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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가는 것들 잊혀져가는 것들 - 그때가 더 행복했네 ㅣ 사라져가는 것들 잊혀져가는 것들 1
이호준 지음 / 다할미디어 / 2008년 4월
평점 :
표지 사진속의 다랭이 논둑을, 하늘을 배경삼아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여 굽은 허리에 뒷짐을 지고 걸어가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내 삶에서 사라져 버렸던 옛 추억들을 다시금 퍼올리게 됩니다. 그리고 책장 하나하나를 넘기면서, 이내 내 유년과 청소년기의 생활속에 오롯이 배어있는 잊었던 진한 삶의 향기를 다시금 맡아 보게 됩니다. 거기엔 땀냄새가 짙게 배어있고, 흙냄새와 자연의 냄새만이 고스란히 담겨 있을 뿐이지만, 화장품의 은은한 향기나 향수의 도도한 내음과는 결코 바꿀 수 없는 너무도 소중한 것들임을 깨닫게 됩니다. 어느 순간 내 삶의 한 구석에서 나도 모르게 사라져 버리고, 그러던 어느 순간 내 기억에서 마저 한쪽 구석으로 내팽개쳐진, 그리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데 전혀 도움이라곤 되지 않을듯이 보였던 그것들이, 오늘 이책을 펼쳐들자 고스란히 마음속에 되살아납니다. 그리고는 보이지 않을땐 깨닫지 못했지만, 그것들이 어린시절 내 삶에 묵묵히 쌓여 내 삶의 근간이 되고 기둥이 되어서 지금의 나를 있게 만든 소중한 것들임을 새삼스러이 알게 됩니다.
달 밝은 밤에 수박 한덩이 썰어 놓고 곁에는 모깃불을 놓고 친척들과 함께 둘러앉았던 원두막, 부모님의 손을 잡고 장터에 따라 나섰다가 호미며 낫을 고르는 틈에서 댕강거리며 쇠를 다듬던 대장장이와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화덕의 쇳덩어리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던 대장간, 시퍼렇던 보리밭과 보리된장국, 이웃이 빤히 들여다 보이던 돌담이나 흙담, 가을마다 새로 옷을 입곤하던 초가지붕과 굼벵이들, 봉숭아가 곱게 피던 장독대, 항상 헐렁거리던 검정 고무신과 어린 나를 갈 때마다 속을 썩히던 연탄, 방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던 신기하기 그지없던 재봉틀과 가끔씩 밥(?)주는 것을 잊어버려서 일을 멈추고 선잠을 자고는 하던 괘종시계, 밤을 밝히던 초롱불과 그 빛에 문에 일렁거리던 사람 그림자, 항상 변함없는 반찬과 보리밥이 담겨 있던 누런 양은 도시락 -겨울에는 차가워진 밥을 조각내어 몇번만에 먹나 친구들과 내기하던 기억도 있습니다-, 아버지를 따라 갔던 이발소의 높은 의자와 아이를 앉히던 판자, 그리고 무섭게 생긴 면도날을 가죽에 갈아 뒷마무리를 하던 이발사 아저씨, 어른들은 잘도 하는데 어린 나는 아무리 해도 알곡이 골라지질 않던 키질, 심부름으로 주전자에 받아오던 막걸리를 오는 길에 슬쩍 한모금 했던 기억, 맨날 입석 밖에 타본 적이 없는 완행열차와 시골역의 나무의자, 음악시간을 그래도 음악시간답게 만들어 주었던 풍금, 1년에 한번 가기도 힘들었던 시골극장의 퀘퀘한 내음, 유난히 사납게 달려들어서 항상 쇠줄에 묶여 있던 조그마한 누렁이, 짚으로 정성스럽게 싼 달걀꾸러미.... 저자가 사진에 담고 글로 말한 것들이 모양새는 약간씩 다르지만 그것들이 곧 내가 살고 내 가족이 살고 나의 친구들과 이웃들이 살던 모습이었습니다. 이제는 모두 지나간 것들, 추억속의 것들이 되어버렸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되돌아보면 저자가 말한 것처럼 지금보다도 '그때가 더 행복했네'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잊고 지내던 내 뿌리의 한쪽끝에 다시금 맞닿은 그러한 감상때문일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보다는 더 불편하고 배를 곯던 시절이긴 하였지만 말입니다.
책속에 담긴 이야기와 사진들을 보며, 다시금 그 시절을 떠올리며 감회에 젖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그가 지금은 어떤 사정에 처해 있든지, 마음 한구석은 참으로 따뜻해지고, 위로를 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바로 우리자신들이 웃고 울고, 서로 돕고 나누던 삶이, 저자의 맛갈스러운 글과 사진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의 삶의 어느 순간에 있었을 법한 이야기들 속에 담긴 사라지고 잊혀져 간 것들은 곧 우리가 살던 과거의 분신이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들구요..... 그리고 문득 떠오르는 엉뚱한 생각 하나는, 우리 아이들에게는 지금의 여러가지 것들이 그들이 자라서 되돌아볼 때 쯤이면 지금 내가 아쉬워하는 것들과 같은 모습의 것들이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닌텐도 게임과 아파트, 컴퓨터와 여러 장난감, KTX 기차와 고속도로를 달리던 버스들마저도 아이들이 자라서 되돌아보게 되는 그때는 우리가 지금 기억하는 원두막이나 초가집, 완행열차 등과 같은 마음이 듬뿍담긴 사라져가는 것들이 되어있지 않을까 하는 엉뚱함이 마음속을 비집고 들어옵니다. 결국 시간의 흐름속에서 우리세대의 과거는 아이들에겐 잘 알지못하는 옛날 이야기가 되고, 우리에겐 지금 현대적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이 아이들의 미래에는 사라져가는 아쉬운 것이 되고 그들의 아이들에게는 또 알지 못하는 과거가 되는 것은 아닐는지.... 그런 의미에서는 아이들에게 그것들을 다 남겨주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너무 아쉬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닐는지.... 어찌되었든 내 아이들이 다 알아주지 못하더라도 그것들이 내 마음속에 남아서 내 삶을 살찌우는 것만으로도 난 이리 행복하답니다. 이리 그것들을 잊지 않게 되새겨준 사람이 있고, 책이 있고, 또한 행복을 퍼올릴수 있는 행복한 기억들이 남아 있으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