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카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 지음 / 서광사 / 1990년 10월
평점 :
절판


1656년 7월 27일. 유대인들은 재판정에 있던 등불을 하나씩 끔으로써 한 유태인의 정신이 꺼져갔음을 상징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선고하였다.

“천사의 재판과 성자의 판결을 얻어 우리들은 그를 저주하고 추방한다. 거룩한 전 회의는 613개의 교훈이 쓰인 거룩한 책(구약성서와 율법) 앞에서 옛날 엘리사가 어린이를 저주한 그 저주로, 그리고 율법 속에 기록된 모든 저주를 더하여 그를 저주한다.

그는 낮에도 저주를 받아야 하고 밤에도 저주를 받아야 한다. 그가 누워 있을 때도 저주를 받고 깨어 있을 때도 저주를 받아라. 나갈 때도 저주를 받고 들어올 때도 저주를 받아라. 하나님이 절대 그를 용서하지 말기를, 인정도 하지 말기를, 그리고 주의 진노와 주의 불쾌가 영원히 그 위에 임하고 율법에 기록된 모든 저주가 그를 억압하고 이 세상에서 그의 이름을 지워 버리고 말기를, 주께서 그를 이스라엘 온 민족으로부터 끊어 버리시고 율법 속에 있는 모든 저주로 그를 억누르시기를.....

이로써 각자를 훈계하노라. 누구나 입으로 그와 말을 주고받지말고, 글로써 그와 의사를 주고받지 않도록 하라. 그를 돌보지 말라. 아무도 그와 한 지붕 밑에서 살지 말라. 아무도 그가 에르렌거리 근처로 접근하지 않도록 할 것이며, 누구도 그가 입으로 전하거나  글로 쓴 문서를 읽지 말 것이로다.”

17세기 사방이 적대적 비유태인에게 둘러싸인 홀랜드의 유태인에게, 가장 중요한 종교적, 경제적, 철학적 기반인 민족과 친구들에게 저주당한 사람은 바로 Baruch Spinoza이다.(1656년) 20대의 이 슬픔과 고통을 평생 안고 살아간 그는 다른 위로와 목적, 기쁨의 원천을 찾아야했다. [에티카]의 방법론에 해당하는 [지성개선론]에서 그는 덧없고 허망한 것이 인생임을 깨달아, 최고의 기쁨을 향유하는 어떤 것이 존재하는지 찾고자 결심했다고 밝힌다. 이 방법론의 적용이 이 책 [에티카]이다. 1661년(29세)-1675년(43세)에 이 책은 집필되었다. 고통은 철인을 낳았다.

이 책에서 그의 화두는 어떻게 수동감정(파토스)를 조정할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 파토스에 복종하는한 선할 수 없다. 로고스에 따르면 선에 이르며 이것이 진정한 파토스를 극복한 에토스의 단계에 이르는 것이다. 그는 이를 위해 개념을 재정립한다. 그에게  행복하려는  욕구는 [자기존재  유지의  욕구]이다. 선은 자기보존에 도움이 되는 것들이다. 또한, 사랑은 자기보존의 기쁨, 미움은 자기괴멸의 슬픔이다. 그 자신의 파멸과 정신적 죽음의 경험 그리고, 유태인의 독특한 자기유지의 철학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선과 악에 대한 인식이 감정을 억제하려면 인식이 감정으로 인식되어야만 한다고 한다. 맞불이다.그는 사랑과 미움이 동시에 생기면 감정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어 조절할 수 있다고 한다. 조절이라는 면에선 스토아이지만 그에게 방법은 의지가 아닌 이성이다. 감정은 의지가 아닌 이성에 의해 조절된다.그래서 이 이성의 궁극으로 신이 정의된다. 이성적 신의 창조이다. 필요에 의해 정의된 신이며, 감정극복을 통한 자기유지와 확장의 근거가 되는 개념이다. 그래서, 가장 선한 것은 신의 인식이다. 다른 말로 하면 나의 존재유지에 가장 도움이 될 수 있어야 신이다. 1부의 정의에서 그는 이 점을 정의해 보였다.

결국 이성으로 감정을 극복하고 신의 본질에 합하는 완성에 이르면, 신의 본성을 공유하므로 서로 일치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통한다. 이런 노력은 효과가 있는 것이다. 자기의 이익 곧 자기보존은 노력할수록 덕을 입는다고 말한다. 이 때 덕이란 능력, 인간의 본질로부터만 규정 받는 능력이다. virtu는 potentia인 셈인데 이 때 능력은 이성의 힘을 말한다.

일주일 내내 이 사람에 대한 안타까움이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독특한 경험이었다. 개인적 괴로움과 존재파멸의 폐허 위에 자기만의 독특한 세계관-물론 스토아와 스콜라, 데카르트와 홉스의 빛아래이지만-을 세워낸 것이다. 그가 만든 신은 영 아니지만, 그를 충분히 납득할 순 있었다. 서론이며 이해의 열쇠인 [지성 개선론]이 절판된 책을 통해서만  볼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또한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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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04-08-14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해할 수 없는 일 중 하나는 저 유태인들이 무슨 권리로 다른 유태인을 파문할 수 있는가 였습니다. 그들이 전지전능한 하나님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으로부터 권리를 위임받은 천사도 아니면서 같은 인간의 처지에서 위대한 철학자 중 한 사람을 파문했다는 건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죠...결국 인간이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사고나 이익에 위배되는 이는 철저히 버린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답니다...

libertas 2004-09-13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성에 의해서 감정을 정복한다고 한 카를님의 견해를 따른다면 스피노자 철학은 단지 스토아 철학의 아류에 불과할 것이다. 이성은 감정을 정복할 수 없다. 이는 스피노자가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는 바이다. 다만 슬픈 감정을 기쁜 감정으로 전환할 수 있을 따름이다. 스피노자의 철학을 한 파문당한 유태인의 자기 위안이나 감정에 대한 이성의 우월성의 강조로 읽는다면 스피노자의 현대성을 찾을 수는 없을 듯하다....

카를 2004-09-12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바른] 이성에 의한 [좋은] 감정의 창조... 맞불 맞습니다. 오해는 정확히 표현치 않은 제 탓이지요. 의지가 아닌 이성, 억제가 아닌 옳은 정념이 맞습니다. 스토아와의 차이점이지요.
Libertas님이 보시는 스피노자와 제가 일부 의견이 다른 것은 아마도 제게 철학의 원저를 읽는 것이, 나에게 있어서의 perspective를 찾고자 함이지, 스피노자의 현대성이라는 보편적 해답을 찾고자함은 아님 때문인듯 합니다.

카를 2004-09-12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고로, 제 서재에 [절판책 리뷰]에 있는 스피노자의 [지성개선론] 리뷰에 대해서도 좋은 의견 부탁합니다.^^

yamoo 2010-08-02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까지 본 에티카 리뷰 중 단연 최고입니다~ 정말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