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법諡法 - 한 글자에 담긴 인물 評
이민홍 지음 / 문자향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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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화와 서양화를 비교해보면 여백의 차이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 동양의 여백은 빈 공간이 아니라 그곳에 그린 사람의 나머지 마음이 존재해 있다는 점이다. 반면 서양화에서는 여백을 증오라도 하듯 빈 공간을 촘촘하게 채워버린다. 이런 서양적 사고와 동양적 사고는 곳곳에 존재한다. 서양과 동양의 차이 가운데 또 다른 하나는 휘諱라는 개념이다. 동양에서는 부모나 왕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다. 이를 위해  자字. 호號와 같은 대체 호칭법이 발전하였다. 반면 서양에서는 휘라는 개념이 동양만큼 까다로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서양 이름의 어미형인 -son은 '-의 아들'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잭Jack의 아들은 잭슨Jackson이 되고, 로빈Robin의 아들은 로빈슨Robinson이 되는 식이었다. 즉 서양에서는 부모의 이름을 꺼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에 적극적으로 융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서양의 왕들 역시 특정한 몇 개의 이름이 대종을 이루기 때문에 이를 구분하기 위해 1세, 2세, 3세 하는 식으로 구분을 짓고 있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왕의 신체적 특성을 따서 비만왕, 단구왕, 미남왕, 갈고리와 같은 별명을 붙여 부른다. 동양에서 이런 서양식 호칭법을 진시황이 처음 창안해 냈지만 그의 정치적 실험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그런 호칭법은 두번 다시 언급되지 않았다.

이후 동양의 왕들은 자신의 일생을 한 글자로 요약하여 붙이는 시호諡號를 받게 되었다. 이를 위해 시법諡法이 제정되었고, 이 시법은 사후 왕의 행적을 평가하는 주요한 근거로 활용되었다. 옛사람들은 시諡는 행위의 발자취이고, 호號는 공적의 표시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시법이란 한 인물의 행위와 공적에 대한 압축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우리 한국의 시법의 역사는 삼국시대에 시행되었다. 이때 시행된 시법은 한국 고유의 시법이었는데 이런 시법은 지증왕 이후 중국의 시법에 의해 공식적으로 종언을 고하였다. 한국에서 중국의 시법은 신라에 의해 주도적으로 시행되었다. 신라가 시행한 시법은 고려에 의해 계승되고 조선조에서는 이를 더욱 극밀하게 정비하여 완벽한 시법체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한국에서 시법을 행할 때 호는 우리 전래의 전통시법과 연계한 면을 드러내 보이는 반면 시는 중국의 시법 체계를 따라 부여되었다. 삼국시대부터 시호에 대한 문제는 신하가 과연 주군의 행업을 평가하여 올릴 수 있느냐는 문제였다. 하지만 이 문제는 하늘의 뜻을 빌어 대신한다는 것이라는 이론으로 비껴갈 수 있었다.

고려 시대에는 시호와 묘호 그리고 능호가 확실하게 정리되어 왕의 사후에 올려졌다. 고려의 시호는 모두 효孝자가 붙어 있는데 이는 '길이 천하를 소유하여 종묘에 제향을 받으며, 자혜롭게 부모형제를 사랑하고,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며 조야가 협력하여 새시대를 열기를 기원'하는 당대의 염원을 형상화한 글자였다. 이런 고려의 시법은 원의 통치 기간 동안 효에서 충忠으로 변경되었다. 그러나 원의 간섭이 끝나는 시기에 고려는 다시 효로 시호를 회복시켰다. 묘호는 시호와는 달리 중국식  조종법祖宗法에 의해 붙여진 것으로 고구려의 태조와 신라의 대종무열왕이 처음으로 시도하였다. 백제의 경우 멸망 때까지 중국식 묘호는 시조 온조왕 이외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능호는 전통적으로 외자이다. 그래서 역대 왕들의 능 이름은 모두 헌릉, 영릉과 같이 외자를 사용한다.  

시법은 과거가 현세인들에게 보여주는 권장과 징계이다. 과거인들은 자신들이 시행하는 시법을 엄숙 단정하게 사용함으로서 그 제도의 준정함을 강조하였다. 옛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매우 엄격하였다. 그것은 자신이 이 세상을 구성하는 개체가 아니라 주체로 파악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엄격함을 시법을 통해 새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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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아이 2005-08-02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렵다... ^^ 시와 호를 어떻게 구별하는지 궁금하네요. 이를테면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에서 "국강상광개토경"은 시, "평안호태왕"은 호인가요?

dohyosae 2005-08-02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구려의 경우 시보다는 호가 월등하게 많았고, 호도 묘호의 성격을 가진 것이었습니다. 기록에 나타난 고구려의 시호는 장수왕이 북위의 효문제에게 받은 "康"이 유일합니다. 그러므로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은 시라기 보다는 호라고 이해되는 것이...

숨은아이 2005-08-02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그럼 시와 호를 구별할 수 있는 다른 예는 혹시 없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