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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1
치누아 아체베 지음, 조규형 옮김 / 민음사 / 2008년 2월
평점 :
이 책은 1958년, 나이지리아 출신으로 BBC에서 일하던 아체베의 첫 작품이며 동시에 2007년 부커상을 타게 한 대표작품이기도 하다. 이 책을 통해 그는 출신 종족인 나이지리아 이보족에게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 일어난, 급격한 서양문물의 유입으로 인한 변화에 대한 연대기적 기록을 남기면서, 또한 당시 독립을 위한 준비를 서두르고 있던 신생 나이지리아를 위한 [독립국으로서의 자아]를 찾아내려는 시도하고 있다.
더 이상 유럽의 역사와 토양에서 자라난, 이식된 세계관이나 지배-피지배의 구도 속에서 강요받는, 지배자들의 이해(利害)와 얽혀있는 타자의 시선이 아닌, 자기 뿌리에 놓인 고대의 문화와 타 문명과의 충돌에서의 실패와 식민지배까지를 포함하는, 자기자신만의 시선을 찾으려는 노력인 것이다. 한편으론 반성도 하고 한편으론 그렇게 자조할 것은 아니라고 위로도 베푸는 이런 자기존중의 시선은 오직 스스로에 대한 철저한 내성이 없이는 주어질 수 없으며 새로운 자아로 출발할 수 있게 하는 가장 중요한 스타팅블럭임을 아체베는 잘 알고 있었다.[그러나 내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가르쳐 줄 수 없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스스로 찾아야 하는 것이다 (아체베 인터뷰 중에서)]
주인공 오콩코는 그래서 신화적 인물도 작가의 피붙이도 아니다. 그는 이보족의 평범한 야심가이며 전시대적 장점과 변화에 대한 거부감을 가진 인물이다. 마치 루쉰의 아Q와 같은듯 다른 듯한 이 인물은 그래서 가장 잘 이보족의 소멸되어버린 부분을 대표하는 인물이며 동시에 스스로 부끄러운 자기자신들 속의 모습이기도 하다.그것은 작가 안에 살아있는 자신에 대한 거북함이며, 동시에 새롭게 입안에 쳐 넣어진 현재에 대한 메스꺼움이다. 이런 인물의 실패를 통해 아체배가 기대한 독자들인 개화된 나이지리아인들은 더 이상 거부도 굴종도 아닌 자기자신의 모습을 지니고 떳떳이 세계의 개활지 속으로 걸어나아가야 함을 느꼈을 것이다.
우리 또한 실패한 과거와 이식된 문화 속을 살아왔고 또 살고 있다. 무척 잘 이 과정을 적응한 케이스인 우리는 남이 가르쳐준 기술로 다시 되팔아먹기도 하고, 남의 스포츠로 일등도 하는 나라가 되었다. 또 한편으로 스스로 비웃어마지 않던 자신의 문화, 풍속, 역사-부끄러하던 김치, 비실용적이라던 한복, 숨기던 수제비, 부대찌게, 떡볶이를 외국인에게 권하는 지경이 되었다. 사실 [우리의 것은 소중한 것이다]라는 말은 많은 의미를 갖는다. 거기서 자라고 영양분을 받고 생각의 틀을 마련한 까닭이다. 또한 여태껏 너무 우리 것을 홀대하고 살도록 압력 받아 왔기 때문에 이제는 소중이 여길 때도 됐다. 우리는 나이지리아보다 여러 유리한 조건으로 이제 정체와 자신감에서 아체배가 그리던 모델과도 같은 나라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는 자신감이 넘친다. 그러면서 우리의 모습은 도리어 우리를 지배하던, 우리를 비웃던 사람들을 닮아가고 있다. 중국사람에 대한 슬쩍 얕보고 싶어하는 마음, 동남아 사람에 대한 동정을 가장한 우월감, 러시아, 동유럽, 남미 국가의 하얀 사람들을 보며 얻어보려는 보상심리들. 우리는 가난할 때 더 좋은 사람들이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는 이웃들에게 예전보다 차갑다. 거리에서 지하철에서 운전에서 바쁘고 서로의 양해 아래 무례하다. 다른 사람들을 나를 위한 부속물로 여기도록 자녀를 기르고 있는 사회다. 교활한 것을 자랑거리로 여긴지 제법됐다. 성적(性的)인 추문을 상대에 대한 또한 자신에 대한 배신이라 여기지 않는다. 뒤쳐진 사람의 추락을 방치하는 사회구조를 고치지 못한채로 또 1년을 보냈다.
Things fall apart; the center cannot hold;
Mere anarchy is loosed upon the world,
The blood-dimmed tide is loosed, and everywhere
The ceremony of innocence is drowned;
The best lack all conviction, while the worst
Are full of passionate intensity.
(The Second Coming, William Butler Yeats)
오콩코가 꿈꾸었던 부족 촌장의 꿈이 자신의 욕심으로 바로 눈 앞에서 산산히 부서진 것은 사실 그 자신의 만족, 자신 밖에 모르는, 다른 사람을 돌보지 않는 이 마음에서 찾았어야 하지 않을까? 나의 우월감으로 타인을 무시하는 사람은 결국 영국인도 오콩코도 우리도, 예이츠의 시처럼 붙잡아주는 중심이 없어 부서져 흩어지는 일만 남은 소용돌이가 아닌가? 우무오피아 여인들이 죽으면서 부르는 노래인 [누구에게 좋다는 것인가, 누구에게 좋다는 것인가, 좋은 사람은 어느 누구도 없다.]는 고통 가운데 살아가야 했던 가난했던 과거의 우리보다는, 이제 인간으로의 존재가 흩어져나가 쓰레기넝마조각으로만 인간성의 치부를 가린채 비인격적 관계와 자살과 성범죄 속을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 부르는 노래인양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