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소음
줄리언 반스 지음, 송은주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는 쇼스타코비치의 왈츠를 좋아했다. 하루 종일, 하루치 삶을 살아내느라 힘들었던 몸을 쇼스타코비치의 왈츠가 흐르는 방안에 부려놓으면, 몸은 고단을 잠시 잊고 마음은 우울을 잠시 잊었었다.

 

춤곡이지만 어딘가 무겁고 어두운 이 곡을 우리는 아주 사랑했다. 우리 둘 중 하나가 무심코 콧노래로 흥얼거리면, 다른 하나가 따라 부르다 결국 CD를 플레이어 위에 얹고, 각자의 일을 하던 그 밤들. 그 밤들이 눈물겹게 그립다.

 

"그가 무엇으로 시대의 소음과 맞설 수 있었을까? 우리 안에 있는 그 음악 -우리 존재의 음악- 누군가에 의해 진짜 음악으로 바뀌는 음악. 시대의 소음을 떠내려 보낼 수 있을 만큼 강하고 진실하고 순수하다면, 수십 년에 걸쳐 역사의 속삼임으로 바뀌는 그런 음악.“ p.181

 

시대의 소음을 견디게 한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이, 어둠의 시간을 지나 우리의 아픔을 어루만져주기까지 그의 삶의 궤적을 나는 한번도 더듬어 본 적이 없었다. 러시아의 작곡가라고만 알고 있어서 문화적으로 풍성했던 러시아, 그러니까 톨스토이나 도스트옙스키와 같은 시대의 인물이겠거니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았던 것이다.

 

“인구 중에서 필요한 만큼은 죽여 없애고 나머지에게는 선전과 공포를 먹이면 그 결과로 낙관주의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p.105)

“1932년 당이 독립 조직들을 해산하고 모든 문화적 문제를 맡게 되면서..

모든 작곡가는 국가에 고용되었으므로..

작곡가는 탄광 광부처럼 생산량을 늘려야만 했고..

관료들은 다른 범주의 생산량을 평가하듯 음악 생산량을 평가했다.“ (p.42~43 부분)

 

이런 ‘낙관적인’ 소비에트에서 쇼스타코비치는 음악 신동으로 첫 발을 내딛고, 평생 동안 최고 음악가로서의 명예를 누렸지만, 사실은 체포와 숙청의 공포 속에서 불면의 밤을 보내야 했다. 왜냐하면, 그의 오페라 작품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관람하던 스탈린 동무가 공연을 끝까지 보지도 않고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 그는 밤마다 모든 옷을 갖춰 있고, 여행용 가방을 싸 둔 다음, 승강기 옆에서 밤을 지새우곤 했다. 당의 요원들은 언제나 한밤중에 반역자들을 체포하러 왔고, 그는 가족들에게 자신이 끌려 나가는 모습을 보이기가 싫었던 것이다. 그는 친구들에게 “그들이 내 양손을 자른다 해도 나는 입에 펜을 물고서라도 작곡을 계속할 것”이라고 호언했지만 곧 깨닫게 된다.

 

“스탈린의 러시아에는 이 사이에 펜을 물고 작곡을 하는 작곡가 따위는 없었다. 이제부터는 두 가지 종류의 작곡가만 있게 될 것이다. 겁에 질린 채 살아 있는 작곡가들과, 죽은 작곡가들.” p. 75

 

“그는 남은 용기를 모두 자기 음악에, 비겁함은 자신의 삶에 쏟았다.” p.226

 

그래서 그는 살아남았다. 브레히트처럼. 자신을 미워하며.

 

“영혼은 셋 중 한 가지 방식으로 파괴될 수 있다. 남들이 당신에게 한 짓으로, 남들이 당신으로 하여금 하게 만든 짓으로, 당신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한 짓으로. 셋 중 어느 것이든 한 가지만으로도 충분하다. 세 가지가 다 있다면 그 결과는 거부할 수 없는 것이 되겠지만.” p.239

 

“어쩌면 언젠가는 파시즘과 공산주의가 교과서 속의 말에 불과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때에도 여전히 가치가 있다면-여전히 들어줄 귀가 있다면-그의 음악은......그냥 음악이 될 것이다. 작곡가가 바랄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전부였다.” p.257

 

오늘도 지친 몸을 방에 부려놓으며 쇼스타코비치의 왈츠를 듣는다. 저음역대가 좋은 스피커 대신, 노트북 스피커로 유튜브의 영상을 찾아 들으니 소리가 영 뾰족하고 불편하다. 함께 듣던 CD는 그애가 가져가서 없고, 함께 듣던 그애도 이제 즈이 가족들과 지내느라 여기 없다.

 

고단했던 하루를 얘기하고, 좀 더 나을 내일을 꿈꾸고, 읽고 있는 문장이나 보고 있는 그림을 나누며, 도란도란 하루를 마감했던 동지들이 하나 둘 떠난 둥지를, 아직도 남아 꿋꿋이 지키며 나는 혼자 쇼스타코비치의 왈츠를 듣는다. 그의 어두운 표정과 이 구슬픈 춤곡이 과연 그럴만했구나, 혼자 고개 끄덕이며. 옆에 누군가가 있다면 얘기해 주고 싶어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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