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노래한다
김연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역사를 거스르는 단 하나의 사랑 그리고 밤의 노래”

달력이 5월에서 6월로 넘어가고 있던 그날 밤, 그곳에서 우연히 그를 만났다. 인터넷 뉴스에서는 친절하게도 그날이 처음 물대포가 등장한 날이라고 알려준다. (나중에 책을 사보고 나서야 알게 된 것이지만) 그는 모 일간지의 요청으로 취재를 나온 길이었고, 나는 시청 앞에서 집회를 마치고 양산동으로 돌아오려던 차에, 인권단체에서 활동하는 친구의 “여기 혁명전야야!”라는 흥분된 전화 한 통을 받고, 발걸음을 되돌려 시청에서부터 안국역을 지나 경복궁 동십자각을 향해 숨 가쁘게 뛰어가던 길이었다.

2008년 5월 31일 밤, 청와대를 향하고 있던 촛불의 흐름은 크게 세 갈래였다. 사직터널 쪽에서 내려오는 촛불이 효자동 길로 향하면서 경찰과 대치하고 있었고, 안국동에서 동십자각으로 향하던 시민들도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또 청운동 길로 향하는 촛불도 경찰과 대치중이었다. 10만 인파가 청와대 길을 완전 포위한 형태였다. 내 기억에 우리가 만났던 곳은 대략 경복궁역 근처 효자로 입구쯤이었다. 나는 그때까지도 그를 한 번도 실제로 본 적이 없었다. 다만 그의 소설이 나올 때 마다 꼭 사서 읽어보는 4만 열혈 독자 가운데 한 명이었을 뿐. 당시 나와 같이 있었던 사람은 우리 학교 문창과를 졸업한 선배였는데, 나는 그에게 “방금 봤어? 김연수가 지나갔어!”라고 말했었다. 김연수 작가와 잠깐 인사를 나누고, 양해를 구해 사진을 한 장 같이 찍었다. 김연수 작가에게는 그날 우리의 만남이 그리 인상적이지 않았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 순간이 앞으로도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작가는 소설의 후기에서, 그날 밤 촛불시위대와 함께 연좌하는 중에 전경들 앞에서 대중가요를 부르며 춤추던 젊은이들을 보았다고 술회한다. 그 젊은이들의 모습은 그에게 “이것이 어제와 다른, 새로운 세계라면, 반드시 복수할 필요는 없다. 당장 내 눈 앞에서 정의가 이뤄지지 않아도 좋다”는 긍정적 세계관을 갖도록 했다는 것이다. 나 또한 그날 밤 효자동에 그와 함께 있었고, 그와는 조금 다르지만 혁명과 우리네 일상의 삶에 관해 내 나름대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다. 우리는 그렇게 ‘밤이 노래하는’ 것을 함께 들었고, 그것은 (작가가 자주 말하는 대로) 누군가와 연결되기를 바라는 열망 가운데서 하나의 세계로 연결된 그런 순간이었을 것이다.

김연수가 누구던가. 그는 스스로를 “소설을 쓰는 소설가이다. 프로 소설가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한 마디로 소설에 인생을 건 진짜 소설가라는 것. 더불어 어느 젊은 평론가의 무덤덤한 증언대로, 1~2년에 한 권씩 책을 내는데, 그러고 나면, 당신이 책 내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상이 주어지고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는, 그런 부류의 작가이다. 소위 89학번 세대의 가장 지성적인 작가이자, 그 세대의 감각과 문제의식을 누구보다도 첨예하게 드러내온 작가 김연수가 학부생 시절부터 구상해온 주제를 다듬고 또 다듬어 이제야 완전한 버전으로 세상에 공개했는데, 그것이 바로 장편소설『밤은 노래한다』이다. 김연수의 팬들 사이에서 그리고 그를 ‘21세기 한국문학의 블루칩’이라고 평가하는 문단에서 그토록 오래 기다려온 작품이었으니,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누구는 이 소설이 가슴 뜨거웠던 어떤 젊은이들의 운명에 관한 이야기라고 하고, 어떤 이는 조국광복과 계급해방이라고 하는 숭고한 꿈을 품은 채 일신의 안위를 포기하고 혁명에 투신했던 젊은이들의 엇갈린 운명이 빚어낸 참혹한 비극의 역사를 소설화한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작가는 “친구를 죽일 수 없는 아이의 세계에서, 친구라도 죽일 수 있는 논리를 받아들이게 되는 어른의 세계로 진입하는 과정”을 그린 성장소설이자 그런 성장의 중심에 놓여있는 사랑에 관한 낭만소설이라고 말한다. 아무려면 어떨까? 이 소설 안에는 혁명도 있고, 이념도 있으며, 우리가 알지 못했던 역사도 있다. 그리고 그 혁명과 이념의 역사를 통과했던 젊은이들의 성장과 운명도 있으며, 그 모든 역사와 운명마저 거스르고자 했던 처절한 사랑도 들어 있다.

1930년대 초반 만주 혹은 간도지역의 항일운동사 혹은 공산주의 혁명사의 한 귀퉁이에서 민생단 즉 일제의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동지들의 손에 죽어나간 500여명의 혁명전사들이 있었다. 적군인 일본군이나 이민족인 중국군에 의해서가 아니라, 같은 조선인들에 의해 그것도 항일무장투쟁을 통해 식민지 조국을 해방시키고 무산계급이 독재하는 공산주의국가를 함께 세우고자 동고동락했던 혁명동지들의 손에 몇 년에 걸쳐 조직적으로 숙청되었다면 그보다 더한 비극이 또 있겠는가? 단순히 야만적이었고 혼란스러웠던 시대적 조건의 탓으로 돌리기엔 무엇인가 섬뜩한 보편적 역사의 진실이 감추어져 있을 것만 같지 않은가? 작가는 그 역사의 진실을 드러냄과 동시에 그 진실 뒤에 가려진 더 놀라운 삶의 진실을 슬그머니 보여준다. 작가는 그것을 두 여인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들려준다.

“나를 데려가우. 이번에는 진짜 바다를 내게 보여줍소. 사람은 무엇 때문에 살며 어떠한 사람으로 되며 사람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잘 압지. 그러니 내게 진짜 바다를 보여줍소. 그럼 나는 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당신의 바다로 들어가는 작은 오솔길이 되겠슴둥.” (149~150쪽)

“지금 어디에 있나요? 제 말은 들리나요? 어쩌면 이건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편지겠어요. ....... 사랑이라는 게 우리가 함께 봄의 언덕에 나란히 앉아 있을 수 있는 것이라면, 죽음이라는 건 이제 더 이상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뜻이겠네요. 그런 뜻일 뿐이겠네요.”
(324~325쪽)


이 작품과 더불어 이제 소설의 이야기로 역사를 수집하는 아키비스트(archivist) 김연수의 작업은 정점에 달한 것으로 보인다. 김연수에게 있어 소설을 쓴다는 것은 역사를 거슬러 자신만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소설 속의 주체가 그렇게 새로운 자신만의 고유한 역사를 구축하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역사를 대체한 픽션으로의 역사 즉 '사랑'의 계보학을 구축함을 의미한다. 김연수 단편 중 최고의 걸작인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에서 "후회는 없어"라는 외침으로 유서를 끝맺은 그녀가 그러했고,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에서 태평양전쟁 당시 남양군도까지 끌려갔던 할아버지가 남겨준 한 장의 사진, 그리고 이번에 나온 『밤은 노래한다』의 이정희가 김해연에게 남긴 편지에 이르기까지. 그 모두가 바로 역사 뒤에 숨겨진 하나의 진실, 곧 사랑에 관해 노래하는 꿈의 조각들이었던 셈이다. 소설가 김연수에게 역사의 실천은 사랑을 향한 픽션의 절차이다. 그 픽션의 절차 가운데서 그는 타인의 이야기에 다가가는 문학의 윤리를 계속해서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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