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빈에 대하여>

 

We need to talk about Kevin

영화 포스터의 힘이란 얼마나 대단한가. 아름다운 몸의 남자가 공중에 붕 떠 있는 포스터만 보고 구미엔 상영관이 없어 대번에 대구 CGV로 달려가신 분이 계신가 하면, 틸다 스윈튼의 행복해 보이지 않는 얼굴만 보고 아무런 사전 정보도 없이 이 영화를 선택한 나 같은 이도 있다.

 

이 불친절한 영화 속 시간은 뒤죽박죽 흐른다. 흐른다는 표현이 맞기나 할지. 주인공 에바의 현재 속에 과거가 불쑥, 불쑥, 끼어드는 형국이다. 작은 여행사에서 서류정리를 하는 수척하고, 남루하고, 넋이 반쯤은 나간 에바 사이로, 당차고 아름다운 여행작가 에바가 등장하고, 소년원에 수감되어 있는 무표정한 케빈 사이로, 끊임없이 엄마의 눈치를 살피는 어린 케빈이 등장한다.

 

이들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났기에 이들의 시간은 흐르지 못하고, 엉망으로 섞이고 엉키어, 보는 이를 불안에 떨게 하는가. 왜 화면은 이다지도 붉은 빛으로 가득차 일렁이고, 왜 음악은 이렇게도 화면의 분위기랑 어울리지 않는가. 그러면서도 이들이 하고 싶어하는 말은 어쩌면 이렇게도 음악에 잘 녹아져 있는가. 이것은 어떤 영화인가.

 

자유분방한 여행작가 에바는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된다. 임신과 함께 그녀의 모든 일상은 아이 케빈에게 바쳐진다. 케빈은, 모든 아이가 그렇듯 태어난 순간부터 운다. 울고, 울고 또 운다. 막 태어난 아기 케빈에게 막 엄마가 된 에바는 엄마로서의 모든 의무를 다하고 싶지만, 케빈은 에바의 뜻대로 자라주지 않고, 참다 못한 에바는 어느 순간 이렇게 말하고 만다.

“난 네가 태어나기 전에 더 행복했어. 너도 알지?”

 

알 리가 있겠는가. 자신이 태어나기 전의 행복했던 엄마를.

케빈이 본 엄마는, 일에는 당당하지만 자신에게는 늘 조심스럽고, 조바심치고, 가르치려 들고,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한숨 쉬고, 마음으로 다가오기보다 그저 의무를 다하는 것 같을 뿐이다. 그래서 엄마를 보는 케빈의 눈빛은 언제나 적대감으로 가득하고, 일부러 엄마의 화를 돋우려 자극적인 행동을 한다.

 

그렇게 자라서 케빈은 괴물이 되고 만다. 케빈이 저지른 엄청난 사건 앞에, 에바는 거리를 걷다 모르는 여자에게 뺨을 맞아도 아무 항변을 하지 못하고, 장을 보다가 아는 사람을 보게 되면 숨어버리고, 누군가 집에 뿌려 놓은 붉은 페인트를 지우고 또 지운다. 손에서 붉은 페인트가 가실 날이 없다. 그리고 끊임없이 과거의 자신과 케빈을 생각한다. 어디서부터가 잘못이었을까. 나는 어떤 엄마였던가. 케빈은 어떤 아이였던가.

 

에바와 케빈의 가장 따뜻했던 기억은, 아픈 케빈에게 에바가 로빈훗을 읽어줄 때였다. 케빈은 아주 흥미로워하며 엄마의 품에 안겨 이야기를 듣고, 에바는 그런 케빈의 이마에 입을 맞춰 준다. 그리고 이런 음악이 흘러 나온다.

 

사랑하는 엄마가 이런 말씀을 하신 그 날을 잊을 수 없어라

“지금에야 하는 말이지만 넌 항상 이 엄마의 기쁨이었단다”

 

케빈이 선물 받은 장난감 활과 화살을 들고 엄마가 있는 주방 쪽을 향해 화살을 날리는 순간 그 음악은 다시 흘러 나온다. 영화를 끝까지 보고 다시 보니, 그 순간과 이 음악의 조합이 소름끼친다.

 

선정적인 장면도, 잔혹한 장면도 그닥 없는 이 영화가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을 달고 개봉한 이유를 알 만 하다. 영화 전편에 흐르는 이 불길함과 일렁이는 붉은 빛은 웬만한 내공으로는 참아내기 힘들다. 그럼에도 묘하게 끌려 몇 번이나 다시 보게 하는 힘은, 틸다 스위튼과 에즈라 밀러의 연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들은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을까 하는 안타까움. 피해자와 그 가족들에 대해서는 늘 함께 아파했지만, 가해자의 가족들에 대해서는 어땠는가 하는 자각까지. 영화의 원제는 We need to talk about Kevin and his mother로 바꾸는 게 낫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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