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은 소설이 잘 팔리지 않는단다. 직장인들이 사지만 읽지는 않는 경영/경제 서적만 팔리는 눈치다. 그런데 김영하라는 작가는 꽤나 팔리는 것 같다. 경영학을 전공한 이 68년생 작가는 뭔가 셀링포인트를 아는가 보다 싶었다. 후회 없을 거라고 추천한 후배에 말에 따라 한꺼번에 세권의 책을 샀다. 남들에게 신중한 모습으로 비치는 내게 있어서 한번도 접하지 않는 작가의 책을 한꺼번에 세권이나 산다는 것은 처음 있는 경험이었다.

랄랄라하우스, 오빠가 돌아왔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이렇게 세권. 차례로 잡문집, 소설집, 장편소설이다.

사실 요즈음 많이 바쁜데...
바쁠수록 짬짬이 소설읽는 재미가 쏠쏠하다는 것은 익히 아는터라...
일요일을 맞이하야 틈틈이 랄랄라 하우스와 오빠가 돌아왔다의 소설 세편을 읽었다.

랄랄라 하우스는 자신의 미니홈피를 책으로 꾸민 것이다. 즐거운 미니홈피라는 뜻이겠지.
일본 출판계에서는 이런 방식이 꽤나 인기가 있다고 하던데...
김영하의 경우는 소설에서 얻은 인지도를 통해서 잡문집을 내서 경제적 안정을 꾀한 것 같은 느낌이다.
이 책은 이 사람이 가진 작가로서의 대중적 매력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다만 그가 살아가는 방식은 사실 좀 부러웠다.
원하는 취미를 누릴 수 있고, 가고 싶은데 여행다닐 만한 시간과 돈이 있는 것 같아서...
이 잡문집에서 번돈도 그의 취미와 여행경비로 쓰일 법하다.
문학에 대한 챕터를 빼놓고는 그다지 재미난 지 몰랐다.

그나마 재미난 이야기는 미국의 한 여류예술가가 자신이 사진에 찍히는 모습이 언제나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쉬워서 (사진찍히는 것을 의식하게 되고, 자신이 찍기에는 어렵고... 등등의 이유를 공감할 것이다.) 낸 계략이다.

그 계략인 즉, 흥신소에 자신의 일상을 조사해서 사진으로 찍어 오라는 의뢰를 했다는 것. 물론 자신임을 밝히지 않았고, 여인은 일정 기간후에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일상속에서 자연스레 찍힌 사진을 받아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과장된 표정과 몸짓이 없는... 그녀는 그중 잘나온 사진으로 전시회를 열었단다.

그리고 오늘 읽은 오빠가 돌아왔다 의 소설 세편은 꽤나 괜찮았다. 
 

그의 소설 세편은 속도감 있게 읽히고, 유머러스 하다는데서 이시대가 갖추어야 할 소설의 덕목을 두루 지녔음에도 이제 고전이 된 한국소설들의 느낌도 간직하고 있다.  극단적인 소재를 취한다는 점에서 충격적이지만, 사실 그 극단적인 소재는 우리의 일상이다. 가족과 性, 권력 등에 대한 일상적인 가치관을 확대해서 보여주는 방식이랄까?  
 

긴박함을 잃지 않는 구성이나 말하는 이의 시선과 생각이 거침없이 자유롭다는 것도 대단하다.
그래서 그에게 영화판의 손길이 끊이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이은주의 유작인 주홍글씨도 그의 소설 두개가 묶인 것이라고 한다.) 나머지 소설들도 기대가 된다.

아울러 책읽는 즐거움을 한동안 잊고 있었던 내게 기분좋은 습관이 돌아온것 같아 흐믓하다.
위 문장을 김영하의 책으로 표현하면 "랄랄라 하우스로 오빠가 돌아왔다." 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윤리라는 말처럼 고리타분한 느낌의 단어가 또 있을까?

고등학교 때 국민윤리라는 교과목이 있었다. 그냥 철학이라는 이름을 쓰면 어땠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국민윤리 과목에는 철학의 존재론과 인식론과 가치론이 골고루 들어있었다.

물론 그저 철학자들의 깊은 뜻은 모른 채 이름과 단문 구절을 되뇌이는 정도였지만.

 

<환경철학>이라는 제목의 박이문 교수 책을 읽고 있는데, 윤리라는 고리타분해 보이는 것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 있다.

노학자는 벤담의 공리주의와  칸트의 의무주의 윤리학을 대비하여 소개하고 있다.

이 이야기를 듣고는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윤리에 대해서 반추해 볼 수 밖에 없었다.

 

벤담의 공리주의는 윤리적인 선을 인간에게 좋은 것과 동일시 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의 행동의 윤리적 가치를 그것이 인간에게 좋은 것이냐 아니냐는 관점에서 본 도구적 기능에서 찾는다.

어떠한 것, 어떠한 행동도 그 자체로는 윤리적으로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다.

두개의 다른 것이나 다른 행동은 그 중 어느 것이 인간에게 가장 바람직하고 인간을 가장 행복하게 할 수 있고,

어느 것이 그렇지 못한가에 따라 상대적으로 선한 것인가 악한 것인가,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이나를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하략)

 

칸트의 의무주의 윤리는 행동의 결과에는 전혀 상관없이 정언적 언명이라고 이름붙인 행동원칙에

논리적, 이성적으로 일치하는 행동을 지칭한다.

정언적 언명은 결과나 그 밖의 다른 어떤 고려와는 상관없이 그저 해야만 할 일, 다시 말해 의무를 뜻한다.

 

이 두 이론은 서로 정면으로 상반되는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합리적인 윤리규범, 즉 윤리적 가치판단의 원칙을 제안했다는 점에서는 같다.

 

- 환경철학 33~34페이지

 

벤담의 "최대다수의 최대행복"과 칸트의 "인간을 항상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는 두가지 원칙 중

어느 하나라도 작동을 한다면, 우리 시대에는 윤리가 조금이나마 남아 있다고 할 것이다.

남아 있는가?

 

먼저 벤담.

이정전 교수에 따르면 "행복=소비/욕망"이다.

인간에게 행복이란 그것이 어떤 차원이건 욕망과 그 욕망의 해소와 관련이 있다.

우리 사회는 최대 다수가 합리적이고 공평하게 욕망을 해소할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가?

물론 전혀 그렇지 않다.

매슬로우가 제시한 욕망의 피라미드의 가장 밑에 있는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사회적 안전망 따위는 없다.

이 땅에 공기처럼 퍼져있는 신자유주의는 극소수에게 무한대의 행복을 몰아주고, 다수는 그저 그들이 흘리는 찌꺼기를 나누는 구조이다.

그 극소수에 들어가기 위한 무한 경쟁의 사회에서 승자독식하는 구조.

 

이러한 구조에서 칸트?

자신의 욕망을 소비하기 위해서 인간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은 불문가지.

일상의 한 단면에서 "ㅇㅇ는 너무 착해서 안돼~!" 라는 말을 한번 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착하면 되던 시대가 있었다. 윤리가 살아 있던 시대.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남들을 수단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이 가치있던 시대.

자신의 이익만을 취하는 것이 죄악시 되던 시대.

이젠 자신의 적나라한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 솔직함으로 추앙받는 시대가 되었다.

 

우리 시대는 윤리라는 단어는 고리타분하고, 이윤이라는 단어는 고귀한 진리가 되어버렸다.

우습게도 윤리를 뒤집으면 이윤이 된다.

이렇게나 세상도 뒤바뀌었다.

이 뒤바뀐 세상이 내가 우리 시대에 냉소적인 이유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만들어진 신 -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김영사 / 200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만들어진 신. 마지막 몇십페이지에서 미적미적 끝을 보지 못해오다가 마침내 지난 일요일에 다 읽었다. (해를 넘겨 읽었다.)

물론 본문만 575페이지나 되는 이 책의 등은 마치 르브론 제임스의 등짝만큼이나 우람하여,

이웃해 있는 책에 기대지 않고서도 혼자서도 충분히 서 있을 정도이다. 그렇게 오래 읽을만한 분량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내가 미적미적 끝내지 않은 이유는 무의식적으로 이 책을 내 침대 곁에 계속 두고 싶어서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예전에 최인훈의 '광장'이라는 소설을 읽을 때 남아있는 페이지가 줄어드는 것이 아까웠던 기억만큼은 아니었지만...

이 책은 소설이 아니지 않은가? 무려 생물학과 진화심리학을 바탕으로 종교를 비판한 책이란 말이다. 그만큼 이 책은 대단하고, 강렬하다.

 

많은 종교인들은 이 책의 제목을 보고도 기겁을 할 것이다. 불경하게도 감히 <만들어진 신>이라니....! 부르르...

인간이 신을 만들었는가? 신이 인간을 만들었는가?

도킨스는 끝없이 반복되었던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작정하고 풀어낸다. 만들어진 신이라는 단호한 제목아래 말이다.

(물론 영어제목은 The God Delusion으로 더욱 더 과격하다. 원래는 Relusion이라는 말을 쓰려고 했단다. 종교+망상이라는 신조어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특히 기독교인들)은 리처드 도킨스를 '빈정거리는 악마'라고 말할 것 같다.

하지만 진정한 종교인들이라면 평생 한번쯤은 읽어봐야 하는 책임에 분명하다.

지금 이 스테디셀러를 반값에 세일하고 있다. 절호의 기회이다. 나도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도킨스는 흔히 종교의 미덕 혹은 무신론의 악덕이라는 일반적 통념을 차례로 되짚으며 모두 깨부순다. 그것도 산산조각으로.

특유의 빈정거림을 곁들이는데 반박할 수 없겠다 싶은 경우가 많다. 게다가 성경에 대한 지식도 풍부하다.

(옮긴이가 도킨스를 러셀과 비교했는데 나도 옮긴이의 글을 읽기 전에 많은 부분에서 러셀을 떠올렸다.)

 

내 주위에도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많다. 나 역시 고등학교 때 미션스쿨에 다닌 관계로 여러모로 기독교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소위 '믿음이 좋은' 어떤 분은 내게 신앙으로 세상을 살아야지 理性으로 세상을 살아가면 안된다고 말한다.

그 때 나는 신학대학을 나와서 예수전을 쓴 김규항의 블로그에서 본 기막힌 말을 떠올렸다.

 

영성은

합리성의 범주를 넘어서는 것이지

합리성에조차 못 미치는 게 아니다.

 

종교를 가진 사람일수록 과학공부도 열심히하고 합리성에 대한 수련을 게을리 하면 안된다는 생각이다.

그렇게 열심히 믿는 "신"을 웃음거리로 만들 수 있으니까 말이다.

 

솔직히 종교에 대한 반박은 여러차례 접해서 새롭지는 않았다. 그런데... 마지막 도킨스의 부탁은 새롭게 마음에 와 닿는다.

아직 분별심이 적은 어린 아이들에게 종교라는 틀을 빨리 씌우지 말자는 것이다.

그것이 어쩌면 일종의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종교를 갖는 것은 자유다. 믿는 것도 자유다.

하지만 그것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은 맞는 것 같다.

 

책의 자세한 내용은 아래 서평을 참조하길 바란다.

http://blog.naver.com/kksxx12/120094154413

후배가 쓴 서평인데, 꼼꼼하고 보기 쉽게 정리했다. 다소 길지만 원래 책은 575페이지가 아니던가?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 지독한 책을 아예 읽지 않았다면 모르겠거니와, 읽은 후에 반드시 반박을 하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그 반박은 아주 논리정연해야만 한다.

도킨스는 책에서 내내 '그냥 모르는 채로 남겨두고 믿으라고 하는' 태도에 대해서 비난을 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읽지 않았지만 맥그라스라는 성을 가진 부부가 <도킨스 딜루전>을 펴냈다고 하니 참고하기 바란다.

음.... 두 책을 다 읽은 사람들의 서평을 보면 망상이라는 진단은 도킨스보다는 God에 적절하다고 하는 것 같긴하다.

살림 출판사의 책표지는 기막히다. 만들어진 신을 거꾸로 돌려놓았다. 아래와 같이... ㅋ 센스 만점.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웽스북스 2010-03-03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의 물관리를 위해 귀한 육추천을 버리시고 새로 올리신 글이니,
추천 하나 제가 올립니다. ㅎㅎㅎ

동녘새벽 2010-03-03 13:12   좋아요 0 | URL
ㅋ 서재에는 답글 안달려고 했는디....

2010-03-03 1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03 1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연을 쫓는 아이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이미선 옮김 / 열림원 / 200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지나치게 운명이 반복되는 것을 빼 놓고는 정말 훌륭한 명작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1.
자신이 프랑스 국민이라는 사실을 싫어했던 플로베르는 국적을 부여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안했다. 출생지나 선조를 따지지 말고, 자신이 매력을 느끼는 장소를 따지자는 것이었다. (여행의 기술, 136쪽)

자신이 선택할 수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에 대한 불복종은 새롭다. 대체로 이렇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조건에 대해서는 은밀하고 교묘한 강압과 복종의 계략이 숨어있게 마련인데....

예를 들면, 전혀 근거없는 부분에 대해 가해지는 애국심, 화목한 가정에 대한 강요, 때때로 건조한 날씨에 들불처럼 타올라야만 하는 민족에 대한 자긍심, 성별에 따른 행동 역할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 귀스타프 플로베르, 당연한 것을 생각없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세 A+

2.

"나는 나의 활동에 보탬이 되거나 직접적으로 활력을 부여하지 않고 단순히 나를 가르치기만하는 모든 것을 싫어한다."

(여행의 기술, 156쪽)

괴테의 문장을 니체가 인용한 것이란다. 소문난 두 천재들의 입장에 있어서 삶에 의미가 되지 않는 것들을 배우는 것은 정말 따분하기 그지 없는 일이었을테다.

(물론 나나 이 문장에 동감을 하는 다른 사람들이 모두 천재인 것은 아니지만...^^)

니체가 인류의 역사와 문화에서 읽어낸 '초인'의 개념은 현상학적 의미와 영감, 삶을 고양하는 활력으로 가득찬 무한히 확장하는 아름다운 존재일테다.

: 프리드리히 니체, 똑똑하고 비판적이고 성실함 A+

3.

훔볼트의 흥분은 세상을 향해 올바른 질문을 가지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증언해 준다.
(여행의 기술, 168쪽)

1769년 생 훔볼트의 질문은 모던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틀에 박힌 것이긴 하였으되, 그의 호기심에서 발견된 수많은 기록과 해답들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방대한 것들이었다. 전방위에 걸친 이 엄청난 호기심의 量! 존경할만하다.

(훔볼트의 질문방향과 해결방안은 동시대를 살다가신 다산 정약용(1762년생) 선생과 거의 흡사하다. 이에 비하면 두분보다 선배이신 연암 박지원(1737년생) 선생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놀라운 것이 아닐 수 없다.)

때때로 세상을 향한 '올바른' 질문은 커녕 어떤 문제점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들은 반성해야 마땅하다.  

: 알렉산더 폰 훔볼트, 올바른 질문과 호기심, 그 열정 A+

4.

콜리지는 워즈워스의 초기 시들을 돌아보면서, 그 시에 나타난 천재성을 이렇게 규정했다. 일상의 사물에 새로운 매력을 부여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관습적인 무관심에서 벗어나 우리 앞의 세계의 아름다움과 경이를 발견하게 함으로써 초자연적인 것을 만났을 때와 유사한 느낌을 맛보게 하는 것. (여행의 기술, 206쪽)

5.  
숭고함은 우주의 힘, 나이, 크기 앞에서 인간의 약함과 만나는 것이다.  (같은 책, 226쪽)

6.
"맙소사, 어떤 화가들이 그린 그림을 보았는데, 그 그림들은 제재를 전혀 옳게 대접하지 않았더군. 여기에서는 내가 할일이 많아." (같은 책, 258쪽)

 고흐의 말이다. 광기어린 천재로만 여겨졌던 사람들의 천재성 뒤에는 세상에 대한 진지함이 있다. 천재성도 역시 받아들여지는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드러난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에는 완전히 고립된 천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7.
아름다움의 소유에 관하여 라는 챕터 전체 중에 존 러스킨의 생각들 모두. 

"자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데생을 가르치려 한 것이 아니라, 단지 보는 것을 가르치려 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같은 책, 300쪽) 로 대표되는 그의 생각들에 동의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