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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과 떨림 쇠얀 키어케고르/ 민음사/ 1991년 4월 |
1843년(30세)의 키에르케고르는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시작으로 많은 책을 집필했다. 같은 해에 집필된 이 책에는 그래서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심미적 단계, 윤리적 단계, 종교적 단계로의 인간구분과, 선택으로서의 믿음의 받아들임에 대한 생각이 그대로 제시되고 있다. 그의 논의의 대상은 아브라함의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사건에 대한 이해이며, 논의의 목적은 철학, 특히 헤겔철학이 종교안에 그 의미를 발견하기 보다는 오바해서 엉뚱한대로 치닫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데 있다.
후에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절망이라 묘사된 인간의 상태를 그는 [무한한 체념]이라 표현한다. 완전히 수행된 무한한 체념은 그래서 구원의 가능성이라는 빛을 어설픈 대체물에서 찾을 수 없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모든 생각의 상투성에 이미 지친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지친 그에게 부조리만이 힘이다. 그렇다고 억지를 부리며 자기 생각이 옳다고 우기는 것이 그 부조리함이라면 얼마나 더 슬픈가? 아브라함은 그의 절망을 받아들이고 또 한 존재를 바라보는 가운데 부조리의 힘을 얻는다. 그분의 성품에 대한 이해와 신뢰가 그로 하여금 체념 다음의 행동을 가능케 한다. 그리고 이 세상의 사람들 눈에 비치는 영웅적 행위와, 맘과 따로인 어설픈 자기변호와, 그랬으면하는 공상적 결말을 뛰어넘게 한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이다. 이삭을 돌려주실줄 알았고, 자신은 설명 못할 줄 알았고, 그 일이 지난 후 잊게 될 줄 알았다. 죽이려 결단하고 설명하려 노력하고, 잊어지지 않아 고통 받는 인간의 나약함에 비해 그는 믿음의 조상이다. 나에게 이 신앙은 어디에 잠자고 있는가? 나는 신앙 안에 있으면서도, 더 나아갈 곳이 없는지 찾는다는 면에서 유럽의 16-19세기의 사람들안에서 동질감을 느낀다. 그래서 찾는 것은 보편성, 즉 설명가능한 우월한 체계이다. 그러나 그 화려한 외관에도 불구하고 그 껍데기 안에 나와 공감하는 영혼은 없다. 악마적 영혼도 공감은 가능한 영적 존재이지만, 그런 영혼을 지향한 것이 아니라 선한 영혼의 아버지를 그 체계를 만들때 분명히 집어넣었는데 막상 완성되고 안을 들여다보면 사라져 버리고 없다. 아니면 썩은내 나는시커먼 놈이 들어있거나... 라이프니쯔, 헤겔, 피히테 그들에게서 나는 나자신을 본다.
키에르케고르는 믿음에 단단히 붙으라고 권한다. 그리고 살아가며 느끼는 불안, 하나님을 나 자신과 관계하여 생각할 때 느끼는 두려움과 떨림의 상태를 그럴듯 설명하여 포장만 그럴싸한 보편성 꾸러미로 만들려 들지 말고, 인격적 절대자 앞에 무릎 꿇으라 권한다. [아 아브라함이여! 위대한 이 사람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과연 나의 나약함과 재빠른 설명하려 듦과 다른 탑을 쌓고 싶어하는 마음은 그 분 앞에서 아브라함처럼 변해갈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