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들은 발표 중 제일 재밌었어요."
2000년, 내가 동양안충에 대한 연구결과를 발표했을 때 사람들이 했던 말이다.
유머를 삶의 모토로 삼고 있는지라 그 말이 내게 기쁨을 준 건 틀림없지만,
그만큼의 부담을 안겨준 측면도 있다.

작년 학회 때 '미라'에 관한 발표를 할 때, 난 수많은 사람들에게 "기대된다"는 말을 들었다.
나이 사십에, 그것도 사람들 앞에 서는 걸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 발표를 앞두고 떨린다는 게 말이 안되지만
내게 뭔가를 기대하는 사람들의 숫자만큼 난 떨고 있었다.
다른 이의 발표를 듣는 걸 포기한 채 서해안 바닷가 바위 옆에서
준비해 간 자료를 보면서 20번이 넘도록 발표 연습을 한 건 그 때문이었다.
물론 결과는 좋았고, 사람들은 정말 재미있게 내 발표를 들어 주었다.

올해 가을학회 때, 옛날 무덤 안에서 기생충의 알을 발견한 자료를 준비하면서
내가 바랐던 건 딱 하나였다.
어떻게든 웃겨야 한다는 것.
학회 발표를 하면서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을까만은
난 이번에 "이래도 안웃을래?"라는 마음으로 내가 살면서 체득한 유머를 잔뜩 쏟아부었다.
일년 전보다 훨씬 웃기게 슬라이드를 만들었지만
일년 전보다 더 높아진 듯한 사람들의 기대는 역시나 부담이었다.
아침부터 가슴이 방방 뛰더니만 내 발표가 있는 오후 세션 때가 되자 너무 떨려서 자리에 앉아 있는 게 힘들 지경이었다.

이제 내 차례.
"단국대 서민입니다..."라고 하다가 "아, 떨려"란 말을 해버릴만큼 난 주눅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수줍은 듯한 내 태도가 도발적인 슬라이드와 결합, 시너지 효과를 냈는지
사람들은 내가 웃으라고 한 대목에서 정신없이 웃어댔다.
일년 전의 반응을 10점 만점에 8 정도로 본다면
엊그제의 반응은 대략 9.5일 것이다.
내 유머에 어느 정도 익숙한 심복이 "역시 실망시키지 않는군요! 최고로 웃겼어요"란 문자를 보냈을 정도.
의외로 질문이 많이 나와 당황했지만
난 거침없이 애드립을 쳐 사람들을 웃게 만들었다.
나이든 분들에 대한 내 대답은, 내가 만일 여유있는 자세로 한 것이었다면 "날 놀리냐?"는 생각을 갖게 할 수도 있었지만
주눅이 든 내 태도가 그런 여지를 없애 준 것 같다.

발표가 끝나고 나서 젊은 미녀 두분이 다가왔다.
"팬이어요!"
그네들은 한명씩 나와 사진을 찍었는데
아쉽게도 그런 사람은 그 둘이 다였다 (다른 미녀들은 바쁜 걸까....^^).
하지만 사람들이 내게 선사해 준 웃음은 이틀이 지난 지금까지 날 뿌듯하게 만들었고
어제 집에 오자마자 엄마한테 자랑을 하게 했다.
"엄마, 제가 학회 때 발표 제일 잘했어요!"
그게 유머 면에서 그렇다는 걸 전혀 모르시지만 엄마는 내 말에 기뻐해 주셨다.
"그래, 우리 아들이 발표도 잘하고... 이제 장가만 가면 되겠네."

앞으로 1-2년은 아무런 발표도 안하면서 유머를 가다듬을 생각이다.
그리고 2010년 쯤에 유머지수 9.7에 도전해 봐야지.
유머는, 노력이다.

댓글(14)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sweetmagic 2007-10-27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는 이런 글이 올라올거라 굳게 믿었슴돠 ~!!

마늘빵 2007-10-27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녀분들이 너무 인색하시군요! 아니면 다른 두 미녀가 너무 막강한 나머지 포기하고 나오지 않았나봐요. ^^

부리 2007-10-27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음...글게 말입니다 싸인공세에 시다릴 줄 알았는데^^
매직님/다 님 덕분입니다 꾸벅^^

하늘바람 2007-10-27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여 믿으실지 모르지만 오늘아침 그냥 님이 생각났는데 왜일까요.

BRINY 2007-10-27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어머님 말씀이 늘 잊지않으시고 결정타를 날리시네요. 저희 어머니랑 똑같으십니다.

Mephistopheles 2007-10-27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력도 노력이지만 타고나는 사람들도 있더라고요..
다시 말해 제 친구 k모군은 생활 자체가 유머라는...^^

보석 2007-10-27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우와!!! 노력하는 모습도, 그 결실도 멋집니다.^^

산사춘 2007-10-27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회를 유머의 장으로 활용하시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hnine 2007-10-27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회장에서 팬을 만드시다니...대단하십니다.
발표는 우선 재미있어야지요. 청중을 어쨋든 졸지 않고 깨어있게 하는 것, 거기다가 웃음까지 줄수 있는 발표, 저의 드림입니다.

비로그인 2007-10-28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에 도전할 9.7의 유머지수는 또 얼마나 떨게 될지 걱정됩니다.

비연 2007-10-28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들어보고 싶군요! ^^

웽스북스 2007-10-29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20번 연습이라니 대단하시네요
저도 이상하게 앞에만 나가면 웃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어요
그래서 시도하는데, 사람들은 젲가 시도한 데서 웃지 않고 꼭 엉뚱한 데서 웃어요
유머에도 소질이 없나봐요 제가 ㅠㅠ
부러워요 부리님

마노아 2007-10-29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머는, 노력이다! 브라보!! 부리님 짱 멋져요^^

미즈행복 2007-10-30 0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리님보다 어머님께 추천 한 방 꾹~
노력? 흑흑, 마지막 막은 급좌절이예요. 부리님, 미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