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미모라는 게 얼마나 위험하고 허망한 것인가.

자현 스님의 <붓다순례>에서 연화색 비구니 이야기를 옮겨 본다.

 

 

연화색은 대단한 미모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미모만큼 인생은 순탄하지 않았다. 아니 순탄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더할 수 없는 기구함이 그녀의 삶에 존재한다.


처음 연화색은 울선(鬱禪)으로 시집을 가 얼마 지나지 않아 임신을 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남편과 함께 친정으로 해산하러 와 딸을 낳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연화색의 어머니와 남편이 불륜 관계를 맺게 된다. 연화색은 이 사실을 여종에게 듣고는 안고 있던 딸을 집어 던졌다. 이때 아이의 머리에 상처가 생긴다. 얼마 후 연화색은 모녀가 한 남자와 산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다고 자탄하면서 집을 떠나게 된다.


이후 바라나시로 갔다가 그곳에서 연화색의 미모에 반한 상인을 만나 재혼한다. 그런데 상인은 후일 울선으로 무역을 하러 갔다가 그곳에 현지처를 두게 된다. 이후 연화색은 이를 눈치 채지만, 자신도 재혼이었으므로 울선의 현지처를 데려와서 함께 살자고 한다. 이렇게 두 부인이 형님, 동생하면서 살게 되는데, 하루는 머리를 빗겨 주다가 머리의 상처를 보고는 그녀가 자신의 친딸임을 알게 된다.


결국 연화색은 운명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또다시 집을 뛰쳐나가, 정처 없이 떠돌다 반쯤 실성해서 도착한 곳이 우연찮게도 왕사성의 죽림정사였다. 연화색을 본 붓다는 이 여인의 문제를 한눈에 파악하고, 수행자를 만들어 교화한다. 연화색은 현실에 대한 애착이 없었기 때문에 빠르게 깨달아 비구니 중 신통제일의 위치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출가한 이후 연화색의 미모는 또 다른 장애가 된다. 홀로 수행하는 과정에서 미모에 반한 일반인과 실랑이가 발생하고, 과격한 다툼 속에서 결국 눈이 빠지는 상처를 입기에 이른 것이다. 오늘날 모두가 원하는 미모의 가치가 때론 슬픔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점은, 인생의 또 다른 아이러니가 아닌가 싶다.

 

붓가가 상카시아로 내려오실 때, 연화색은 지상의 제자로는 자신이 가장 먼저 붓다를 맞이하고자 했다. 이때 이곳에는 목건련이 없었기 때문에 연화색을 능가하는 신통의 비구는 없었다. 그래서 비구 교단이 발칵 뒤집어지게 된다. 붓다께서 3개월 만에 오시는데, 비구가 아닌 비구니가 가장 먼저 맞이한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이때 왕사성 영취산의 수보리는 가사를 깁다가 이 소식을 듣고는, 잠시 붓다는 형상의 존재가 아님을 관상한다. 그러고는 다시금 가사를 마저 기웠다. 이때 연화색이 붓다를 맞이하면서 자신이 가장 먼저 마중을 나왔다고 하자, 붓다께서는 ‘나를 가장 먼저 맞이한 것은 수보리’라고 답하신다. 『증일아함경』 권28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참으로 아름답다. 그러나 연화색의 일생을 생각하면 왠지 서글프다. 이렇게라도 해서 인정받고 싶어 했던 연화색을 붓다가 용인해 줬다면, 이야기는 아름답지 않더라도 더 따뜻하지 않았을까?


어머니를 위한 애틋함을 보이기 위해 도리천으로 가신 붓다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수보리에 대한 이야기는 후대에 부가된 것은 아닐까? 특히 수보리가 상카시아가 아닌 왕사성에 있었다는 점에서, 왠지 남성 우월주의에 의한 왜곡의 그림자가 느껴지곤 한다. (284-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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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는 멀리 있던 수보리가 가장 먼저 붓다를 맞이했다는 말을 굳이 연화색한테 했을 리가 없다, 고 나는 생각한다.

그 부분은 스님의 말씀대로 후대에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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