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태 <마하바라타>의 주인공이 아르주나인줄로만 알았는데, 사실은 맏형 유디스티라였구나.

그가 겪은 갈등과 번뇌가 어땠을지 짐작도 안 된다. 백 명이 넘는 이복 형제들과 스승과 할아버지까지 다 죽이고도 왕이 되어야만 하는 그 심정을 누가 알 수 있을까?

 

 

(모든 적들을 죽이고 전쟁에서 승리한 뒤 유디스티라가)
“우리의 적은 공덕을 얻어 지금 천국에 있지만, 우리는 살육을 후회하는 이 참회의 지옥에서 살아야 한다. 슬픔만이 우리가 받은 보상이다! 생명을 죽이는 것이 크샤트리아의 의무라는 말은 두 번 다시 하지 마라. 살육만이 인생의 규칙이라면 나는 크샤트리야라고 불리고 싶지 않다. 나는 사문(출가수행자)이 되겠다. 내가 동정과 용서를 베풀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면, 이 모든 승리를 얻은 것보다 훨씬 행복할 것이다. 고기 한 조각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개들처럼 우리는 피를 나눈 친척들과 싸워서 그들을 죽였다. 우리는 두르요다나의 무분별한 증오심 때문에 그런 처지로 내몰렸지만, 이제 우리는 이런 식으로 그보다 오래 살면서도 아무런 기쁨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아르주나, 네가 이 나라의 왕이 되어라. 나는 숲으로 떠나야겠다. 고행과 무소유의 은둔 생활을 하면서, 숲속의 천진난만한 동물들과 나무들만 벗으로 삼아서 살겠다.”


유디스티라가 사문으로서의 생활을 계속 노래했기 때문에, 아르주나는 화가 나서 그의 말을 가로막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하면 됐어. 그렇게 많은 것을, 그렇게 많은 생명을 희생하고 왕국을 얻었으니, 그 왕국이 형보다 못한 사람의 손에 들어가 고통받지 않도록 왕국을 다스리는 게 형의 의무야. 가난한 사람들을 부양하고 희생적인 행위를 후원하고 통치자로서 신의 정의를 유지하는 것이 형의 의무야. 형은 크샤트리야에게 허용된 정당한 수단으로 얻은 왕의 권력을 갖지 않고는 절대로 이것을 해낼 수 없을 거야. 형이 번영하고 부유하지 않으면 이 점에서 형의 의무를 절대로 수행할 수 없을 거야. 거지는 남을 도울 수 없고, 약골은 다른 사람들에게 쓸모있는 존재가 될 수 없어. 금욕적인 생활은 우리가 아니라 오로지 거지에게만 어울리는 생활이야. 재산은 더 많은 재산을 가져다줘. 종교 활동, 쾌락, 즐거움, 인생의 모든 성취는 재산에서 생겨나는 거야. 재산이 없는 사람은 이 세상만이 아니라 내세에서도 경멸당해. 다툼과 의견 차이는 천상의 신들 사이에도 존재해. 천계에서도 그런데, 우리 인간 사회에도 의견 차이와 싸움이 존재하는 게 뭐가 잘못이야? 영광은 싸워서 얻고, 인생의 좋은 것들은 모두 그 영광에서 생겨나는 거야. 그건 모두 락슈미 여신의 선물로 알려져 있고, 그런 선물을 퇴짜놓는 사람은 여신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남에게 손해를 주거나 남을 해치지 않고 얻은 재산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걸 잊지 마.”


그래도 유디스티라는 고행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되풀이했다. 그의 금욕적 사고방식에 화가 난 비마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형, 그런 말은 제발 그만둬. 형의 정신은 균형을 잃었고, 형은 현실을 보지 못하고 있어. 형은 경전을 앵무새처럼 암송만 해대는 자들과 마찬가지야. 그들은 아무 관련성도 없는 말을 계속 지껄이지. 왕의 의무를 그처럼 나쁘게 생각한다면, 형이 우리에게 드리타라슈트라의 가족을 몰살하게 한 것은 불필요한 짓이었어. 이게 형의 철학이라는 걸 알았다면 우리는 싸울 상대가 누구든 무기를 드는 데 동의하지 않았을 거야. 적을 죽였으니 이 왕국의 고삐를 잡고 진정한 크샤트리야답게 다스리는 것이 형의 의무야. 형이 아무리 싫어해도 이제 와서 형의 신분을 바꿀 수는 없어. 형의 행동은 우물을 파느라 젖은 진흙으로 온몸을 더럽힌 뒤 물이 막 솟아나고 있을 때 물러나는 사람과 비슷해. 형은 적들을 모조리 죽인 뒤 결국 자살하는 사람과 비슷해. 우리는 형을 추종했지만, 이제 형의 지성이 의심스럽다는 것을 깨달았어. 제발 우리 입장도 생각해줘. 자신의 감정만 중시하는 건 이기적인 짓이야. 은둔 생활은 불치병에 걸렸거나 실패로 괴로워하고 있는 왕들만 선택해야 돼. 극기와 수동성이 최고의 미덕이라면 산과 나무가 가장 고결한 피조물이어야 해. 산과 나무는 항상 초연한 생활을 하고 아무도 방해하지 않으니까.” (266-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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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약본으로 읽었을 뿐이지만 대단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역사와 사회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갈등과 미덕들이 이야기 속에서 끝없이 발견된다. 선악이나 미추로 단순하게 규정할 수 없는 사건과 행동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가, 위선적 인간과 추악한 인간은 무슨 차이가 있는가, 영원불멸한 선이란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 지도자로서의 책임이란 과연 무엇인가와 같은 심각한 질문들이 이 거대한 드라마 속에 담겨 있었다.

우리가 살면서 부딪칠 수 있는 거의 모든 질문들이 이 <마하바라타>에 이미 나왔던 거라고 보아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 같다. 마하바라타 원본을 죽기 전에 읽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나마 좋은 번역본으로 이 대서사시를 완독한 것에 큰 만족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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