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네 1집 - 압생트
루네 노래 / 스톤뮤직엔터테인먼트(Stone Music Ent.) / 200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흐를 만나러 네덜란드 여행을 처음 갔을 때, 시내의 큰 슈퍼마켓에서 나는 "압생트 한병 주세요"라고 당당히(!) 주문했다. 고흐가 마시곤 했다는 독주, 압생트. 나도 한번 맛보고 싶었다. (나도 보드카는 좀 마신다규~)

그런데 주문을 받은 아저씨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더니 "어따 쓰려고 그러는데?" 하는 투의 질문을 던지는 거다.  

"어... 고흐가 마셨다는 술이라 기념품으로 사 가려고요." 했더니 으하하 막 웃으면서 아저씨는 나를 타일렀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데, 너무 독한 술이라 거의 위험물질 취급이라고 하는 요지의 말이었던 것 같다. 자기네 가게에는 그래서 없다고. 아, 그... 그렇습니까 ;;

루네(LUNE)라는 여성 싱어송라이터의 첫번째 앨범 이름이 바로 그 <압생트>다. 불현듯 그때의 생각이 났다. 얼마나 독한 음악이기에 이런 타이틀을 붙였을까. 호기심을 자극하는 거울 이미지의 재킷 사진도 마음을 끌어서 들어보니...  

가슴이 서늘해지도록 좋았다.  

사실, 요 며칠 마음이 좀 그렇다. 내가 외롭고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존재, 그 외로움과 삶의 무게를 덜어낼 사람은 결국 나 자신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어딘가에 좀 기대고 싶고 내 인생의 일부분을 덜어내 누군가에게 의탁하고 싶은 마음은 잘 사라지지가 않는다. 최후의 순간에 마음을 뉘고 싶다고 생각했던 사람으로부터, "내가 도와줄게"라는 빈말을 듣는 게 좋은 건지, "당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건 결국 당신이지" 하는 솔직하고 냉정한 판단을 듣는 게 나은 건지 잘 모르겠다. 수많은 입발린 달콤한 말들에 실망하고 지쳤으면서도, 막상 진실을 똑바로 대면하자니 두렵고 힘들다. (이 노래를 듣기 전에 계속 언니네 이발관의 <아름다운 것>을 신물이 날 정도로 무한반복 청취중이었다. 슬픔이 나를 데려가... 데려가...)

루네의 노래에서 PJ Harvey 나 Bjork 같은 마녀(실례...) 류의 여성가수를 떠올릴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대뜸 한영애가 떠올랐다. 아무리 높은 음을 불러도 저음으로 들리는 독특한 음색도 그렇고, 짙은 그늘이 드리워진 가사도 그렇고, 내면으로 깊이 침잠하면서도 결국은 바닥을 치고 둥~ 떠오르는 힘있는 노래 스타일도 그렇고... 반갑고도 기뻤다. 한영애 언니가 새 앨범을 내지 않은 지도 꽤 오래 되었는데, 이제 7년 넘게 해오던 EBS 라디오 <문화 한 페이지>도 책장이 접혀 버렸으니 새 노래 만들고 계시지 않을까 살짝 기대도 되는데 말이지...  

요즘 나오는 가수들 혹은 밴드들의 노래에서 과거세대의 잔상을 쉽게 떠올릴 수 있어서 새삼 기쁘다. 뭐, 내가 오래 산 건 아니지만, 누군가 힘들여 이루어놓은 성과들이라는 것이 그냥 아무것도 아닌 걸로 흘려 버려지는 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에 조금 안도가 된달까...  

마셔 보진 못했지만 압생트처럼 독할 듯한, 오스트리아에서 마셔본 '시납스'라는 술처럼 달고 찐득하고 독한, 자기 내면을 온통 다 털어내고 헤집고 난 뒤에 비로소 남들에게 보여주고 들려줄 수 있는, 상처를 위로해주는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낸 루네에게 공감과 감사를 보내고 싶다.  

울고 싶을 때 뺨 때려주는 음악 목록에 루네의 음반을 집어넣는다. 

 


댓글(5) 먼댓글(1)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루네 - 유리날개
    from 필유홈2.0 2009-07-04 15:44 
    얼마 전 일다 뉴스레터를 통해 루네(Lune)와, [압생트(Absinthe)](2009)라는 데뷔 앨범을 알게 됐다. 일다 원문은 병적 슬픔을 환상적으로 노래하다. 일단 유투브에서 찾은 음원을 하나 올린다. #4 유리날개. 가사는 네이버 아이템 팩토리. 미안하지만, 가사만 놓고 보면 크게 와닿는 게 없었다. 앨범의 다른 곡들도 마찬가지. 하지만 앨범을 통으로 걸고 듣다 보면 돌연 마음을 파고드는 순간이 있는데, 다소 사로잡는 맛은 부족하나마 보석 같..
 
 
치니 2009-03-30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저도 네덜란드에서 고흐박물관 갔었어요! 괜히 막 반가움.
2. 얼마전 서울전자음악단과 신중현 선생님이 함께 공연할 때, 한영애씨도 게스트로 나와서 노래하셨던 걸 봤어요. 여전하시던데요. ^-^

또치 2009-03-30 14:59   좋아요 0 | URL
우와~~ 서울전자음악단이랑 신중현 선생님이 같이 공연하는 걸 보셨다니!! ㅠㅠ 부러움에 몸을 부르르 떨 지경입니다. 게다가 게스트는 한영애 언니!! 크아왕~~~

무해한모리군 2009-03-30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악 바로 땡투 날립니다.
비오는 날은 한영애나 양희은씨 목소리를 들으며 술을 먹어야 한다는 ㅎㅎ

또치 2009-03-30 20:32   좋아요 0 | URL
우앙~~ 감사합니다!!
제가 상태로 좀 메롱...인 채로 듣고 써서, 맑은 정신으로 들으면 또 어떨지 모르겠네요 ^^;; 내일은 저도 좀 상쾌한 마음으로 들어보고 싶습니다.


lecteur 2009-04-11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고 싶을 때 뺨 때려주는 음악이라니... 정말 근사하네요. 저도 한번 사서 들어볼까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