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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문학과지성 시인선 276
진은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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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1

소금 그릇에서 나왔으나 짠맛을 알지 못했다
절여진 생선도 조려놓은 과일도 아니었다
누구의 입맛에도 맞지 않았고
서성거렸다. 꽃이 지는 시간을
빗방울과 빗방울 사이를
가랑비에 젖은 자들은 옷을 벗어두고 떠났다
사이만을 돌아다녔으므로
나는 젖지 않았다 서성거리며
언제나 가뭄이었다
물속에서 젖지 않고
불속에서도 타오르지 않는 자
짙은 어둠에 잠겨 누우면
온몸은 하나의 커다란 귓바퀴가 되었다

쓰다 버린 종이들이
바람에 펄럭이며 날아다니는 소리를
밤새 들었다

-38쪽

그림 일기

그런 날이면 창백한 물고기에게 황금빛 수의를
땅이 내준 길만 따라 흐르는 작은 강물에게 거미의 다
리를
무엇에 차이기 전에는 아무 데도 가지 못하는 돌멩이
에게 이쁜 날개를
한 번도 땅의 가슴을 만져본 적 없는 하늘에게 부드러
운 손가락을
높은 곳에서 떨어져본 마음을
더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마음 받아주는 두 팔을
높은 곳에 올라가기 전에
네 곁으로 가는 다리를
그러나 높은 곳에서 떨어져 이미 삐뚤어진 입술을
그 입술의 미세한 떨림을

떨림이 전하지 못하는 신음을
크게 그려줘 내 몸에 곱게 새겨줘
그런 날이면 망친 그림을
잘못 그려진 나를 구기지 말아줘 버리지 말아줘
잘못 그려진 나에게 두껍게 밤을 칠해줘
칼자국도 무섭지 않아 대못도, 동전 모서리도, 그런
날이면 새로 생긴 흉터에서 밑그림 반짝이는 그런 날
-42-43쪽

어제

나는 너를 잊었다. 태양이 너무 빛났다
내 집 유리창이 녹아버린다. 벽들이 흘러 내리고
시간의 계곡으로 나는 내려가고 싶다

어릴 적에는 어제를 데려다 키우고 싶었다
오 귀여운 강아지, 강아지들, 내
가 굶겨 죽인 수백만 마리

강철 종이의 포크레인으로
어제들의 거대한 공동묘지를 뒤집을까?
오늘 혼자 부르는 노래는 지겹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을 명명한다. 베껴 쓰기의 시간이
돌아왔다고

플라톤을 베낀다 마르크스를 베낀다 국가와 혁명을
베낀다
무엇을 할 것인가 베낀다
어떤 목소리는 바위처럼 단단하고
어떤 목소리는 바위에 떨어지는 빗물 같다

오늘의 메마른 곳에 떨어진
어제라는 차가운 물방울

무수한 어제들의 브리콜라주로 오늘의 화판을 메워야
한다
태양이 너무 빛났다. 어제와 장미 향기가 다 증발하기
전에
너를 그려야 한다-52-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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