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생각쓰기
윌리엄 진서 지음, 이한중 옮김 / 돌베개 / 2007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원래 원서로 읽어보려고 했던 책인데 어려운 거 같아서 관두고 번역본으로 봤다.

내 글쓰기에 이런저런 이유로 회의가 많았는데, 이 책을 보니 그 이유를 조금 알 것도 같다.

저자가 말하는 것에 공감하면서 이런 다짐을 했다.

 

 

싫어하는 것과 악담하기 위해서 글 쓰지 말자.

쓰려면 애정을 갖고 쓰자.

글쓰기는 만만한 게 아니다.

생각이 완성되고 글이 나오는 게 아니라 글을 쓰고 고치면서 생각이 완성되는 것이다.

초고는 다듬지 말고 빨리 써서 뼈대를 갖춘 다음에 수정하자.

사람과 장소: 논픽션의 두 뿌리.

사람이 '그곳'을 가는 이유를 생각해 보자.

 

 

 

아래는 책에서 인용.

 

 

글을 쓴다는 건 힘든 일이다. 명료한 문장은 우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심지어는 세번째까지도 적절한 문장이 나오는 경우는 대단히 드물다. 절망의 순간에 이 말을 꼭 기억하기 바란다. 글쓰기가 힘들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글쓰기가 정말로 힘들기 때문이다. (24)

 

 

이 이야기에서 배울 점이 있다면, 언제나 써야 할 것보다 많은 자료를 모아야 한다는 것이다. 글의 힘은 가장 도움이 되는 일부분을 추려내기 위한 여분의 자료가 얼마나 많으냐에 비례한다. 평생 자료만 수집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어느 시점에서는 조사를 마치고 글쓰기를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59)

 

 

이런 종류의 여행기를 써보는 연습을 하자. 그렇다고 모로코나 몸바사까지 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주변의 쇼핑몰이나 볼링장, 탁아소도 좋다. 다만 어느 장소건 그곳만의 특별한 점을 발견할 수 있을 만큼은 자주 가보아야 한다. 그 특별함은 대개 그 장소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조합된 것이다. 집 근처 볼링장이라면 내부 분위기와 주로 찾아오는 사람들, 외국의 어느 도시라면 고대의 문화와 현재의 주민들이 그 특별함을 이룰 것이다. 그것을 찾자. (105)

 

 

미국의 실업계는 쉬운 말을 편안하게 사용하는 곳이 아니다. 글 한 줄 한 줄에 허영이 너무 많이 들어가 있다. 지위가 높건 낮건 관리자들은 문체가 단순하면 생각이 단순하다는 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사실 단순한 문체는 고된 노력과 사고의 결과다. 문체가 엉망인 글을 쓴 사람은 자기 생각을 제대로 가다듬지 못할 정도로 생각이 뒤죽박죽이거나 오만하거나 게으른 사람이다. 글은 여러분에게 거래나 돈이나 선의를 제공할 누군가에게 여러분을 알릴 유일한 기회일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글이 현란하거나 거만하거나 모호하면 여러분도 그런 사람으로 낙인찍힐 것이다. 글을 읽은 사람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157)

 

 

좋은 평과 좋은 비평에 모두 적용할 수 있는 몇 가지 원칙은 제시할 수 있다.

먼저, 비평가는 자신이 평가하는 매체에 애정을 가져야 한다. 영화는 죄다 시시하다고 생각한다면 영화에 대해 써서는 안 된다. 독자는 지식과 열정과 편애를 키워줄 영화광의 글을 읽을 권리가 있다. 비평가가 모든 영화를 다 좋아할 필요는 없다. 비평이란 한 사람의 의견일 뿐이니까. 그러나 비평가는 모든 영화를 보러 갈 때 그 영화를 좋아하게 되기를 바라야 한다. 즐거울 때보다 실망할 때가 더 많다면, 그것은 그 영화가 최선의 가능성을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이든 곱지 않게 보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 비평가의 경우와는 전혀 다르다. 그는 '카프카적인'이라는 단어를 입 밖에 내는 것보다도 더 빨리 싫증을 느낀다. (162-163)

 

 

 

이 비평은 최고다(위). 멋지고 비유적이고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이 글은 우리의 신념 체계를 건드리고 그것을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비평은 대개 그래야 한다.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열쇠구멍이라는 적확하고도 신비한 은유다. 그러나 한 나라의 가장 강력한 매체가 자국이 수행하고 또 확대하고 있는 전쟁에 대해 자국민들에게 어떻게 이야기했느냐 하는 근본적인 질문은 그대로 남는다. 이 칼럼은 미국인 대부분이 아직 베트남전쟁을 지지하던 1966년에 연재되었던 것이다. 만일 텔레비전이 열쇠구멍을 넓혀 물결치는 옷자락뿐 아니라 잘려나간 목과 불에 타버린 아이를 보여주었더라면 사람들은 더 일찍 전쟁 반대로 돌아섰을까? 답을 알아보기에는 너무 늦었다. 하지만 적어도 비평가 한 사람은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비평가는 우리가 자명하다고 여기는 진실이 더 이상 진실이 아닐 때 그것을 가장 먼저 알려주는 사람이어야 한다. (169)

 

 

모트 살(Mort Sahl)은 미국이 조용히 안정을 누리려던 1950년대 아이젠하워 시대에 깨어 있었던 유일한 희극 배우였다. 많은 사람들이 살을 냉전주의자로 보았지만, 그는 스스로를 이상주의자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누군가를 비판한다면, 그것은 내가 나쁜 것을 바꿀 좋은 세상에 대한 희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비트제너레이션(1950년대 미국에서 대두한 보헤미안적 문학 예술가 세대)처럼 '난 개입하지 않을 테니 딴데 가보시오'라고 말하지 않는다. 나는 여기 있으며 개입한다(If I criticize somebody, it's because I have higher hopes for the world, something good to replace the bad. I'm not saying what the Beat Generation says: 'Go away because I'm not involved.' I'm here and I'm involved)."

진지한 유머를 쓰고 싶다면 "나는 여기 있으며 개입한다"라는 말을 신조로 삼자. 유머 작가는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시사적인 문제에 깊이 뛰어든다. 그들은 대중과 대통령이 듣고 싶지 않은 것을 말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비위에 맞지 않는 일을 해야 한다. 아트 버크월드와 개리 트루도는 매주 한 번 용감한 일을 감행한다. 그들은 일반 칼럼니스트들은 차마 할 수 없지만 할 필요가 있는 말을 한다. 다행인 것은 정치인들은 유머에 능하지 않기 때문에 일반 대중들보다 더 어리둥절해한다는 것이다. (181-182)

 

 

이 글이 왜 끔찍한지 애써 설명할 필요는 없으리라. 한마디로 조잡하고, 진부하고, 장황하다. 언어를 깔보는 태도가 있다. 가식적이다(나는 '아시겠지만'이라고 쓰는 사람의 글은 더 읽지 않는다). 그러나 성긴 글에서 가장 딱한 점은 제대로 된 글보다 읽기가 더 어렵다는 것이다. 이런 글은 독자의 여행을 편하게 만들어주려 한 나머지 천박한 속어, 조악한 문장, 내용 없이 철학자인 체하기 같은 이런저런 방해물을 길에 늘어놓고 만다. 화이트의 글은 훨씬 읽기 쉽다. 그는 문법이라는 도구가 오랜 세월 동안 그저 우연히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안다. 문법은 독자들이 알게 모르게 크게 의지하는 버팀목이다. E. B. 화이트나 V. S. 프리쳇의 글이 너무 훌륭하다고 해서 읽기를 그만두는 독자는 아무도 없다. 하지만 글쓴이가 자신을 깔본다고 느끼면 책을 덮어버릴 것이다. 선심 쓰는 체하는 필자를 참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최상의 언어에 대한, 그리고 최상의 독자에 대한 경의를 품고 쓰자. 성긴 문체를 쓰고 싶은 충동이 너무 강하다면, 자신이 쓴 글을 큰 소리로 읽어보면서 자신의 목소리가 듣기 좋은지 직접 느껴보자. (205)

 

 

여기에서 논픽션 작가가 얻을 만한 교훈은, 자기 과제에 대해 폭넓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듀본』에 쓰는 글이라고 해서 꼭 자연에 대한 것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카 앤 드라이버』에 글을 쓴다고 해서 꼭 자동차에 대해서만 쓸 필요는 없다. 써야 할 주제의 범위를 넓혀서 그것이 여러분을 어디로 데려가는지 보자. 자신의 삶을 거기에 가미하자. 여러분이 쓰기 전까지는 여러분의 이야기가 아니다. (221)

 

 

논픽션 작가라면 비행기를 자주 타야 한다. 흥미로운 주제가 있으면 쫓아가야 한다. 다른 지역이든 다른 나라든 찾아가봐야 한다. 그것이 자신을 찾아오지는 않는다.

먼저 무엇을 하고 싶은지 결정하자. 그리고 하기로 결정하자. 그리고 하자. (257)

 

 

아버지에게서 선물을 하나 더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내 길을 떠난 한참 뒤의 일이었다. 그것은 좋은 품질은 그 자체가 커다란 보상이라는 뼛속 깊은 신념이었다. 나 역시 글을 팔기 위해 돌아다닌 적이 없다. 집 안에서 글을 좋아한 분은 어머니였지만 -책 수집가, 영어 애호가, 현란한 편지 문장가로서- 내가 장인의 윤리를 배운 것은 사업의 세계에서였다. 오랫동안 일하면서 고쳐 쓴 것을 끊임없이 고쳐 쓰고 같은 영역에서 경쟁하는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글을 쓰려고 애쓰는 자신을 볼 때면, 셸락에 대해 이야기하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내 속에서 들여온다.

최선을 다해 잘 쓰는 것 외에도, 나는 최대한 재미있게 쓰고 싶었다. 야심만만한 작가들에게 어느 정도는 자신을 엔터테이너로 생각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카니발이나 곡예나 광대를 연상시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공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즐거운 글을 써서 신문이나 잡지에서 돋보여야 한다. 여러분의 글쓰기를 엔터테인먼트로 끌어올릴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는 대개 독자들에게 즐거운 놀라움을 주는 것이다. 유머, 일화, 역설, 뜻밖의 인용, 강력한 사실, 특이한 디테일, 우회적인 접근, 단어의 우아한 배열 등 어떤 것이든 좋다. 사실 재미를 위해서 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런 것들이 바로 여러분의 문체가 된다. 우리가 어떤 작가의 문체가 좋다고 할 때, 우리는 그가 종이 위에 표현하는 그의 개성을 좋아하는 것이다. 함께 여행할 친구를 선택할 수 있다면 우리는 대개 여행을 밝게 만들어줄 만한 사람을 택하게 마련이다. 작가는 우리에게 함께 여행을 가자고 권하는 사람이다. (275)

 

 

성실한 필자에 대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정의는 조 디마지오에게서 얻은 것이다. 그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지만 말이다. 디마지오는 내가 본 최고의 선수이며, 누구도 그만큼 편안하게 경기하는 이는 없었다. 그는 외야에서 광범위한 수비 영역을 책임졌으며, 우아한 걸음으로 움직였고, 언제나 공보다 앞서 와 있었으며, 가장 어려운 공도 아무렇지 않게 잡았고, 타석에서 엄청난 힘으로 공을 쳐내면서도 전혀 애를 쓰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의 힘들이지 않는 듯한 모습에 감탄했다. 그것은 매일같이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야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기자가 어떻게 하면 늘 그렇게 잘할 수 있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늘 제가 뛰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관중석에 적어도 한 명은 있다는 생각을 해요. 그 사람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습니다." (28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