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홍구의 글에 반대했으면서 제목은 그 글을 따라서 지었습니다. 그냥 좀 있어 보여서요...

이강돈(가명)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내가 보건원에서 근무할 때 만난 친구다. 안양에 살았고, 반지하였다. 언젠가 비가 좀 왔을 때, 그는 그날 하루종일 물을 퍼냈다고 한다.

연구자로서 그의 능력은 웬만한 교수보다 나았다. 나같은 놈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그는 정말 열심히 일했다. 낡은 차를 몰고 매일 새벽같이 출근했고, 일을 하느라 밤을 샌 건 부지기수다.

그에겐 애가 둘 있었다. 그의 부인은 학습지 교사 일을 했다. 그렇게 벌어도 그는 늘 가난했다. 60만원의 월급을 받으면서도 유유자적했던 나와 달리, 그는 돈 천원에 벌벌 떨었다. 그런 그가 신호위반으로 딱지를 뗀 적이 있다. 3만원인가 하는 벌금을 내느라 그는 "석달 동안 진짜 힘들었다"고 했다. 나는 그가 측은했다. 거기서 3년만 개기면 다른 삶이 펼쳐질 나와 달리, 그는 계속 그런 생활을 해야 했으니까. 한번은 내가 무심코 실언을 했다. "난 공무원이 적성에 안맞아."라고 했던 것. 그가 대답했다. "나도 싫어. 다른 대안이 없으니까 하는 거지."

초과근무수당에 관한 비리 기사를 봤을 때, 내 머리에 떠오른 건 이강돈이었다. 출장비를 아껴서 분유값에 보탠다는 그에게 초과근무수당은 어떤 의미였을까? 공무원 하면 제때 나오는 월급을 받으며 복지부동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대부분의 하급 공무원들은 다 강돈이처럼 살고 있을 거다. 내가 공무원들의 구조적 비리를 무작정 비난할 수 없었던 건, 지금은 뭘 하는지 모를 강돈이 때문이었다.

젊은 시절, 최소한 공보의로 보건원에 근무할 때만큼은 나 역시도 우리의 세금인 초과근무수당이 그네들에게 흘러들어가는 것에 비판적이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정의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산산히 부서지는 모습들을 보면서, 그나마 남아 있던 정의감은 점차 엷어졌다. 악인지 선인지 헷갈릴 잭 스페로우 해적처럼, 세상에는 절대적인 악도 선도 없다고 생각하게 됐다. 결국 난 비리 공무원을 옹호하는 사람이 됐다. 내 글에 대해 분노하는 알라딘 분들의 의견에도 십분 공감한다. 내가 알라딘 내부 사람이 아니었다면 분노의 수위는 훨씬 더 높았을 거다.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다 나처럼 머리가 흐리멍텅해지는 건 아닐 것이다. 문정현, 문규현 신부님은 그 연배에도 치열하게 세상과 싸우고 계시다. FTA 반대를 위해 애쓰시는 가을산님이나 늘 삶의 지표가 되어 주시는 파란여우님을 보면 이렇게 비리공무원을 옹호하는 사람이 돼버린 게 부끄럽다.

그러고보니 얼마 전 경부운하를 비판하는 글을 올린 파란여우님에게 이런 댓글을 남긴 기억이 난다. "그러니까 차라리 박근혜가 낫지 않나요?" 여우님은 기가 막혔는지 이렇게 날 훈계했다. "공주님보다는 차라리 제가 낫지 않나요? 헐헐."

세상 일에 이해못할 일도, 절대악도 없다고 믿으며, 어떻게 되든지 젠장 세상은 굴러간다고 믿게 된 나에 비해 파란여우님은 아직도 소녀같다. 그분은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왜 나만 이렇게 타락한 걸까? 한가지 분명한 건 나처럼 나이들어선 안된다는 것. 나이가 든다고 다 나처럼 된다면, 우리 사회엔 희망이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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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오리 2007-06-12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사람의 의견을 진지하게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제대로 나이 들어가고 있는것 아닌가 생각이 드는데요. 좀 주제넘었나요? ^^;

부리 2007-06-15 18:21   좋아요 0 | URL
뭐 나이든 게 벼슬은 아니겠지요. 제 나이 또래가 갈 수 있는 술집이 줄어드는 게 맘아파요

조선인 2007-06-12 0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부리님처럼 나이 들고 싶은 걸요? 나이가 들수록 아집이 늘어가는 절 보며, 부리님처럼 마음 열고 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게 되었어요. 부리님, 화이팅!

부리 2007-06-15 18:21   좋아요 0 | URL
부끄럽습니다. 글구 전 님이 공무원인 줄 알았다는.....^^

무스탕 2007-06-12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은 사랑을 받고 계신 부리님. 사랑하지 않으면 힐책도 없지요. 요대~~로 건강엔 더 신경쓰시면서 나이먹어 가자구요 ^__^

부리 2007-06-15 18:20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기대만큼 제가 잘 해야 할텐데 그게요.....

2007-06-12 09: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부리 2007-06-15 18:20   좋아요 0 | URL
호호 반가운 댓글이네요. 전 주변에 한다리 건너면 다 공무원들이 있어서 어느 정도 그들 편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가 않더라구요... 님이야말로 힘 내셔야겠군요....! 홧팅.

비로그인 2007-06-12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의 반대말은 악이 아니라 최선이지요.

부리 2007-06-15 18:19   좋아요 0 | URL
미녀의 높임말은 주드라지요^^

비로그인 2007-06-12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굴에 책임을 져야하는 나이가 되어서 그런지 제목이 참 와 닿네요.

부리 2007-06-15 18:19   좋아요 0 | URL
전 제 얼굴에 책임 못져요^^ 눈 작은 건 제가 선택한 게 아니니까요

2007-06-12 09: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부리 2007-06-15 18:1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저야 뭐, 늘 힘이 넘치는걸요^^

2007-06-12 1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부리 2007-06-15 18:18   좋아요 0 | URL
가끔은 글이 감상적이 될 때가 있어요 엊그제가 그런 때였나봐요. 기차에서 김소희 기자의 글을 보는데, 갑자기 변호하고 싶어지더군요.

전호인 2007-06-12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순신 장군의 말이 기억이 납니다. "아직도 내겐 12척(?)의 배가 있다"라는 말 말입니다. 희망의 끈을 놓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그것은 마지막 보루이니까요, 저는 아직도 희망은 있다입니다. 왜냐하면 이땅에는 정의가 살아있기 때문이지요. 다만, 묻혀있고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긴 합니다만.

부리 2007-06-15 18:17   좋아요 0 | URL
희망이란 말,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이군요... 한 2년간 그게 있단 걸 잊고 살았던 것 같네요.....

파란여우 2007-06-12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훈계'라....제가 부리님에게 훈계할 자격이나 위치에 있지는 않지요.
훈계는 아닙니다. 훈계라는 표현을 비롯하여 긍정적인 의미이실지 몰라도
'소녀'라는 표현까지. 비롯하여 저에겐 대단히 불편한 글입니다.
여튼, 앞으로도 잘 지내봅시다.

부리 2007-06-15 18:16   좋아요 0 | URL
치, 님은 불편하셔도 전 제가 편한대로 부를래요!! 소녀여우니임----^^ 잘 지내봐요!

다락방 2007-06-12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엉덩이를 흔들면서, 이렇게 생각하게 하는 글을 쓰시는 부리님이 좋아요.
앞으로도 잘 지내고 싶어요.
:)

2007-06-12 13: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부리 2007-06-15 18:16   좋아요 0 | URL
말씀 감사합니다...

moonnight 2007-06-12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리님처럼 나이들면 성공적인 인생이지요. 저랑도 앞으로 잘 지내요. ^^

부리 2007-06-15 18:16   좋아요 0 | URL
그럼요 님하고는 늘 잘 지내고 싶어요!!

2007-06-12 14: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부리 2007-06-15 18:15   좋아요 0 | URL
2주 후면 윔블던이 열립니다. 그때는 페더러가 절 실망시키는 대신 11번째 타이틀을 차지하면 좋겠어요....

마늘빵 2007-06-12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리님이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글을 썼다는 것만으로도 '부리님처럼' 나이들고 싶습니다.

부리 2007-06-15 18:15   좋아요 0 | URL
흐흐 한꺼번에 열한살 더 먹어 버리시려구요?^^

2007-06-12 16: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부리 2007-06-15 18:14   좋아요 0 | URL
정답이 없는 게 삶이겠지요.... 그냥 자기가 편한대로 사는 거, 그게 제가 추구하는 거랍니다. 늘 좋은 말씀 해주셔서 감사드려요. 사실 저는 그렇게 좋은 사람은 아니어요. 여기서 보여드리는 모습은 제 허상이거나 제가 되고픈 존재일 뿐, 저 자신은 아닐지 모릅니다.... 그게 늘 부담스럽습니다.

Mephistopheles 2007-06-12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나이 들기 싫습니다...가능하다면 오래오래 젊게 살고 싶습니다..

부리 2007-06-15 18:12   좋아요 0 | URL
그래도 뭐, 어쩔 수 없는 게 나이드는 거겠지요. 같이 늙어가는 것도 나름 괜찮지 않을까요^^

2007-06-12 21: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부리 2007-06-15 18:12   좋아요 0 | URL
어 그냥 세상이 좀 짜증스러웠는데요 저야 뭐, 평소에 워낙 잘 사니 조금 있으면 회복될 것 같습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주미힌 2007-06-12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이 그렇죠 뭐... (저도 나이 먹는 중 ) ㅡ..ㅡ;
그래도 정직한 자에게 축복이, 부도적한 자에게는 '똥침'이 있어야 살맛나는 세상아니겠어요... (나이를 거꾸로 먹고 싶은 흐흐)
따지고 보면 정황참작의 사유.. 없는 사람 없을 거에요...
관대함에도 인색함에도 정도가 있어야 된다는 생각이 드네용..

부리 2007-06-15 18:10   좋아요 0 | URL
관대함에도 인색함에도 정도가 있어야 한다는 말, 잘 새기겠습니다
금방 응용하자면 음주에도 정도가 있어야 하는 거죠?^^

2007-06-13 02: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부리 2007-06-15 18:10   좋아요 0 | URL
호홋 저는 그런 오해 안하는데 괜한 걱정하셨군요 앞으로는 친하게 지내요 아셨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