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농장 펭귄클래식 4
조지 오웰 지음, 최희섭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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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두 개의 목소리가 분노에 차서 소리치고 있었는데, 모두 똑같았다. 그러자 돼지들의 얼굴에 일어났던 변화가 무엇인지 분명해졌다. 밖에 있던 동물들은 돼지에서 인간으로, 인간에서 돼지로, 그리고 다시 돼지에서 인간으로 눈을 돌렸지만, 이미 어느 것이 돼지의 얼굴이고 어느 것이 인간의 얼굴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위대한 동물들의 농장을 이루어 완성했다고 선언한 혁명의 말미를 장식하는 결론적인 모습입니다. 자신들을 착취하던 인간을 몰아내고, 자신들만의 세상을 이루어가고자 했던 동물들이 창밖에서 들여다보는 혁명 지도부였던 돼지들의 모습입니다. 투쟁과 거부의 대상이었던 인간들을 초대해 함께 식사를 하고 술을 마셔대는 것부터-아니 이전에 그들의 혁명을 간구하던 정신은 이미 말살된지 오래지요-가 그러한 혁명의 소멸과 타락을 이야기하는 것이겠지만, 돼지들-지도부-은 인간들과 똑같이 이제는 착취와 속임과 억압의 주체가 되어서 나머지 동물들을 이용해 먹는 또다른 종류의 인간이 되어버리는 이러한 결론은 결국 혁명과 변혁의 역사와 지도자들에 대한 따끔한 일침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 다른 한편으로 창밖에서 지도부인 돼지들을 바라보는 동물들의 입장에서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어쩌면 아직 제대로 시작되지도 않은 혁명, 배반되지 않을 꿈에 대한 길고도 험난한 새로운 시작을 말하고 싶은 고뇌에 찬 자기 반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장원농장의 동물들에게 어느 날, 생산은 하지 않고 자신들을 이용하여 생산한 것들을 빼앗아 소비하는 인간의 압제와 폭정을 벗어나 동물들이 자유를 누리고 자신의 생산물을 적절하게 이용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꾸고 자각하라는 수퇘지 메이저 영감의 연설이 울려 퍼집니다. 영감이 꿈속에서 보았다던 그 내용은 바로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요, 무지를 일깨우는 한줄기 빛이 됩니다. 돼지들은 혁명을 위한 조직을 꾸리고, 교육을 시작하고, 순수한 혁명을 위한 동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힘을 모은 동물들은 의외로 어렵지 않게 인간들을 몰아내고 농장을 차지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혁명의 시작일 뿐, 완전한 혁명의 완성을 바랐지만 결국은 변절과 반역으로 점철되는 지난한 배반의 시간이 이후로 펼쳐집니다. 인간들의 재탈환을 위한 침입을 막아내고, 인간없이 스스로 농장을 일구어가기 위한 노동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동물들은 자신들의 세상에 대한 꿈을 부여잡고 묵묵히 혁명을 지지하고 견디어 갑니다. 하지만, 인간사가 대부분 그렇듯이 혁명의 변절은 내부의 분열과 구성원-특히 지도부-의 타락과 변절에서 시작됩니다. 나폴레옹에 의한 권력의 장악과 스노볼의 축출과 반동으로의 추락, 돼지들의 특권화와 일반동물로부터의 분리를 통해서 그러한 변절과 타락의 역사가 동물농장 내부에서도 진행됩니다. 처음 혁명을 시작하고 동물농장을 시작했을 때 내걸었던 7계명이 지도부의 편의에 의해서 슬그머니 고쳐지고 동물들에게 교육을 통해서 세뇌시키는 행위가 반복되는 과정은 바로 혁명의 변절, 권력을 가지게 된 자들의 변절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인간들의 숙소를 폐쇄하면서 '어떤 동물도 침대에서 자면 안 된다'고 했던 계명이 돼지들을 구분하여 숙소를 인간들의 숙소로 옮기면서 '어떤 동물도 침대에서 침대보를 깔고 자면 안 된다'로 남몰래 바뀌고, 술을 마시고 휘청거리던 지도부는 '어떤 동물도 술을 마시면 안 된다'는 계명을 '어떤 동물도 너무 많은 술을 마시면 안 된다'로 슬그머니 바꾸어 놓습니다. 또한 '어떤 동물도 다른 동물을 죽이면 안 된다'던 계명은 나폴레옹의 권력강화를 위한 숙청의 과정에서 많은 동물들을 처형하게 되었을 때는 '어떤 동물도 이유없이 다른 동물을 죽이면 안 된다'로 고쳐지고, '두발로 걷는 자는 누구든 적이다'는 계명은 돼지들이 두발로 걷기를 연습하기 시작하면서는 '네발은 좋고, 두발은 더 좋다!'는 찬양가로 바뀌게 되고,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는 계명에는 사족이 붙어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보다 더욱 평등하다'는 궤변이 덧붙여집니다. 지도자 나폴레옹은 동지가 아닌 '우리의 지도자 나폴레옹 동무'가 되어버렸고,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서 혁명의 이름으로 다른 동물들의 목숨을 파리 죽이듯 다루기도 하고, 돼지들은 다른 동물과 구별된 존재로서 특권을 누리며, 인간과 다름없이 다른 동물들을 착취하고 이용하여 자신들의 삶을 지탱하는, 혁명으로 극복해야 했던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압제자가 되어버린 모습으로 우화는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이미 알려졌듯이 이 우화의 내용은 러시아 혁명으로 이루고자 했던 이상적 사회주의 세계에 대한 스탈린과 그의 부하들의 배반에 대한 통렬한 비꼼과 비판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저자의 의도도 상당부분 거기에 맞추어져 있었던 듯 합니다. 정당한 사회주의 운동이 살아나기 위해서는 소비에트 신화를 무너뜨리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고 우크라이나 판의 서문에 말하고 있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에도 여전히 이 우화속에 담긴 비판 의식과 일깨움이 많은 이들의 마음 속에 동감을 일으키고, 반성과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다는 자각을 불러 일으키는 이유는 크고 작은 우리의 삶 속에 존재하는 이러한 변명과 변절의 역사에 대한 기억때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꼭 혁명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매번 변화와 개혁을 외치던 우리 주변의 많은 이들이 결국은 우화속의 돼지들이 걸었던 길과 똑같은 길을 반복했던 것에 대한 기억, 그리고 그들이 변화와 개혁의 원칙을 왜곡하거나 수정할 때마다 슬그머니 동원했던 변명과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뇌까렸던 화려한 수사에 대한 기억들이 이 우화를 통해서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재연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결국 당시에는 스탈린에 대한 비판의 깃발을 내걸었을 이 내용이 이리 생명력을 가지고 우리 곁에 고전으로 남아있는 것은, 시간을 거듭하면서 변화는 인간의 역사속에서도 여전히 반복해서 발생하고 있는 나와 우리 사회, 우리 나라와 지구상의 여러 국가의 생생한 현실을 담은 이야기라는 사실에 있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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