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라는 말처럼 고리타분한 느낌의 단어가 또 있을까?

고등학교 때 국민윤리라는 교과목이 있었다. 그냥 철학이라는 이름을 쓰면 어땠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국민윤리 과목에는 철학의 존재론과 인식론과 가치론이 골고루 들어있었다.

물론 그저 철학자들의 깊은 뜻은 모른 채 이름과 단문 구절을 되뇌이는 정도였지만.

 

<환경철학>이라는 제목의 박이문 교수 책을 읽고 있는데, 윤리라는 고리타분해 보이는 것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 있다.

노학자는 벤담의 공리주의와  칸트의 의무주의 윤리학을 대비하여 소개하고 있다.

이 이야기를 듣고는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윤리에 대해서 반추해 볼 수 밖에 없었다.

 

벤담의 공리주의는 윤리적인 선을 인간에게 좋은 것과 동일시 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의 행동의 윤리적 가치를 그것이 인간에게 좋은 것이냐 아니냐는 관점에서 본 도구적 기능에서 찾는다.

어떠한 것, 어떠한 행동도 그 자체로는 윤리적으로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다.

두개의 다른 것이나 다른 행동은 그 중 어느 것이 인간에게 가장 바람직하고 인간을 가장 행복하게 할 수 있고,

어느 것이 그렇지 못한가에 따라 상대적으로 선한 것인가 악한 것인가,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이나를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하략)

 

칸트의 의무주의 윤리는 행동의 결과에는 전혀 상관없이 정언적 언명이라고 이름붙인 행동원칙에

논리적, 이성적으로 일치하는 행동을 지칭한다.

정언적 언명은 결과나 그 밖의 다른 어떤 고려와는 상관없이 그저 해야만 할 일, 다시 말해 의무를 뜻한다.

 

이 두 이론은 서로 정면으로 상반되는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합리적인 윤리규범, 즉 윤리적 가치판단의 원칙을 제안했다는 점에서는 같다.

 

- 환경철학 33~34페이지

 

벤담의 "최대다수의 최대행복"과 칸트의 "인간을 항상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는 두가지 원칙 중

어느 하나라도 작동을 한다면, 우리 시대에는 윤리가 조금이나마 남아 있다고 할 것이다.

남아 있는가?

 

먼저 벤담.

이정전 교수에 따르면 "행복=소비/욕망"이다.

인간에게 행복이란 그것이 어떤 차원이건 욕망과 그 욕망의 해소와 관련이 있다.

우리 사회는 최대 다수가 합리적이고 공평하게 욕망을 해소할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가?

물론 전혀 그렇지 않다.

매슬로우가 제시한 욕망의 피라미드의 가장 밑에 있는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사회적 안전망 따위는 없다.

이 땅에 공기처럼 퍼져있는 신자유주의는 극소수에게 무한대의 행복을 몰아주고, 다수는 그저 그들이 흘리는 찌꺼기를 나누는 구조이다.

그 극소수에 들어가기 위한 무한 경쟁의 사회에서 승자독식하는 구조.

 

이러한 구조에서 칸트?

자신의 욕망을 소비하기 위해서 인간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은 불문가지.

일상의 한 단면에서 "ㅇㅇ는 너무 착해서 안돼~!" 라는 말을 한번 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착하면 되던 시대가 있었다. 윤리가 살아 있던 시대.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남들을 수단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이 가치있던 시대.

자신의 이익만을 취하는 것이 죄악시 되던 시대.

이젠 자신의 적나라한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 솔직함으로 추앙받는 시대가 되었다.

 

우리 시대는 윤리라는 단어는 고리타분하고, 이윤이라는 단어는 고귀한 진리가 되어버렸다.

우습게도 윤리를 뒤집으면 이윤이 된다.

이렇게나 세상도 뒤바뀌었다.

이 뒤바뀐 세상이 내가 우리 시대에 냉소적인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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