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나고 자란 분들이 송당리의 오름에 데리고 가주지 않았더라면, 보목포구에서 자리물회와 한라산 소주를 사주지 않았더라면, 제주시에 사는 분들이 운동삼아(!) 오르내리는 사라봉 별도봉에서 보는 제주항 풍경이 얼마나 멋진지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버찌를 닮은 '삼동'이라는 까만 나무열매를 맛보게 해주고, 산록도로 주변 어디에 산딸기가 지천인지 가르쳐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나도 제주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런데 대부분의 제주 여행 책은 육지에서 나고 자란 여행작가들의 손으로 쓰였기 때문에 제주의 넓고 깊은 속사정을 조곤조곤 얘기해주기보다는 제주를 여행지로 며칠 훑고 지나갈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목적에 충실하다. 물론 이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나는 석 달에 한 번은 제주의 바람을 콧구멍에 넣고 와야 도시에서 견딜 수 있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거꾸로 일 년에 한두 번만 서울 바람을 쐬면 되도록 삶을 바꿔볼 생각이다.) 나는 왜 제주에 가면 외할머니 댁이나 이모 댁에 가는 것보다 마음이 편하고 좋을까. 저런 사람과 이웃이 되면 좋겠다, 하는 분들을 많이 만난 탓일 텐데 왜 유독 제주에 그런 사람이 많았을까... 를 이 책을 보면서 조금 짐작할 수 있었다.
"여기 소개하는 음식점들의 대부분은 제주 사람들 사이에서 모르는 이가 거의 없을 만큼 유명한 곳들이다. 이곳들 중에는 제주도의 적은 인구수에도 불구하고 식사를 하려면 줄을 서야 하는 곳이 많은데 특이하게도 일요일은 영업을 하지 않는다든지 영업시간이 짧기도 하다. 주변의 서울 친구들은 그렇게 장사가 잘되면 휴일도 없이 하루 종일 장사를 해야 되는 거 아니냐 묻기도 했었지만 바로 그게 제주도 사람들이다." (256쪽 '제주 여행법 속 맛있는 여행' 가운데서)
"가끔 TV 에서는 남보다 몇 시간 일찍 일어나고 몇 시간 늦게 자는 부지런으로 성공을 했다는 사람들의 인터뷰가 거창한 배경음악과 함께 나올 때가 있다. 제주도에서 가족들이나 친구들과 그런 장면을 보고 있다면 분명히 누군가는 이렇게 얘기할 것이다. '야, 저렇게까지 할 거면 성공 안하고 말겠다.' 이런 것이 제주도 사람들의 성공을 바라보는 쿨한 소견이다. 제주도는 정말 다행히도 아직까지는 너무 잘 사는 사람도, 너무 못사는 사람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다행인지 불행인지 다른 사람보다 더 성공해야지, 더 노력해야지 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그저 주어진 만큼에 만족하고 지금보다 조금만 더 나은 내일이면 된다. 집주소만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고 모두가 성공을 위해 치이면서 달리는 서울에 살고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항상 제주도가 그립다." (330쪽, '섬 사람 이야기' 가운데서)
이 책을 쓴 홍창모 씨는 제주 출신의 디자이너다. "매번 갈 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맞이하는 섬의 진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고 하는데, 정말이지 재미난 이야기가 많았다. 제주 사람들이 산책하고 운동하는 공원(이런 데를 가보면 정말 작고 예쁘다. 한적하고. 최고다.), 관광객이 잘 찾지 않는 피서지, 시장, 바다가 보이는 동네 목욕탕 ... 334쪽의 적지 않은 책에는 마치 오래전부터 그 동네를 알고 지내던 사람처럼 제주를 여행할 수 있는 고급의 정보가 가득하다.
읽으면서 깔깔 웃었던 대목이 있는데, 바로 제주의 응원전 이야기다.
북한의 카드 섹션을 연상케하는 제주 학생 축구리그 백호기 응원전 얘기다. 축구부가 없는 고등학교를 나온 친구는 군대 얘기에 끼지 못하는 여자들만큼이나 소외되어 술만 마신다고. 나도 말만 좀 들었지 이렇게 사진과 함께 제대로 된(?) 설명을 듣고 나니까 내년 3월에는 일부러 이 응원전을 보러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건 삼다수 이야기.
저자는 삼다수를 마시지 않는다. 나도 이 책을 읽고 가끔씩 사서 마시던 삼다수를 아예 끊었다. (사먹는 물 가운데서는 삼다수가 가장 맛있기는 한데... ) 이유를 간단히 얘기하자면, 물이 귀한 제주에서 지하에 곤히 저장되어 있는 용천수를 이렇게 내다 팔면 뒷감당을 어찌 하려는지 모르겠다는 것. 물이 귀한 섬의 물을 판매하는 곳은 전세계에서 제주도밖에 없다고 한다. 게다가 골프장의 잔디를 위해 엄청난 양의 지하수를 쓰고 있는 데다 농약 때문에 지하수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고 말이다. 선조들이 어려운 환경을 이기며 고이 저장해둔 자원을 함부로 돈과 바꾸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저자의 바람인데, 아아 육지에 있는 우리는 어쩌자고 강바닥을 파대는 것인지... 왜 우리는 이렇게 당연한 바람을 어렵게 지켜가며 살아야 하는 신세인지... ㅠㅠ
<제주 여행법>은 흔한 관광지가 싫은 여행자, 제주에서 한 달 이상 살아보고 싶은 사람, 난 이제 더이상 제주에선 볼 게 없는 거 같아! 하며 자만하고 있는 콧대 높은 친구에게 권해주고 싶은 책이다. 제주 출신 친구 하나를 둔 것 같이 마음 든든하게 해주는 좋은 여행책. 서귀포 쪽의 유명한 관광지 이야기도 물론 있지만, 옛날 북제주군 쪽과 제주시 쪽의 숨은 명소들을 잘 알려준다는 것이 장점이다.
단, 이 책에는 숙소 정보가 하나도 없고 결정적으로 지도가 그닥 친절하지 않다. 제주시권 / 제주 서쪽 / 제주 동쪽 / 서귀포시 권 등 네 부분으로 나누어 서술했고 책 말미에 간단한 지도 + 모델 여행코스가 붙어 있어서 실용적인 측면도 고려한 것으로 보이기는 한다. 지명만 대도 어디에 붙어 있는지 째깍 알아채는 '고급' 제주도 여행자라면 모르겠지만, 산방산이 어느 쪽이야? 협재 해수욕장은 제주시에 있나 서귀포에 있나? 하는 것이 헷갈리는 초중급 여행자에게는 아무래도 추천하기 망설여진다. 하지만 제주의 삶을 구석구석 들여다보고 싶은 사람에겐 참 좋은 책이고, 여행 정보 측면에서 가장 좋았던 건 무엇보다 음식점 정보다. (여기서 언급된 집들은 정말 무시무시하게 맛있는 집들임. '대화동 신선생'이라 불리는 무자격 요리사 또치가 보장합니다.)
제주 토박이가 쓴 책으로 빼놓을 수 없는 건 (사)제주올레 이사장 서명숙 씨가 제주올레에 대해 쓴 두권의 책.
단순히 제주올레가 생겨난 이야기뿐 아니라, 서귀포에서 나고 자란 저자의 체험이 맛깔나게 녹아 있어 좋다. <제주 여행법>에서 제주시 사람들의 삶을 엿보고, 서명숙 씨의 책에서 서귀포의 이야기를 듣는다면 제주에 대해 완벽한 공부가 될 것 같다.
제주올레가 처음 생겼을 때부터, 새 코스 개장 행사가 있으면 내려가서 단체로도 걸어보고, 행사에 참여 못하면 사람들 북적이기 전에 얼른 걸어봐야지! 하면서 서둘러 내려가곤 했다. (헤헤, 그래서 ,<놀멍 쉬멍 걸으멍...> 어딘가에는 내 뒤통수가 나온 사진도 실려 있다 ^^ )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한 달에 한 코스씩 개장을 하니까 10 코스 이후로는 따라잡지를 못하고 있다.
<꼬닥꼬닥 걸어가는...>이 출간되고 나서 바로 사서 보았고, 비행기표를 끊었다. 3월 어느날, 챙겨야 할 결혼식이 있는 것도 까먹고 충동적으로 내려간 이후로 한 번도 못 가서 몸이 달아 있던 참엔데 이 책을 읽었으니... 9월초라도 오후에 기온이 좀 높다 싶으면 바다에 몸을 담가도 괜찮은 곳이 제주다. 김녕 해수욕장에서 요트 투어를 할 생각인데, 돌고래를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요트 투어 회사 홈페이지에 가보니 돌고래 씨가 "180회 가운데 123회 출현"했다신다 ㅋㅋ ) 어쨌든 배에서 내리면 바닷속에 최소한 무릎까지는 담가 보리라. 그리고 14-1 코스인 무릉 곶자왈 구간을 꼭 걸어보리라. 책에 소개된 '제1회 올레걷기축제'는 홈페이지가 열리자마자 참가신청을 해놓았다. 11월초다. 그렇다. 이 두 책은 정신없이 '제주 지름신'을 부른다. 부디 조심하시길.
다음에는 제주에 와서 살아가는 육지 것들(제주 사람들이 외지인을 부르는 말 ^^)이 쓴 책들에 대해 얘기해볼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