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모임에서 읽을 책으로 선정되어서 <이민자들>을 다시 읽다가 나비 잡는 남자, 나보코프에 대해 정리해보았다.


p.25-6. 나보코프 사진?


p. 58. 파울 베라이터는 공원에서 나보코프의 자서전을 읽는 란다우 부인에게 말을 건다. 

나보코프의 자서전 <말하라, 기억이여> Speak, Memory



제발트는 나보코프의 자서전을 직접적으로 인용한 걸로 보인다.


<이민자들> p.210~214를 읽어 보면 막스 페르버가 스위스 몽트뢰로 여행간 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 막스 페르버는 1943년에 맨체스터에 왔고, 여기 온 지 이십이년이 흘렀다고 말한 시점에서 2년 전에 여행을 떠났다.

이민자 나보코프는 1961년에 몽트뢰로 이주했고 이것이 너무나 정확한 일치여서 좀 더 찾아보았고, 이 문제를 다룬 논문을 찾을 수 있었다.



이타카, 몽트뢰, 키싱엔은 모두 이민자 나보코프가 머물던 장소.


나보코프는 이타카, 몽트뢰, 키싱엔에 <이민자들>의 인물들과 비슷한 시기에 머물렀다.


소설 속에선 나보코프라고 언급되진 않고 나비 잡는 남자로 나온다. 시기 상으로는 막스 페르버의 어머니가 키싱엔에서 마주친 나비 잡는 남자가 가장 먼저이다. 두 번째는 암브로스 아델바이트가 머무는 이타카의 정신병원, 나보코프는 1940년대에 50년대에 미국에 머문다. 그 후 마지막 장소가 막스 페르버가 방문한 몽트뢰이다.


관련 논문

https://www1.cmc.edu/pages/faculty/LdelaDurantaye/nabokov_in_sebald.pdf


p.131/146. 이타카. This same Ithaca to which Ambros now retreats was where, a few years earlier, Nabokov, having recently emigrated to the US, revised the memoir that would become Speak, Memory.



p.220. 막스 페르버는 몽트뢰의 산에서 죽음 충동을 느끼는데, 나비 잡는 남자가 지금쯤은 산에서 내려가야 한다며 그를 구해준다. As noted in connection to the preceding tale in The Emigrants , in 1965, Montreux’s Palace Hotel housed Vladimir Nabokov and his wife (the couple had moved there in 1961 and were to remain there until Nabokov’s death in 1977). One of the reasons Nabokov chose the locale was for ease of access to fi ne butterfl y-hunting areas



p. 271-2. 키싱엔 장면에서 "러시아 초대 의회의 의장인 무롬체프"란 표현이 그대로 인용된 것이 인상적이다. In Speak, Memory , Nabokov relates: “Near a sign NACH BODENLAUBE, at Bad Kissingen, Bavaria, just as I was about to join for a long walk my father and majestic old Muromtsev (who, four years before, in 1906, had been President of the fi rst Russian Parliament), the latter turned his marble head toward me, a vulnerable boy of eleven, and said with his famous solemnity: ‘Come with us by all means, but do not chase butterfl ies, child. It spoils the rhythm of the walk.’ ” 



나비학자 나보코프의 책

https://blog.aladin.co.kr/mramor/108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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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에 나오는 '제인'의 말을 작가의 관점으로 읽어도 좋을까? <오만과 편견>과 <에마>에 제인이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각각 어려움을 겪지만 인물의 됨됨이는 꽤나 긍정적으로 그려진다. <에마>의 제인은 주인공 에마와 가까운 사이는 아니어서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 <오만과 편견>의 제인은 주인공 엘리자베스의 언니이다. 가족 구성원 중 가장 가깝게 지내는 언니. 제인은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타인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한다. <오만과 편견>에서 가장 '나쁜 놈'으로 나오는 위컴에 대한 진실이 밝혀졌을 때에도, "그녀는 오해가 있을 가능성을 입증하려고 진지하게 애썼다."(p.287) "착하고 한결같이 순수한 심성을 지닌 그녀는 언제든 정상참작의 여지나 오류 가능성을 강조하는 편이었다."(p.184) 


  이러한 태도가 너무도 지속적으로 언급돼서 나중엔 희극적으로 느껴졌다. 아무리 나쁘고 어리석은 사람이 나타나더라도 그 사람을 최대한 호의적으로 바라보려 노력하는 제인. <위대한 개츠비>의 첫 부분에서 화자의 아버지가 해준 조언에 부합하는 태도이다. 제인과 같은 태도를 갖기 힘든 이유는 어딘가에서 다른 누군가에게 받은 상처가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에도 기억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이러한 상처가 있어. 너를 처음 보지만 그래도 너를 못 믿겠어." 우리 앞에 나타난 새로운 사람이 억울할 수도 있겠다. "나는 네 기억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야." 제인의 태도는 다아시에게는 성공하고 위컴에게는 실패한다. 다아시는 처음에 평판이 안좋다가 좋은 사람으로 밝혀지고, 위컴은 괜찮은 사람으로 여겨지다가 최악의 '나쁜 놈'이란 진실이 드러난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읽기 전에 상상한 제인 오스틴 소설 속 주인공은 좀 더 지혜로운 모습이었다. <에마>를 읽고 <오만과 편견>을 다시 읽으면서, 제인 오스틴 소설의 주인공(엘리자베스와 에마)이 완전하게 지혜로운 인물들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엘리자베스가 완전하게 지혜롭고 신처럼 상대방의 생각을 읽을 수 있어서 아무런 오해도 안했다면, 아무런 갈등도 없었을 것이고 장편 소설이 될 수도 없었다. 에마가 아무런 허영심 없이 자기가 누구를 사랑하는지 알았다면, 그 사람에게 바로 사랑한다고 말하고 소설이 한순간에 끝나버렸을지도. 


  엘리자베스나 에마는 처음에 뭔가 오해하거나 누구를 사랑하는지 몰라서 안 좋은 길로 빠진다. 하지만 오해를 하더라도 <오이디푸스왕>처럼 파국을 맞으면서 깨달음을 얻진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오해했던 사람을 다시 만나면서 "내가 저 사람을 잘못 봤구나"라는 깨달음을 얻고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또는 내가 저 사람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줄 몰랐는데, 이러저러한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는 와중에 저 사람은 아직도 저 자리에 서있고 그 사람이 갑자기 멋있어 보이고 "내가 저 사람을 사랑하는 구나"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오만과 편견>의 리디아와 위컴처럼 아예 잘못된 길로 빠진 게 아니라면, 한 사람이 선의를 가지고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지닌 채로 삶을 살아간다면, '시간'이 해결해 줄 수도 있다. 물론 시간 속의 '내'가 해결해야겠지만. (하지만 이런 질문도 남는다. 그런데 리디아와 위컴은 어떻게 되는 걸까? 내가 리디아나 위컴일 가능성은?) 


  조금의 지혜로움이라도 견지하기가 위태롭다. 리디아, 위컴, 베넷 부인, 콜린스 그래서 소설 속 많은 사람들과 내가 어리석은 채로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순식간에 잊어버릴지도 모르지만 어떤 태도를 지녀야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정도는 배울 수 있었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누군가를 만나 사랑에 빠져야 로맨스 소설의 제대로 된 독자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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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근처 채석장 반대 현수막을 보면서 문득 문지의 '채석장' 시리즈 생각이 났다. 물론 '억까'하고 싶지 않다. 채석장 시리즈를 읽을 의향도 있다. 하지만 저 비유적 표현이 쉽게 허용된 이유를 생각해보게 된다.


한겨레 기사에선 채석장 시리즈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문학과지성사가 새 인문사회 문고판 시리즈를 시작했다. 이 시리즈엔 ‘채석장’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마르크스의 <자본>을 영화화하려던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의 미완의 프로젝트에 훗날 알렉산더 클루게가 ‘상상의 채석장’이란 이름을 붙인 것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시리즈 이름이 암시하듯 수록하는 텍스트들은 잘 세공된 완성품보다는 투박하고 거친 원석 조각들에 가깝다. 정련된 에세이나 논문으로 거듭나기 전 사유의 파편을 모아놓은 창작 메모나 연구노트 정도라고 할까.>


소개글엔 도시에 건물 짓기 위해 돌을 캐가는 행위를 말하고 있진 않다. 작가들이 써놓은 메모 형식의 글을 보석을 만드는 원석에 비유한다. 독자는 채석장에서 작가가 써놓은 원석을 캐낸다.


출판사가 있는 도시에선 채석장도, 반대 현수막도 볼 일이 없다. 현실의 채석장은 산을 깎아서 만드는 장소다. 나무를 없애고 먼지를 일으키고 덤프트럭이 다니게 되면서 주변 주민들은 피해를 본다. 


이미 많은 집들을 다른 방식으로 재분배하지 않는 한, 지방 어딘가에서 밭에 있는 모래를 캐내고 산을 깎아서 돌도 얻어야 한다. 아파트를 영원히 짓기 위해서.


녹색평론에도 짧게 소개된 적이 있는데, 이번 정부에서 전국에 산업단지를 짓는다고 많은 산과 언덕들을 민둥산으로 만들었다(산업단지는 지역 균형발전을 위해 전국 모든 도 지역에서 선정되었다). 녹색평론에 언급된 산업단지는 충청도 쪽에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우리 집 근처에도 산업단지 예정지가 있다. 길에서 매일 민둥산(몇 년 전에 깎였다)을 보게 되면서 저 산이 저렇게 쉽게 아무런 관심도 없이 파괴되는 이유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4대강 사업의 반대 여론과 비교해보면 허무할 정도로 아무런 관심이 없다. 지역 주민들은 땅값이 오르고 보상도 해주기 때문에 반기는 분위기이기도 하다.


채석장이나 산업단지로 예정된 산과 언덕에는 '이름'이 없다. 4대강 사업에 그렇게 많은 반대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영산강', '낙동강', '남한강'이라는 이름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어떤 생물에게 '이름'을 붙여주면서 우리는 '성원권'을 부여하고 그 대상을 소중히 여기게 된다(<사람, 장소, 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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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오랫동안 안 쓴다고 글 쓰는 법을 잊지는 않겠지만 영영 글을 안 쓰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최근에 읽었던 좋은 문장들을 옮겨본다. "그래요? 하지만 내가 희망하지 않는다면 왜 글을 쓸까요?" <쇼스타코비치는 어떻게 내 정신을 바꾸었는가> 154쪽에 소개된 베케트의 말이다. 희망이 사라진다면 영영 글을 쓰지 않을 수도 있다. 자존감이 많이 낮아져서 그런지 내가 쓴 글보다 종량제 봉투에 담긴 쓰레기가 나를 더 잘 보여주지 않나라는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된다(쓰레기는 내 생활을 보여준다)

  "실제 구원의 순간은 살아있는 타인이 우리를 보고 이해하고 아직 우리가 구조받을 가치가 있다는 신호를 보내줄 때에야 비로소 다가오는 것이다."(173쪽) 이 문장을 읽을 때쯤 9월에 끝난 수업에서 봤던 분들과 만나게 되어서 공감이 갔다. 어떤 분이 먼저 연락을 주셨다. 최근에 자주 생각하는 도식, '바깥의 햇빛=타인의 눈길<->실내의 어둠=나르시즘'. 지금 살고 있는 곳 옆에 건물이 있어서 방에 햇빛이 들지 않는다. 아침에 햇빛이 들면 잠에서 깰텐데 그렇지 않아서 생활 패턴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몇 개월 전 코로나 때문에 도서관이 닫고 수업도 취소됐을 때 외부의 자극이 많이 사라졌다. 외부의 자극에 반응해야 살아있게 되는데 코로나 감염 우려로 만남과 외출을 자제하게 되었다.

  "키츠는 인간이 '초조하게 사실과 이성을 갈구하지 않고서 불확실성, 불가사의, 의심 속에 깃들 수 있을' 때 가장 창조적이라고 생각했다."(113쪽) 이 문장은 책에서 가장 좋았던 문장, 실천하기 쉽지 않은 내용이지만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다. 



  어제 다 읽은 <런던 거리 헤매기> 중에서 '위인들의 집'이라는 글에서도 키츠가 나온다. 그 중 두 문장. "여기 창가의 의자에 앉아서 그는 미동도 없이 귀를 기울였다. 흠칫 놀라는 일 없이 보았고 그의 시간이 아주 짧았어도 서두르지 않고 페이지를 넘겼다."(102쪽) 키츠는 26년간 살았다.

  "시행 한두 개를 잘라내어 마음속 깊은 곳에 펼치고는 그것이 화려한 날개를 활짝 펴고 푸른 물 속에서 다채로운 물고기처럼 헤엄치게한다."(76쪽) 책에서 가장 좋았던 문장.



  "운명이 침묵하려 할 때는 운명에게 말하라고 강요해서는 안 되고 다가올 일에 귀 기울여야 한다."(60쪽) 로베르트 무질의 <세 여인>에는 세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그 중 '포르투갈 여인'에 나오는 문장이다. 알듯 모를 듯한 말이지만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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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도서관에서 <문학과 사회> 2020년 여름호에 실린, 김현 평론가의 30주기 대담을 재미있게 읽었다. 김현 평론가의 인간적인 모습을 그려서다. 대담에서는 김현 평론가와 인연이 있던 평론가, 연구자, 번역가 들이 과거 김현 평론가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회상한다. 김현은 후배나 동료 연구자, 그리고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무슨무슨 글을 써보라고 또는 번역해보라고 자주 권했다고 한다. 그것은 사람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라고 대담자들은 회상한다. '반포치킨'에 동료들을 불러 매일 술을 마시며 문학 이야기를 하는 것은 (결국 그의 건강을 해치지만) 김현에게 꼭 필요한 일이었다.

 

  '문지 에크리' 시리즈의 첫 번째 책 <사라짐, 맺힘>은 김현의 오래된 책들에는 접근하기 어려웠던 내가 처음으로 읽은 김현의 글이었다(수업에서 조금 읽었던 김윤식, 김현의 <한국문학사>를 제외하고). 1장 <두꺼운 삶과 얇은 삶>은 책의 다른 곳에서보다 한국의 현실을 많이 다뤄서 좋았다. 1장의 표제작 <두꺼운 삶과 얇은 삶>은 반포와 여의도의 아파트 생활이 어떠했는지를 다룬다. 반포의 '소택지'를 메워서 지은 스물두 평짜리 아파트에 청약이 당첨되어서 입주한 김현은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느끼는 아파트에서의 삶을 낯설게 바라본다. 김현에 따르면, 아파트에는 지하나 다락방이 없어서 사람이 숨을 곳이 없다. 어딘가에 숨어서 사유하고 각자 다른 개성을 내보이며 사는 것은 그의 꿈이기도 했을 텐데 아파트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고 사람들의 삶은 '평균화'된다. 삶은 깊이가 없이 얇아진다. 똑같은 TV 프로그램을 보고, 똑같은 라면을 먹는 삶 속에서 사람들의 바람은 더 넓은 평수로 집을 옮기는 것으로 모아진다. 글이 쓰인 때가 1978년인데, 오늘날의 모습과 빼닮아 있다. 다만 시간이 많이 흘러서 많은 젊은이들에게 반포로 대표되는 서울의 아파트는 접근 불가능한 재화가 되었다. 김현은 '땅집'을 그리워하면서도 아파트에 안주하는 자신을 '위선자'라고 자책한다. 남도의 조그마한 섬에서 자란 그의 감수성이 나타나는 글이다.


  책에는 김현이 20대 초반에 적은 글에서부터 말년에 적은 글까지 다양하게 실려 있다. 20대에 적은 글에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는데 뭐라고 묘사하기는 어렵다. 약간 어두우면서도 밀도가 있는 글이어서 나중에 쓰인 글보다 약간 어렵기도 하다. 1963년에 쓰인 <나에게 되살아오는 것은> 등이 그렇다. 표제작 <사라짐, 맺힘>은 그가 죽기 1년 전에 적은 글이다. 김현은 <혼맞이 노래>를 듣고 감동한 이야기를 후배 선생에게 전하지만, 후배 선생은 공감하지 못 한다. <혼맞이 노래>를 검색해보았는데 들을 수 있는 곳을 못 찾았다(국가 기관 같은 곳에서 정리를 해줬으면). 김현이 좋아했다는 함동정월, 김죽파, 지성자의 가야금 산조는 앨범이 검색되어서 조금 들어보았는데 좋았다. 여기 적어두는 이유는 좀 더 들어보려고.


  블로그를 하면서 '밑줄긋기' 기능은 쓰지 않았었는데 처음으로 몇 문장을 옮겨본다. 5장 <미술관을 나오면서>에는 김현이 유학 시절 미술관에서 본 그림에 대해 쓴 글이 모여있다. 그 중 '드가'에 대해서 쓴 글에 나오는 문장을 옮긴다(265쪽). <이오네스코의 무소>라는 글에 있는 문장도 옮긴다(84쪽). 


  도서관에서 여러 잡지를 들춰보았던 그때, 떠난 지 30년이 된 김현 평론가가 우연히 다가온 것처럼 느껴진다.



삶, 그것 때문에 고통하지 않는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그것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관찰하려 하는, 그래서 거기에서 의외성을 발견하는 한 미술가의 처참한 노력,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의 초상이었다. - P265

유연성 있게 사물을 바라보고 그것과 다른 것과의 거리를 잴 줄 알던 사람들이 갑자기 전기에라도 닿은 듯 목을 꼿꼿이 세우고 자기주장만을 되풀이할 때 그만 나는 세상을 살 재미를 잃어버린다.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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