍ윤리-정치적 차원의 사죄를 요청받은 것이다. 그러나 루리는 조사 과정에서 ‘혐의 사실’은 인정하지만 잘못을 반성하고 참회하기를 거부하고 비타협적인 태도로 일관한다. 진상조사위원회란 오로지 법적 영역만 담당할 수 있고 참회나 사과 같은 개인 내면의 진정성까지 문제 삼을 권리는 없으므로, 여기서 참회를 표현하는 일은 잘못된 타협이라고까지 주장한다.

 

즉 자신이 다만 당시 “에로스의 노예”로서 행동한 것이라 진술하고(p.81) 급기야 심문을 마치고 나오면서 기자에게 “나는 이번 경험으로 풍부해졌소”라고 말한다(p.87). 총장이 마지막으로 제안한 사과성명 발표마저 거부하고 대학에서 파면당하는 것을 기꺼이 수용했던 그가 끝까지 고수한 입장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는 뒤에 멜라니의 아버지와 나누는 대화 중에서 드러난다. “나한테는 서정적인 게 부족합니다.”(p.260) 물론 그는 자신의 성희롱사건과 루시가 당한 강간 사건 사이의 모종의 연관성을 감지했기 때문에 멜라니의 집을 방문하여 사과를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변화는 자신의 위치를 ‘가해자’로 인정한 것에 그칠 뿐 정작 사건 자체를 바라보는 입장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었다. 그의 부인과 또 다른 딸에게 무릎을 꿇는 행위도 멜라니의 아버지가 자신의 “속임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게” 확실해진 상황에서 이제 어떻게든 상대방으로부터 적절한 사면을 빨리 받아내기 위한 의도로 해석할 여지가 충분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걸로 충분할까?” “이거면 될까? 안 된다면, 어떤 게 더 있지?”(p.263)

 

여기까지 그가 계속해서 범하고 있는 오류는 조사위원회의 요구를 개인의 내밀하고 사적인 욕망에 대한 부당한 간섭으로 곡해했다는 점이다. 루리 자신이 멜라니에게 욕망을 실현한 행위가 멜라니에게 딱히 강간은 아니었지만, 명백히 그녀가 욕망하는 것도 아니었으며, 이 욕망의 실현 과정에서 명백히 교수-학생, 백인-유색인, 남성-여성이라는 권력관계가 개입되고 있었기 때문에, 루리가 그토록 강변하는 그 욕망 자체가 이미 (서정적인 것의 충분 여부와는 관계없이) 순수한 것이 아닌 정치적 맥락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조사위원회의 참회 및 사과 요구는 윤리적인 차원인 동시에 정치적인 차원의 요구였으며, 자신의 욕망 의 기원과 조건 그리고 성질 자체를 근원적으로 성찰할 것을 주문하는 것이었다. 루리에 의해 제기되는 이러한 선택의 요구들을 통해 작가는 ‘진실과 화해’의 진정한 의미와 그것의 실제적 가능성을 독자들에게 새롭게 문제 제기하는 것이다. 루리가 당면해 있는 문제는 기실 그에게 이 세계를 향해 자신의 존재를 건 모종의 윤리-정치적 의견 표명을 강제하는 요구였다. 그런데 루리는 이 문제 앞에서 과연 어떤 선택을 하는가? 루리는 “죄의 세속적 탄원과 회개의 보다 영적인 영역을 구분”하면서 회개와 용서의 개념을 스스로 문제화한다. 사실의 진술과 회개는 서로 다른 담론의 영역을 점유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공허한 고백을 거부하고, 제도적 거세를 선택한다.    

 

한편, 남성과의 관계를 거부하고 헬렌이라는 친구와 동성애를 관계를 맺은 “완전한 시골여자”(p.92)로서, “개를 돌보고 꽃과 채소를 팔아서” 꾸려가는 “단순한 삶”을 선택한, 그래서 “인간이 갖고 있는 특권 일부를 동물들과 공유하”고 살아가는 루시. 그러나 그녀의 그러한 단순하고 평화로운 대지에서의 삶은 지극히 불안정한 기반 위에서 꾸려지고 있는 것이었다. 견고하게 작동하고 있던 지배체제가 타파된 이후 남아공에서는 과도기적 폭력이 만연해 있었으며 미혼의 젊은 백인여성 농장지주인 그녀는 자신의 그러한 조건 덕분에 언제든지 폭력의 희생물로 전락할 위험을 안고 있었다. 그곳에서 그녀의 안전은 총과 개들을 통해서 가까스로 유지되고 있는 불안한 상태의 안전이었을 뿐이다. 물론 그것은 과거 아파르트헤이트 체제가 남긴 부정적 유산이었다. 그녀가 추구하는 새로운 삶의 방식은 지난 역사에 대한 어느 정도의 반성적인 비판에 바탕을 둔 것이긴 했지만, 아직은 다분히 낭만적인 색채를 띠고 있는 것이었다. 자신의 바램과 달리 그녀가 꿈꾸는 삶, 모든 생명의 조화에 바탕을 둔 상생과 공존의 삶을 일순간에 파괴할 수 있는 위험의 요소가 남아공에는 지속적으로 잔존하고 있었으며, 그것은 결국 ‘토지’의 흑인으로의 귀환 문제와 연관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남아공에서 토지 불평등은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의 잔혹성과 야만성을 상징하는 가장 핵심적인 모순구조였다. 남아공의 인종차별이 극심한 계급불평등으로 직결되도록 매개하는 실질적인 착취의 토대가 바로 이 토지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포스트-아파르트헤이트 시대는 흑인들의 토지로의 귀환 욕구가 증폭되는 것과 궤를 같이했다. 지난 시절 토지를 부당하게 박탈당했던 흑인들의 관점에서는 백인들의 토지를 폭력을 행사해서라도 되찾아야 했다. 그것은 그들의 정당한 권리행사이기 때문이다. 물론 백인들의 입장에서 그런 행위는 ‘합법적 절차’에 따라 소유한 토지를 약탈하는 야만적 행위였다. 소설 속에서 루시가 이러한 흑인들의 정당한 권리행사 혹은 야만적 행위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별로 충격적이지 않다. 이미 소설 밖의 현실에서 그것은 비일비재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루시가 강도와 강간을 통해 맞닥뜨린 새로운 폭력의 세계는, 권력과 지위를 이용해 흑인 여성들을 성적으로 지배하는 것이 별 문제 없이 일상화되어 있던 루리에게 어느날 갑자기 성희롱의 추문으로 들이닥친 그 세계와 결국 같은 세계일 뿐이다.

 

루리에게 주어진 선택의 요구 즉 피상적 차원의 죄과 시인이냐 아니면 윤리-정치적 차원의 사죄냐, 라는 물음을 통해 이 소설이 당시 남아공의 백인들이 ‘진실과 화해’의 역사적 과제 앞에서 처해 있던 문제의 현실성을 구성해냈다는 지적은 이미 앞에서 했다. 한데, 루시의 경우는 루리와 달리 자신이 사건의 피해자가 되어 선택을 요구받는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의 조건을 떠남 즉 패배냐 아니면 치욕을 감수한 생존의 도모냐, 로 해석하고 그 가운데서 후자를 선택하려 한다. 루리가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의 요구를 구조적으로 잘못 파악했던 것처럼, 그녀 또한 강간 및 강도 사건을 통해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의 요구를 생존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오류를 범한다. 즉 루리의 제안대로 생모와 친척들이 도와줄 네덜란드로 돌아가거나 루리의 직접적인 도움을 받아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을 잊을 수 있는 어디 다른 먼 곳에 재정착하는 것까지, 그 다른 삶의 가능성이 그녀에게 완전히 닫혀 있는 것이 분명히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지금 이 농장을 포기하고 떠나는 것이 패배라고 주장하며 그것을 거부한다.

 

대신에 여기에 계속 있음으로써, 자신의 땅을 계속 일구고, 지속될 강간 및 강도의 위협을 모면하고자 페트루스의 사실상 첩이 되기를 선택하는 것. 결국은 땅의 소유권을 페트루스에게 넘겨주고 “그를 포함한 어느 누구도 내 허락 없이는 이 집에 들어오지 못한다”(p.308)는 권리 하나만을 챙기는 것이 생존이라고 주장하며 그쪽을 선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연 그녀의 그러한 생존 전략이 그녀가 먼저 거부한 패배로서의 생존과 본질적으로 무엇이 다른 것인지를 우리는 사실 잘 알 수가 없다. 루시의 논리는 땅의 주인이 더 이상 자신이 아니라 할지라도, 계속해서 땅을 제 손으로 일굴 수 만 있다면 그것으로 성공적인 생존을 선택했다는 의미일 터, 그러나 그녀가 자신의 존엄성마저 부인한 굴욕적인 밑바닥에서 아무 것도 없이 다시 시작하여, 그녀의 말대로라면 “개처럼 되어”(p.307) 결국 가고자 하는 곳이 어디인지를 우리는 끝내 알 수가 없는 것이다.

 




3. 소설 속 해결의 현실성 -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 무엇을 향해”

 

자신의 최소한의 주체적 인격마저 온전히 내버린 상태에서, 그리고 강간 사건의 해결마저 포기하고, 강간범 일당 중 하나인 풀럭스가 수시로 자신을 훔쳐 보는 사태도 참아내고, 강간의 결과로 생긴 임신을 견디고, 끝내는 그 아기를 낳아 기르기로 하고, 자신의 성정체성까지 위반하며 (잠을 함께 자고 싶어 하지도 않는) 페트루스의 세 번째 부인이 되겠다는 루시의 일련의 선택들 앞에서 우리는 실상 이 소설이 남아공의 ‘토지 귀환’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납득할수 있는 합리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리라는 우리들의 기대를 철저히 배반하고 있음을 경험하게 된다.

 

어쩌면 바로 이 지점이 이 소설이 갖는 상당히 독특한 미덕인지 모른다. 루시의 비논리적이다 못해 독자들에게 불편함마저 느끼게 하는 저 선택이 의미하고 있는 것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폭력의 순환구조를 백인들이 먼저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이제 와서 그것을 깨뜨리고자 한다면 백인들이 지금 마치 “개처럼”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철저히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예상하고 기대했던 썩 좋은 해결책은 아닐 수 있다. 그렇다고 독자가 소설을 다 읽은 후 현실에서 쉽게 따라할 수 있는 그런 해결책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가장 ‘소설적인’ 혹은 ‘소설다운’ 해결책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소설만이 제기할 수 있는 지극히 소설적인 해결책은 소설 밖의 현실 세계에서 실현이 가능한 것으로서의 그런 해결책이 아닐지 모른다.

 

무릇 진정으로 소설적인 해결책은 한 사회가 완강하게 구조화하고 있는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통념적 좌표를 흔들면서 ‘문제의 현실성’을 보다 심화ㆍ확장시키는 특정한 선택지의 제출을 통해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루시의 선택이 좋은 해결책인지 아닌지는 독자들마다 갖고 있는 각각의 윤리적, 정치적 입장에 따라 의견이 나뉘겠지만, 객관적으로 확실한 것은 이 소설이 루시의 아버지인 루리에게마저도 그러했듯이, 동시대의 통념적 해결책을 거스르는 매우 이례적인 ‘선택’을 보여줌으로써, 결과적으로는 독자들이 아파르트헤이트 이후의 남아공의 진실과 화해 및 토지의 귀환 문제에 대해 그 고민과 성찰을 중단할 수 없도록 강하게 자극한다는 점이다.

 

작가 쿳시의 말을 빌리면, 그의 소설이 지향하는 것은 “벌어진 틈, 거꾸로 된 것, 아래쪽에 있는 것, 베일에 가려진 것, 어두운 것, 묻힌 것, 여성적인 것 등 타자를 읽는 데 있다.” 그의 소설들이 그러한 입장에서의 세상읽기이자 현실에 대한 사유의 한 방식이라면, 우리는 적어도 그 테두리 내에서 그의 문학세계를 좀 더 공감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그는 소설가이고, 그가 우리와 만나는 방식은 소설을 통해서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는 소설 안에서 소설의 세계를 만나고, 소설의 문제를 고민하며, 소설의 해결과 논쟁한다. 역설적이지만, 그러한 소설의 길을 충실히 따를 때 비로소 우리는 소설을 너머, 소설이 반향하는 “진짜 현실의 공포”와 대면할 수 있는 법이다.

 

 













-참고 문헌-




김영수, 「남아공 진실과 화해위원회(TRC)의 활동과 성격」, 『법과사회』제21집, 법과사회이론연구회, 2001년 5월. 




박진아, 「쿳시의 소설에 나타난 타자의 수사학」, 성균관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박사학위논문, 2008년 2월.




신형철, 「만유인력의 소설학」, 『작가와 비평』제6집, 2006년 하반호, 여름언덕, 2007년 1월.




이진준, 「쿳시의 『추락』을 통해서 본 ‘진실과 화해’」, 『영어영문학』제51권 2호, 한국영어영문학회, 2005년 6월.




황정아, 「너무 ‘적은’ 정치와 너무 ‘많은’ 윤리: J. M 쿳시의 『치욕』(Disgrace)」, 『현대영미소설』제14권 2호, 한국현대영미소설학회,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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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길멀어우는새 2012-05-07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통해 소설을 더 '풍부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와이 2022-10-15 0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다읽고서 알것 같은데 그게 뭔지 말할 수 없는 혼돈을 정리해 주셨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