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켄 블랜차드 외 지음, 조천제 옮김 / 21세기북스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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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들 말을 길들이는데 있어서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구사해야 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곤 한다. 하지만 이 말 속에 결국 시행하는 사람의 균형 감각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잘 눈치 채지는 못한다. 60년대, 70년대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했던 어렵던 시절에 우리의 산업 역군들은 휘몰아 치는 상사의 지시에 눈치보며 무던히 성과를 만들어 냈다. 자율성과 창의성이 철저하게 거세 당하는 상황에서도 어쩌면 가장 효율적인 경영 시스템을 만들어 왔다고 볼 수 있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난 뒤 우리 사회는 상벌제도에 있어서 칭찬보다는 체벌에 촛점이 맞춰져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에 이르렀다. 아무런 문제가 없으면 "음~ 잘 되어 가고 있구먼"하면서 칭찬없이 넘어가기 일쑤고, 반대로 조그만 문제라도 도드라지면 가차없이 "그럴꺼면 당장 때려쳐!"라는 불호령이 여지없이 떨어지곤 했다. 결국 좋은 결과을 유도하는데 있어서 인간의 자율적이고 적극적인 심리적 에너지를 뽑아내기 보다는 철저하게 자극(S)-반응(R) 이론에 충실했다는 것이다.


본서에서는 이러한 문제점을 범고래 훈련법의 일화를 들어서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난폭할 수도 있는 범고래를 훈련시키는데 있어서 강압적인 지시와 체벌보다는 더 좋은 행동을 유도하기 위한 칭찬의 마법을 구사했던 것이다. 물론 방법론적으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 있기는 하다. 그것은 원치않는 돌발 행동을 원하는 유도 행동으로 이끌기 위해서 못본 척 하면서 원하는 변화로 유도, 제안하는 방식은 말처럼 결코 쉽지는 않다. 


물론 이러한 부분은 책을 읽은 각자의 몫이기는 하다. 인간은 부정적인 쪽으로 에너지를 쏟기 보다는 긍정적인 쪽으로 정열을 불태우기를 원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다양하지만 누구나 원하는 쪽으로 이뤄지기 위한 염원이 강하단 말이다. 잘못된 결과로 인해 움추리게 하기 보다는 잘된 성과에 만족하지 않고 분발 할 수 있는 견인차 역할을 칭찬에 맞겨 본다면 어떨까? 우리가 범고래보다 못한 존재인 것은 더더욱 아니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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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옷을 입은 성서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32
김호경 지음 / 책세상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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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적지 않은 교파에서는 성서에 대하여 일명 '축자영감설'을 주장하고 있다. 성서의 모든 내용과 표현은 신께서 인간의 손을 빌려 표현되어졌기 때문에 가감할 것없이 완전한 것으로 받아 들어야 한다는 내용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경전의 절대적인 엄숙성이 지배하는 교회에서 성서에 대한 괜한 딴지나 토시 하나 달수 있는 신자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이렇듯 금기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성서의 형성 과정은 우리가 믿어 왔던 '축자영감설'과는 분명 일정 부분 다른 궤적을 그리고 있다.


신약성서는 주후 50년에서 150년 사이에 편찬되었다고 한다. 물론 오늘날까지 원본은 물론 최초 사본 또한 남아 있지 않은 현실이다. 알렉산드리아의 70인역 성서나 중세의 불가타 성서, 에라스무스 편찬 성서 또는 루터의 독역 성서 등 현재 사용하고 있는 성서는 시대에 따라서 다양한 목적으로 발간되었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이미 입증되어 있다.  본서의 출발점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성서는 다양하며 각각의 성서에는 그 시대적 배경과 사상이 녹아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면서 특히 성서에 대한 해석이 중세 시기까지 특권층에 의해 독점되었다가 금속활자 시대를 맞이 하여 어떻게 대중에게 다가 설 수 있게 되었는지 쉽게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성서에 등장하는 예수의 사건은 절대적 시간 개념인 크로노스에 갑자기 뛰어들어온 상대적 시간 개념인 카이로스로 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유의미적 해석은 주후 2000년이 넘는 오늘 이시간까지도 우리가 성서에서 현실의 문제를 어떻게 활용해 낼 수 있는가에 대한 생명력을 얻게 해준다. 구약성서의 규범적 가치관은 신약성서에 의해서 새롭게 해석되고 정의내려 진다. 우리가 만약 구 질서에 여전히 편승해 있다면 인간의 옷을 입고 온 성서를 더욱 초라한 알몸으로 만드는 결과를 초례할 것이다. 성서가 신앙인들뿐만 아니라 현대인들에게도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것은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관계 회복을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본서는 그래서 작지만 두툼한 깊이를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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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생물학 논쟁
프란츠 부케티츠 지음, 김영철 옮김 / 사이언스북스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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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윌슨이 처음 '사회생물학'이라는 책을 출판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한 때 유전자 결정론이 문화 결정론을 뿌리 채 흔들어 놓을 줄 알았다. 더 나가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가 발표되었을 때는 인간이 단지 유전자 기계에 지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이기도 했다. 분명 분자생물학의 영토가 확장될 때마다 우리는 인간의 고귀한 이성이 만들어 낸 모든 학문과 다양한 예술적 문화 유산을 통해 다른 동물들과는 비교되기 거부하는 확고한 의지를 갖고 있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우리 인간의 행동 양식이 유전자의 전략적 발현을 통해서 였는지 아니면 영혼으로 빚어진 독자적인 창의적 발현인지는 정확히 답을 내리기 힘든 시대를 살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프란츠 부케티츠은 어쩌면 대단히 위험 수준의 논조를 유지하면서 나름대로의 중립성을 유지할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유전이냐 문화냐' 그 사상적 격돌의 소용돌이에 쉽게 빠져들지 않으면서 그는 다분히 객관적 거리감을 유지하면서 양 진영에 대한 깊은 고찰을 시도하고 있다. 특히 5장 <진화와 도덕> 에서는 인간의 도덕적 행동 규범이 근본적으로는 생물학적 진화의 결과일 가능성이 있다고 논의하면서, 또 다르게는 이러한 진화론적 발상의 한계도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고 있다. 본서를 가지고 몇 년 전 친한 지인과 함께 스터디 교재로 사용하면서 열띤 토론을 거듭했던 기억이 새롭다. 명확한 결론을 도출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 하더라도 충분한 논쟁의 이슈로서 인간 본질에 대한 진지한 탐구를 시작해 볼 수 있는 좋은 책임에는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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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없다 - 기독교 뒤집어 읽기
오강남 지음 / 현암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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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없다' 그 옛날 유럽 중세시대였다면 오강남 교수는 돌에 맞어 시신 위로 돌무덤이 생겼을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나라가 아직 개발도상국이라는 닉네임이 항상 따라 다니던 70~80년대 개신교 부흥기 때 였더라도 복날의 개처럼 잡혀 질질 끌려다닐 정도의 파격적인 책 제목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유연한 신앙심이 부족한 시대에 원로 비교종교학자는 우리게게 무엇을 알려주고자 했을까? 여기에는 어쩌면 '예수를 믿는 것보다 훨씬 더 문제인 것은 잘못 믿는 것이다. 예수를 바로 믿지 않는다면 차라리 믿지 않는 게 낫다.'라는 그의 말이 어느 정도 답이 되어주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1 부는 맹목적인 신앙관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한국인들의 사회심리학적 기질 중에 하나로 지적되는 '모' 아니면 '도'라는 극단적 입장론을 분명히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종교에서 감성은 성화 단계까지 이르게 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요소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계몽주의 시대에 걸쳐 진일보한 이성의 기능은 우리를 더이상 신비주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과학적 세계관을 심어주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종교에 대한 믿음 방식이 옳은 것인가 아닌가는 분명히 이성의 잣대로 제단되어져야 한다.

 

2 부는 오늘날 대부분의 개신교에서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성경의 '축자영감설'에 대한 경계 메세지를 보내고 있다. 성경 저자들이 성령의 감화되어 오탈자 없이 성경을 기록하였다는 '축자영감설'은 특히 외국어 번역가들에게는 아주 어처구니 없는 맹신 중에 맹신으로 받아들여 지고 있다. 바벨탑 파괴로 부터 시작되었다는 언어 단일성의 파괴는 오늘까지도 무수히 많은 언어로 퍼지고 있다. 국가와 민족간의 지적 교류에 하나인 번역 과정을 들어다 보자. 그 과정에 참여하는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빠질 수 밖에 없는 번역상의 오류를 늘 존재한다. 성경 또한 같은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 성경에 대한 옳바른 이해는 결코 오탈자가 없다는 믿음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생명의 말씀을 지금, 바로 여기에서 어떻게 적용해 나가면서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 나갈 수 있느냐 하는 진지한 성찰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다.

 

3 부는 우리가 은연중에 믿고 있는 잘못된 신관에 대해서 지적하고 있다. 실제적 다신론, 실제적 무신론, 부족신관, 율법주의적 신관, 조건부 신관 등 각 개인의 주관성이 녹아 있는 신념에 따라서 얼마나 변질된 신관을 갖을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묻고 있다. 기독교 신자라면 누구나 '하느님 아버지' 라고 기도 중에 많이 부르고 있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러나 성을 결정 지을 수 없는 신에게 과연 걸맞는 호칭인지 분명히 따져보고 넘어갈 문제다. 개인적으로 신의 존재에 대해서 한 때 '불가지론'에 깊이 빠져들 때가 있었다. 개념이 가지는 초월성을 생각한다면 신은 분명 언어로 표현되어질 존재도 아니고, 사유의 영역을 넘어 설 수 밖에 없다는 생각에 깊은 좌절에 빠질 때도 있었다. 그러나 반대로 신은 증명 되어져야만 믿을 수 있는 존재인가를 생각해 보면  오히려 그것은 더 어리석은 짓임을 깨달았다.

 

4 부는 이 책의 주제에 관한 이야기로 되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에 대한 잘못된 선입관과 편견을 하나 하나 예를 들어 설명하면서 원래는 다른 진의가 있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다. 종교는 오랜 시간을 걸쳐 오는 동안 그 시대의 가치에 따라서 다양한 변화를 겪어 온다. 문제는 그러한 변화가 해당 종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경우로 종교가 갖는 원형의 가치가 손상될 가능성이 증가한다는 점이다. 그 누구도 독학으로 공부해서 믿고 싶은 종교를 선택하지는 않는다. 거의 대부분의 종교는 도제교육처럼 선경험자가 얘기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특히 기독교의 목사나 사제의 입을 통해서 전해 듣는 이야기는 신자들에게 매우 강력하게 작용한다. 회의적 자세가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다. 언제나 의심하고 그 의심의 한계를 끊임없이 넘어설려고 노력하는 신앙인의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마지막 5 부는 지금,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제시하고 있다. 어느 시대 어떤 종교든 사회구성원들에게 심리적, 사회적 기능이 작용하고 있다. 종교는 대중이 원하는 바를 충분히 충족시키면서도 사회적 윤리에 역행해서는 안된다. 기독교의 가장 큰 미덕은 신이 인간을 사랑하여 믿는 누구에게나 구원을 베풀어 준다는 점이다. 오해의 여지가 있기도 하는데, 구원이 너무 내세지향적이면 현실적 가치를 너무 쉽게 평가절하할 수 있고, 반대로 구원이 아주 현세지향적이면 기복적 신앙관에 빠져버릴 위험이 커져버린다. 더블어 종교적 제국주의자의 자세도 분명 경계해야 한다. 하느님의 나라를 실현한다는 일념으로 전도에만 신경을 쓴다는 의도는 좋지만 지하철에서 '예수불신지옥'이라고 쓴 빨간띠를 두른 열혈신자때문에 최소한 눈살을 찌푸리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

 

'기독교 뒤집어 읽기'라는 부제가 붙은 오강남 교수의 '예수는 없다'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이라면 한번쯤 읽어보아야 할 수작임에는 분명하다. 내용적 깊이를 유지하면서도 일반 대중들의 관심을 유발하는 도발성도 적당하니 말이다. 의식있는 신앙인이 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별다르게 발칙한 내용이 없는 교양 수준으로 알고 넘어가야할 기독교론이라는 점을 꼭 이야기하고 싶다. 하나님은 성경만 주신 것이 아니다. 자신의 신앙 좌표를 점검케 도와주는 책도 읽어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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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의 즐거움 - 개정판 매스터마인즈 1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지음, 이희재 옮김 / 해냄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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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의 즐거움은 우리가 진정 느낄 수 있는 행복의 척도가 사실 심리적 무아경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체험은 감정, 목표, 정신이 일치됨으로 성취될 수가 있는데, 그 구체적인 상황은 다음과 같다. 목표가 분명할 때, 피드백의 효과가 빠를 때, 쉽지도 않지만 버겁지도 않은 과제를 극복 할 때이다.

 

우리가 체험하는 행복감은 어떠한 상태에 이를 때 얻어 진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러한 감정적 여운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고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몰입 중에는 행복을 느낄 수 없지만, 몰입 후에는 진정한 행복을 느끼고 훨씬 지속적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몰입은 주어지는 과제와 자신의 능력이 정교차 할 때 제공되는 환경이 주는 영감도 중요하다. 또한 혼자 보다는 타인과 교감 할 때 더욱 증폭될 수 있는 특징을 보여 준다. 그러한 의미에서 시간 운영은 몰입의 강도를 증가 시키는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변수 중에 하나로 여겨진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구분하는 시간 배분 형식은 동료와 함께 하는 생산 활동과 가족과 더불어 하는 유지활 동, 혼자만의 고독을 즐기든 친구들과 단란한 시간을 보내는 것과 같은 여가 활동으로 구분되어 질 수 있다. 이러한 모든 시간 운영에 있어서 우리가 흔히 체험하는 감정적 굴곡은 분명 몰입의 경지를 넘나들 수 있는 필요조건이 된다. 즉 옳다, 좋다같은 긍정적 호감은 심리적 반엔트로피를 형성하지만, 틀리다, 나쁘다같은 부정적 반감은 심리적 엔트로피를 증대시키는 결과를 초례하게 된다. 


목표가 실현되는 정도는 동기부여가 어떤 수준인가에 의해 비례한다고 볼 수 있다. 적절한 수준의 목표는 성취욕을 자극하기 때문에 훨씬 더 고차원적인 몰입의 경험을 체험하게끔 하는 효과를 발휘하게 한다. 결국 몰입의 즐거움은 타인과 교감되는 상황과 적절한 난이도에 의한 팽팽한 사고 집중력에 좌우되며, 정신력에 질서를 부여함으로 획득될 수 있다는 것을 저자는 환기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을 읽는 독자 입장에서 남는 과제는 분명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어떻게 그러한 적용의 예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역량을 어떻게 키워나갈 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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