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의 아홉 가지 단점
조은수 지음 / 만만한책방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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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동안 네 권의 책을 번갈아 읽었다. <책만 보는 바보>의 표현대로라면 “책과 내 마음이 오가고 있는 공간은, 온 우주를 다 담고 있다 할 만큼 드넓고도 신비로웠다”라 할 만하다.

 

우선 나는, 한 달쯤 전부터 1960년대 케냐의 가난한 시골 일모로그에 몸을 담고 있다. 계속되는 가뭄으로 가축들은 말라죽어 가고, 어른들은 무기력하다. 그 시골마을에 돌연 활기를 불어 넣어준 외지인들은 가난한 그 마을 사람들과 함께, 그들의 처지를 알리고, 항의하기 위해 도시로 길을 떠난다. 그 여정에서 헐떡이다가 (690쪽 중 390쪽까지 왔다) 홍으로부터 받은 두 권의 책 중 한 권을 펴들었다. “하나는 선물이고, 하나는 읽고 반납.”

 

반납해야 할 책을 먼저 시작한다. 아프리카의 살인적인 더위와 굶주림에 지쳐 있다가 1700년대 프랑스 귀족들의 사회로 순간, 옮겨 앉는다. 일모로그 주민의 삶이 생존을 위한 것이라면 이들의 삶은 쾌락을 위한 것이다. 일모로그의 그들은 투쟁을 위해 노래하고, 프랑스의 이들은 사랑을 위해 편지를 쓴다. 이 관능적인 편지글들은 묘한 흡입력으로 단숨에 휘리릭 책장을 넘기게 하나, 쾌락을 좇고 영혼의 타락을 이야기하는 그들에게 점점 지쳐가고, 마침 눈도 침침해 온다. 그래서 잠시 바깥 바람 좀 쐴 겸 주문한 책을 찾으러 삼일문고로 향했다.

 

먼저, 지하에 들러 읽다만 그래픽 노블을 펴든다. 1800년대 지옥과도 같은 런던 뒷골목에서 벌어진 연쇄살인사건을 다룬 이 (만화)책은 크기와 내용과 무게가 어마어마하다. 그 묵직한 내용의 큰 축은 인간 이상의 무엇이 되고 싶은, 가진 자들의 횡포와 잔인함이다. 작은 글씨, 어두운 조명, 거친 그림체, 인간 같지 않은 인간들의 잔인함에 읽어 나가기가 힘이 들지만, 그래도 읽어 나가게 하는 힘이 대단한 책이다. 사장님이 재미가 있느냐 물으시는데, 물론이다. 영화까지 챙겨서 예습까지 다시 하고 간 상태다. 이제, 범행이 밝혀지는 순간만 남았다.

 

그 날 삼일에서 사 온 세 권의 책 중, 내가 주문한 건 바로 이 책이다.

<톨스토이의 아홉 가지 단점>

서설이 길었지만 이 글은 사실 이 책에 대한 리뷰이다.

일상적인 상황이었다면 그저 ‘조금 재미있다’, 했을 텐데 지금 접한 독서 환경이 이 책을 더없이 귀하고 고마운 책으로 만든 거다.

 

너무 많이 가져서 부끄러웠던 톨스토이는 여든 둘의 나이로 가출을 감행한다.

 

“러시아 곳곳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추위와 배고픔으로 고통 받고, 목숨까지 잃고 있어요. 그런데 이 나라는 귀족들만 배부르게 먹고 화려하게 살고 있소. 이런 세상은 잘못된 거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당하고 있어요. 우리는 이제 함께 잘 사는 새로운 공동체를 세워 나가야 하오.” p.32

 

그래서 톨스토이는 농민들에게 자신의 땅을 나눠주고, 자신이 쓴 책들을 가난한 농민들이 공짜로 읽을 수 있게 유언장을 고친 뒤 집을 떠난다. 저 가난한 케냐의 시골마을을, 저 타락과 향락에 젖은 프랑스의 귀족사회를, 저 지옥 같은 런던의 뒷골목을 헤매다가 만난, 이런 톨스토이라니. 약간의 도덕적 흠은 치열하게 산 흔적 정도로 생각하는 현재의 우리 실정에 비추더라도 톨스토이의 이러한 이념은 고결하다.

 

“난 드디어 집을 나와서 홀로 거렁뱅이가 되었다. 드디어 가장 진실한 내가 된 거야. 그동안 힘들여 쌓아 올린 명성도 재물도 없고, 가족도 없는 벌거벗은 나 혼자가 된 거야.” p.105

 

평생 힘들여 쌓아 올린 명성과, 재물과, 추종자들에 둘러싸인 생활을 버리고 톨스토이는 홀로 되어 생을 마감한다. 우리는 행복한 노년을 위해 건강 관리를 하고, 일을 해서 저축을 하고, 부지런히 친구를 만나러 다니는데, 이 고결한 어른은 그런 것들에서 그렇게 벗어나고자 한 거다. 그러곤 비밀 일기장에 이런 고민을 남긴다.

 

톨스토이의 아홉 가지 단점

첫 번째 단점, 결정을 잘 내리지 못한다.

두 번째 단점, 이치에 어둡다.

세 번째 단점, 마음이 잘 변한다

네 번째 단점,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다섯 번째 단점, 성격이 밝지 못하다.

여섯 번째 단점, 자기 자신을 속인다.

일곱 번째 단점, 거짓말을 한다.

여덟 번째 단점, 조급하게 생각한다.

아홉 번째 단점, 남을 잘 따라한다.

 

“러시아에는 두 개의 권력이 있다고 하잖아요. 하나는 차르 정부와 또 하나는 톨스토이.”

p.83

 

러시아 최고의 권력이라 불렸던 톨스토이의 고민이, 나와 크게 다르지 않으니 뭔가 위로 받는 기분이다. 게다가, 잘 생기고, 세련되고, 작품도 자신보다 훨씬 일찍 인정받았던 투르게네프에게 시기와 질투를 느껴 절교 편지를 보내기까지 했다니, 평범한 계집아이들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투르게네프에게 절교 편지를 보냈다네. 투르게네프가 너무 세속적이라서 절교한다는 편지를. 사실 나는 속으로 너무 질투가 나서 그런 거였는데, 감쪽같이 거짓말을 한 거지.” p.113

 

20대 초반에 언니의 책으로 <안나 까레니나>와 <전쟁과 평화>를 읽었으나, 기억에 남는 거라곤 안나 까레니나와 브론스키, 레빈 같은 이름들 뿐이다. 그나마 <안나 까레니나>는 읽은 기억과 메모한 흔적이라도 있지, <전쟁과 평화>는 책을 읽기는 했는지, 표지만 보곤 다 읽었다고 생각하는 건지 알 길이 없다. 언젠가는 다시 읽어야겠다고 마음은 먹지만, 읽고 싶은 책들이 산더미라 그 언젠가가 언제가 될런지는 기약이 없다.

 

드넓고도 신비로운 우주를 헤매다 현실로 돌아왔다. 1700년대의 프랑스 귀족 사회는 홍에게로 돌아가고, 런던의 뒷골목은 거기 서점에, 케냐의 시골마을과 아이같은 톨스토이는 내 책상 위에 고이 누워 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이냐, 네가 나를 펼치기 전까지 나는 네게 아무 것도 아니었다, 라 말하며. 이제 네가 나를 속속들이 봤으니 이제 나는 네게 무엇이 되었느냐, 물으며.

 

아이의 얼굴을 하고 찾아 온 대가의 진심어린 목소리에 나는,

거칠고 공정치 못한 세상을 그래도 살만하다 생각하고,

스스로의 졸렬함에 실망해 자책하던 날들을 위무받는다.

 

마침내, 비가 비답게 쏟아진 아름다운 일요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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