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느님은 참 괴상한 방식으로 공평해. 사랑이 있는 쪽에선 사람을 빼앗고, 사람이 있는 쪽에서는 사랑을 빼앗아 가고.” p.358

 

사랑하는 아빠를 잃은 아이와, 증오하는 아빠에게서 도망쳐 나온 아이와의 대화이다. 이만큼 살아도 세상이 불공평한 것만 같은 나는, 열다섯 이 아이들의 얘기에 딴은 그렇기도 하다고 고개를 주억거린다. 세상은 괴상한 방식으로 공평하기도 하지, 그래.

그 아이들의 이야기에 밤 깊어가는 줄을 모르고, 390쪽을 단숨에 읽어내린다.

 

엄마가 신혼여행을 간 사이, 지명수배중인 ‘친구의 운동권 형’을 도와주러 어려운 길을 나선 준호와, 부자 아빠와 별나빠진 엄마의 이상한 양육방식에서 도망쳐 나온 승주와,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인간을 피해 집을 나온 정아와, 정체를 알 수 없는 할아버지 하나와, 덩치가 치타만 하고 사납기는 맹수만 한 도베르만 한 마리의 좌충우돌 여행기인 이 소설은, 청소년문학을 표방하고 있지만 한때 청소년이었던 모든 이들이 읽기에 더없이 적절하다.

 

“개장수는 개처럼 다리를 털어 바지 솔기에 낀 불알을 빼낸 뒤 뻗정다리를 끌며 멀어져 갔다.”p.29

 

나는 이처럼 중년 남자의 바짓속 사정을 디테일하게 그려 놓은 문장은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정말 유쾌하지 않은가, 이런 청소년 문학.

정규리그가 시작되기 전 집중적으로 가지는 합숙훈련을 말하는 “스프링캠프”, 이 스프링캠프를 거친 후 이 아이들이 어떤 어른이 되었는지, 후일담도 고마웠다.

어쩌다보니 거꾸로 읽게 되는 정유정의 작품들에 나는 자꾸만 감탄하고, 자꾸만 고맙고 있다. 책을 빌려준 나영이게도 고맙다.

 

 

2.

 

"나는 웃지를 않았다.

 

처음에는 그저 발달이 조금 느린 거려니 했다. 하지만 육아책에는 아기들이 생후 삼일이면 웃기 시작한다고 쓰여 있었다. 엄마는 손을 꼽아 날짜를 세어 보았다. 백 일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p.21

 

놀란 엄마가 병원에서 받은 아이의 병명은 “감정 표현 불능증”. 편도체의 크기가 작은 데다 뇌 변연계와 전두엽 사이의 접촉이 원활하지 못해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하고, 사람들의 감정을 잘 읽지 못하고, 감정의 이름들을 헷갈리”게 되는 병이다.

 

잘 웃지 않는다는 것 외에는 그저 얌전하고 조용한 아이로 여겨졌던 아이는 여섯 살 무렵, 한 학생이 구타당하는 것을 보게 된다. 피해 학생이 죽음에 이른 엄청난 폭력사건을 목격했음에도 목격담을 전하는 아이의 표정은 평안 그 자체여서, 사건을 처음 전달 받은 동네 어른은 사건의 심각성을 파악하지 못해 초기 대응에 실패한다. 그래서 살릴 수도 있었던 학생은 죽고, 죽은 학생의 아빠였던 그 동네 어른은 아이를 탓하며 ‘네가 조금만 더 진지하게 말했다면 늦지 않았을 거다.’라고 절규한다.

 

아이는 한순간에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무서운 아이로 낙인찍히고, 엄마는 느끼지 못한다면 배울 수밖에 없다며 아이에게 감정 표현법을 가르친다. 어떤 경우에 어떤 인사를 해야 하고, 어떤 경우에 어떤 말로 미안함과 감사함을 표해야 하는지, 어떤 경우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 상대방의 표정에 따라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에 대해.

 

“내겐 기쁨도 슬픔도 사랑도 두려움도 희미하다. 감정이라는 단어도, 공감이라는 말도 내게는 그저 막연한 활자에 불과하다.” p.27

 

“부모는 자식에게 많은 걸 바란단다. 그러다 안 되면 평범함을 바라지. 그게 기본적인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말이다, 평범하다는 건 사실 가장 이루기 어려운 가치란다.” p.81

 

모든 감정이 활자에 불과하던 아이는, 인간은 교육의 산물이라는 믿음아래 불철주야 감정에 대해 가르치던 엄마 덕에 그럭저럭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살아갈 수 있게 된다. 비교적 평범하게. 엄마가 미처 가르치지 못한, 엄청난 감정의 표현을 해야 할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

 

“사흘간의 장례 내내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는 나를 두고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다양한 추측을 하며 속닥거렸다. 너무 충격을 받아서 그럴 거야. 아직 어리니 뭘 알겠어. 엄마도 죽은 거나 다름없고 이제 고아나 마찬가진데 실감이 안 나니 저러지. 남들은 내게 슬픔이나 외로움, 막막함을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안에는 감정 대신 질문들이 떠나니고 있었다.” p.58

 

혼자 남은 아이의 나날이 눈물겨워지려는 순간, 2부가 시작되고 이야기는 사뭇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윤재에게,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존재가 생기는 것이다. 그들의 아슬아슬한 관계 맺기는 아, 이 책이 청소년 문학이었지 하고 새삼 고개를 끄덕이게 하며 또 다른 재미를 안겨준다.

 

아래의 문장은 엄마가 남긴 헌책방을 꾸려가는 아이의 말이다.

 

"할멈의 표현대로라면, 책방은 수천수만 명의 작가가 산 사람, 죽은 사람 구분 없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인구 밀도 높은 곳이다. 그러나 책들은 조용하다. 펼치기 전까진 죽어 있다가 펼치는 순간부터 이야기를 쏟아 낸다. 조곤조곤, 딱 내가 원하는 만큼만.“ p.118

 

이 밤, 내가 딱 원하는 만큼만 내게 이야기를 쏟아 내 줄, 다른 친구를 만나러 나는 이만 내려간다. 책상 아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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