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소 - 정신병 환자와 그 외 재소자들의 사회적 상황에 대한 에세이 우리 시대의 고전 23
어빙 고프먼 지음, 심보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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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이의 조건에 따라 어떤 책은 내용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어빙 고프먼의 <수용소>가 나에겐 그런 책이다. 군대, 수도원, 교도소와 정신병원의 인간관계와 사회적 구조에 관한 시시콜콜한 분석과 서술을 읽는 게 도대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내용이 무가치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어떤 단락에서는 아니! 이런 기가 막힌 분석이, 라며 무릎을 치기도 했고, 마치 시체를 해부하고 병자를 수술하는 것처럼 정교하게 수용소의 직원과 재소자들의 상황을 풀어헤쳐 설명하는 솜씨에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여전히 수용소의 이야기가 나와는 상관없었다.

군대에서 짱박히는 병사 얘기에 먼 옛날 두돈반 트럭 적재함에서 몰래 낮잠을 자던 아련한 추억이 떠오르는 정도였을 뿐.  

 

<수용소>에서는 고프먼의 글쓰는 스타일이 핵심이며, 그게 결국 내용이다.

말하는 방법과 태도, 다루는 자료의 범위와 유형, 그리고 근거의 생경함과 의외성, 무엇보다도 몸으로 부딪치는 조사와 연구방식 등등. 그가 붙인 각주 하나를 보면 고프먼이 도대체 어떤 연구자였는지 알 수 있다.

 

나는 하나의 실험을 했다. 어느 날 밤이었다. 두번째로 좋은 의자는 방의 다른 쪽으로 옮겨져 있었고 나는 그 환자가 도착하기 전에 그의 의자에 미리 앉아 있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독서를 하는 척했다. 늘 그렇듯 같은 시간에 방에 도착한 그는 나를 오래, 그리고 말없이 쳐다보았다. 나는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같이 반응했다. 나에게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상기시키는 데 실패한 그 환자는 방을 둘러보며 또 다른 좋은 의자를 찾았다. 의자를 발견하자 그는 그것을 원래 있던 자리, 즉 내가 앉아 있던 의자 옆에 가져다놓았다. 그리고 그 환자는 정중하고, 적개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어조로 내게 말했다. "젊은이, 괜찮다면 나를 위해 저 의자로 옮겨 앉아줄 수 있겠나?" 나는 다른 의자로 이동했고 실험은 그렇게 끝났다. (286쪽 주 106)

내용과 거의 무관한 이 사회학자의 (연구) 형식을 읽어내는 것만이 이 어리둥절한 책에서 거둘 수 있었던 수확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말미의 '옮긴이의 말'을 먼저 읽고 독서를 하는 것도 괜찮겠다.

나는 곧바로 서론부터 읽기 시작해서 다 읽은 지금까지도 내가 뭘 본거야, 내가 뭘 본거지? 하며 헤맸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 너무나 어렵고 복잡한 맥락에 그야말로 꾸역꾸역 읽었다고 해야겠다.

어리둥절했다가, 기막힌 분석과 비유에 감탄도 하고, 무슨 말인지 현란한 표현에 잠깐 길을 잃기도 했다.

그러나 책장을 넘기기 시작해서 완독한 지금까지 긴 시간 동안 떠나지 않았던 한 가지 느낌은 고프먼이라는 학자의 치열함은 역시 명불허전이라는 것,

그리고 그의 연구가 책상 위에서 책과 자료나 넘겨가면서 한가롭게 진행된 게 아니라 범죄자와 미친자, 온갖 종류의 혐오스러운 상황과 장소에 맞닥뜨리면서, 악착같이 비정하고, 치밀하게 낱낱이 분석적 언어로 치환하면서 이룬 것임을 알았다.

그래, 이건 머리로 쓴 책이 아니야, 몸으로 쓴 책이지: 적어도 이걸 느낀 것만으로도 독서의 수확은 있었다.

결국 나는 책에서 내용을 학습한 게 아니라 고프먼의 악착같고 철저한 태도를 배운 것이며, 사실 그것이 이 책에서 스타일이 더 중요했다고 단정한 이유이다.

 

 

물론 재소자들은 출소 직후 시민적 지위가 제공하는 자유와 쾌락을 만끽할 수 있다. 그런데 이는 시민들에게는 대단한 사건이라고도 할 수 없는 평범한 것들이다. -신선한 공기와 신산한 향, 말하고 싶을 때 말하기, 성냥을 마음껏 써 담뱃불 붙이기, 네 명이 앉은 테이블에서 조용히 간식 먹기. 주말에 고향집을 방문하고 병원에 돌아온 한 정신병 환자는 귀를 기울이는 한 무리의 친구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들려준다.

"아침에 일어나서 부엌에 가서 커피를 내렸어. 굉장했어. 밤에는 맥주 몇 잔을 마시고 밖에 바람을 쐬러 나갔지. 정말 근사했고 진짜 맛있었어. 그 모든 자유의 순간이 잊히지 않아."(저자의 현장 연구 노트에서) - P95

특별한 존중의 제스처로 주어졌던 것도 얼마 정도가 지나면 당연시되어 통상적 기대치에 준하는 것이 되었다. 따라서 일종의 퇴행이 발생했다. 존중을 표하는 모든 새로운 방식은 일상화되어 결국 배려의 표식으로서 갖는 효과를 잃어버렸고, 따라서 추가적 베풂이 이를 대신해야 했다. - P337

조직이 열성을 요구하면 그들은 무관심으로 대응한다. 충성에는 불만으로, 출석에는 불출석으로 대응한다. 건강하라고 하면 아프다고 한다. 일을 해야 할 때는 온갖 나태를 부린다. 우리는 무수히 많은 소박하고 사소한 역사들을 발견한다. 각각의 역사는 고유한 자유의 몸짓을 담고 있다. 존재하는 모든 세계에는 지하 생활이 만들어진다. - P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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