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빈집 같아서 어떤 때는 독사가 살고 어떤 때는 청보리밭이 산다고 하였다.
오늘, 내 마음 속 빈집에는 어떤 풍경이 살고 있을지... 혹 길 잃은 들개가 메마른 벌판을 헤매는 풍경?
빈집의 약속
마음은 빈집 같아서 어떤 때는 독사가 살고 어떤 때는 청보리밭 너른 들이 살았다
볕이 보고 싶은 날에는 개심사 심검당 볕 내리는 고운 마루가 들어와 살기도 하였다
어느 날에는 늦눈보라가 몰아쳐 마음이 서럽기도 하였다
겨울 방이 방 한 켠에 묵은 메주를 매달아 두듯 마음에 봄가을 없이 풍경들이 들어와 살았다
그러나 하릴없이 전나무 숲이 들어와 머무르는 때가 나에게는 행복하였다
수십 년 혹은 백 년 전부터 살아온 나무들, 천둥처럼 하늘로 솟아오른 나무들
뭉긋이 앉은 그 나무들의 울울창창한 고요를 나는 미륵들의 미소라 불렀다
한 걸음의 말도 내놓지 않고 오롯하게 큰 침묵인 그 미륵들이 잔혹한 말들의 세월을 견디게 하였다
그러나 전나무 숲이 들어앉았다 나가면 그뿐, 마음은 늘 빈집이어서
마음 안의 그 둥그런 고요가 다른 것으로 메워졌다
대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듯 마음이란 그냥 풍경을 들어앉히는 착한 사진사 같은 것
그것이 빈집의 약속 같은 것이었다
- 문태준, 『가재미』, 98-99쪽
나에겐 문태준의 시가 좀 어려운 것 같다.
함민복이나 김사인의 정서는 언뜻 공감이 많이 됐었는데, 문태준은 좀더 심오하다고 할까?
<가재미>, <서리>, <운문사 뒤뜰 은행나무>, <무늬는 오래 지닐 것이 못되어요>, <빈집의 약속> 등 몇몇은 좋았다.
책 말미 이광호의 해설에 나오듯 "그의 시에서 세계는 '자아화'되지 않으며, 단지 작은 존재들과의 사소한 교감을 통해서 시적 자아는 자신의 존재론을 조심스럽게 탐문한다"는 건데, 자꾸 읽어보면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시는 깨닫거나 느끼는 것이지 '아는' 건 아니지 않나. 나는 문 시인 스타일의 '사소한 탐문'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일까? 어떤 시는 솔직히 무슨 뜻인지 모르겠더라. 견문과 독서의 부족을 느낀다. 시집을 좀더 많이 찾아 읽어야겠다.
어쨌거나 글쓰는 사람들의 문체를 바꿀 수 있는 게 있다면 아마 시일 것 같다. 시에 쓰인 낱말, 문체와 리듬과 강약에 읽는이의 글쓰기가 영향을 받을 수 있겠다는 짐작이 든다. 그런데 그렇다 하더라도 시인만큼 내 마음과 사물들을 담담하게 관조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게다가 시적 비유 같은 건 천부적 자질이 필요한 덕목이다. 엊그젠가 저녁에 산 위로 막 떠오르고 있는 보름달을 보면서 딸내미는 "달이 굴러떨어질 것 같다"고 하였다. 경사진 산의 윤곽에 달이 살짝 걸려있는 걸 보고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어린이들은 다 시인이라고 하던데 과연 그렇구나 하고 혼자 감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