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호작용 의례 - 대면 행동에 관한 에세이 아카넷 한국연구재단총서 학술명저번역 538
어빙 고프먼 지음, 진수미 옮김 / 아카넷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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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행동과 언행, 예절과 처신에 대해 제대로 관심을 가졌던 적이 있나 모르겠다. 스스로 예의범절이란 별로 쓸데없는 짓이고 가식적인 절차라 생각한 적도 많았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하면서 겪게 되는 다양한 상황에 맞춰 내가 지금 올바로 처신을 하고 있는 건지 궁금할 때가 있긴 했다.

 

막상 그 때가 지나면 도로 단조롭고 지루한 일상에 묻혀 그런 걱정은 필요한 사람들이나 하는 거라면서 애써 신경을 끄려고도 했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내 경험과 인맥이 그다지 풍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타인을 대하는 태도와 처신에 자신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나, 그래서 일부러 그런 상황과 장소를 외면하거나 피했었던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내 "체면에 위협이 될 상황을 막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위험이 될 법한 접촉을 피하는 것"(27)이기 때문에. 

 

어빙 고프먼의 <상호작용의례>는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체면 지키기'라든지 '존대'와 '처신'의 문제, '당혹감', 대화 과정의 '몰입'과 '소외', '행동'과 그에 따르는 '사후영향' 등에 대해 논구한 저서이다. 저자가 책에서 다루는 용어들은 우리가 살면서 흔히 사용하는 것들이 많지만 문장의 맥락 속에서는 무척이나 분석적이고 학술적으로 읽힌다. 

 

예를 들어 제6장 '행동이 있는 곳'에서 '행동(action)'은 단순한 동작이 아닌, 마치 도박에서 운을 걸고 어떤 베팅을 하는 것처럼 자신의 미래에 '사후영향'을 가져올 '운명적 활동'이라고 규정한다. 이 부분을 읽을 때는 내가 과연 얼마나 '운명적 활동'을 하면서 살고 있는 건지 돌이켜 보게 되었다. 도박이나 내기처럼 사후영향이 명쾌하고 곧바로 결과를 얻을 수 있는 행동은 아니어도, 시간이 지나면 그 효과가 나타났었을 건설적인 도박(모험)을 그때는 왜 하지 않았었는지 회한이 밀려왔었다. 

 

책을 읽는 동안 타인을 대하는 인간의 행동들은 거의 다 연극이자 의례의 연속이고, 나 자신도 그 연극과 의례가 벌어지는 무대의 등장인물처럼 여겨졌다. 이런 느낌은 <자아연출의 사회학>을 읽을 때도 들었었다. 

나는 되묻게 된다. 정말 인생은 한바탕 '쇼'인 건지, 내가 보는 사람들의 겉모습은 그들의 본질이 아니라 그저 연출된 '가면(persona)'일 뿐인 건지, 그리고 나도 이런저런 가면을 바꿔쓰면서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배우일 뿐인 것인지... 결코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겠더라. 

 

사회학에는 과문하지만 인간의 일상생활에 대해서 이다지도 냉혹하고 비정하게 그 이면에 감추어진 (사려 깊은, 또는 불경한) 의도들을 철저하게 폭로했던 사회학자는 없었던 거 같다. 어떤 문장은 정말 등골이 서늘할 정도로 속마음을 완전히 들켜버린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발가벗겨진 기분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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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라면 공감할지도 모르겠다. 그곳엔 참 다양한 인간들이 나타난다는 걸.

혼자서 미친 듯 중얼거리는 사람들 많이 본다. 이 책 5장에서 말하는 정신병동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들과 비슷하겠지. 이들은 공공질서(즉 의례)에서 일탈하는 사람들이다.

며칠 전에 본 한 사람은 참 재미있는 정신이상자였다. 보통의 정신이상자들은 사람이 많지 않을 때의 공간을 이용해서 그들만의 공연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사람은 출근 시간에 그 꽉 찬 지하철 안에서 공연을 하더라. 그렇게 많은 승객들 속에서 공연을 벌이는 사람은 정말 처음 봤다. 대사는 다음과 같다.  

"땡큐! 땡큐! 내리실 문은 오른쪽 입니다. (잠깐 뜸을 들였다가 밝고 명랑한 목소리로) 오른쪽이에요!"  

 

지하철에서 물건 파는 사람들도 엄밀히 따지면 공공질서를 위반하는 사람들이지만 (먹고살자고 하는 거라서) 승객들이 어느 정도는 그 행위를 묵인해 줄 수도 있다. 반면 선교 행위인 경우, 생존의 문제가 아니라 타인에게 자신의 신념(예수천국불신지옥)을 강요하는 행위라 사람에 따라서는 불쾌하게 여기고 항의를 하기도 한다. 실제로 그런 사람을 본 적도 몇 번 된다.

자신의 딱한 처지를 적은 종이를 승객들에게 돌리고 껌 따위를 팔거나 금전을 요구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냥 외면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간혹 종이를 팽개치는 사람도 있고 그리하여 볼썽사나운 말다툼이 일어나는 것도 보았다. 이 모든 행위들이 지하철 좁은 공간에서 일어나는 공연과 그 반응들이다.

 

금전적 이익을 위해 물건 파는 공연을 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역설적으로 물건의 질이 아니라, 그들의 태도이다. 능숙한 제품시연과 자신감, 설득력 있는 대사와 목소리, 불법행위 신고의 위험을 감수하는 용기 등등.  

구걸을 위한 공연은 성격이 약간 다르다. 초췌한 몰골, 불편한 신체, 때로는 철 모르는 아이와 동반하여 동정심을 유도하기도 한다. 추운 날 맨발에 허름한 삼선 슬리퍼를 신고 종이를 돌리는 식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반적인 상호작용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 지하철 안에서 이런 일탈적 행동들은 그야말로 또 하나의 연극이자 의례가 아닐까. 그 공연에 우리들은 외면하거나 동조하기도 하지만 저항하기도 한다. 고프먼도 좋아했을 '상호작용'의 재미난 연구 과제들이 아침 저녁으로 타는 지하철 안에도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 제1장 '체면 차리기'를 읽을 때 떠오른 한 장면은 은팔찌를 찬 처지에도 꾸역꾸역 올림머리를 하고 재판을 받던 어떤 무직자의 모습이었다. 이야말로 딱 '체면차리기'의 희극이 아닌가. 남은 건 체면 밖에 없는 자의 애잔한 모습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는 애초부터 올림머리 밖에는 가진 것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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