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도서관에서 <문학과 사회> 2020년 여름호에 실린, 김현 평론가의 30주기 대담을 재미있게 읽었다. 김현 평론가의 인간적인 모습을 그려서다. 대담에서는 김현 평론가와 인연이 있던 평론가, 연구자, 번역가 들이 과거 김현 평론가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회상한다. 김현은 후배나 동료 연구자, 그리고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무슨무슨 글을 써보라고 또는 번역해보라고 자주 권했다고 한다. 그것은 사람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라고 대담자들은 회상한다. '반포치킨'에 동료들을 불러 매일 술을 마시며 문학 이야기를 하는 것은 (결국 그의 건강을 해치지만) 김현에게 꼭 필요한 일이었다.

 

  '문지 에크리' 시리즈의 첫 번째 책 <사라짐, 맺힘>은 김현의 오래된 책들에는 접근하기 어려웠던 내가 처음으로 읽은 김현의 글이었다(수업에서 조금 읽었던 김윤식, 김현의 <한국문학사>를 제외하고). 1장 <두꺼운 삶과 얇은 삶>은 책의 다른 곳에서보다 한국의 현실을 많이 다뤄서 좋았다. 1장의 표제작 <두꺼운 삶과 얇은 삶>은 반포와 여의도의 아파트 생활이 어떠했는지를 다룬다. 반포의 '소택지'를 메워서 지은 스물두 평짜리 아파트에 청약이 당첨되어서 입주한 김현은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느끼는 아파트에서의 삶을 낯설게 바라본다. 김현에 따르면, 아파트에는 지하나 다락방이 없어서 사람이 숨을 곳이 없다. 어딘가에 숨어서 사유하고 각자 다른 개성을 내보이며 사는 것은 그의 꿈이기도 했을 텐데 아파트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고 사람들의 삶은 '평균화'된다. 삶은 깊이가 없이 얇아진다. 똑같은 TV 프로그램을 보고, 똑같은 라면을 먹는 삶 속에서 사람들의 바람은 더 넓은 평수로 집을 옮기는 것으로 모아진다. 글이 쓰인 때가 1978년인데, 오늘날의 모습과 빼닮아 있다. 다만 시간이 많이 흘러서 많은 젊은이들에게 반포로 대표되는 서울의 아파트는 접근 불가능한 재화가 되었다. 김현은 '땅집'을 그리워하면서도 아파트에 안주하는 자신을 '위선자'라고 자책한다. 남도의 조그마한 섬에서 자란 그의 감수성이 나타나는 글이다.


  책에는 김현이 20대 초반에 적은 글에서부터 말년에 적은 글까지 다양하게 실려 있다. 20대에 적은 글에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는데 뭐라고 묘사하기는 어렵다. 약간 어두우면서도 밀도가 있는 글이어서 나중에 쓰인 글보다 약간 어렵기도 하다. 1963년에 쓰인 <나에게 되살아오는 것은> 등이 그렇다. 표제작 <사라짐, 맺힘>은 그가 죽기 1년 전에 적은 글이다. 김현은 <혼맞이 노래>를 듣고 감동한 이야기를 후배 선생에게 전하지만, 후배 선생은 공감하지 못 한다. <혼맞이 노래>를 검색해보았는데 들을 수 있는 곳을 못 찾았다(국가 기관 같은 곳에서 정리를 해줬으면). 김현이 좋아했다는 함동정월, 김죽파, 지성자의 가야금 산조는 앨범이 검색되어서 조금 들어보았는데 좋았다. 여기 적어두는 이유는 좀 더 들어보려고.


  블로그를 하면서 '밑줄긋기' 기능은 쓰지 않았었는데 처음으로 몇 문장을 옮겨본다. 5장 <미술관을 나오면서>에는 김현이 유학 시절 미술관에서 본 그림에 대해 쓴 글이 모여있다. 그 중 '드가'에 대해서 쓴 글에 나오는 문장을 옮긴다(265쪽). <이오네스코의 무소>라는 글에 있는 문장도 옮긴다(84쪽). 


  도서관에서 여러 잡지를 들춰보았던 그때, 떠난 지 30년이 된 김현 평론가가 우연히 다가온 것처럼 느껴진다.



삶, 그것 때문에 고통하지 않는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그것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관찰하려 하는, 그래서 거기에서 의외성을 발견하는 한 미술가의 처참한 노력,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의 초상이었다. - P265

유연성 있게 사물을 바라보고 그것과 다른 것과의 거리를 잴 줄 알던 사람들이 갑자기 전기에라도 닿은 듯 목을 꼿꼿이 세우고 자기주장만을 되풀이할 때 그만 나는 세상을 살 재미를 잃어버린다.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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