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 따먹기에 대한 철학적 고찰
테드 코언 지음, 강현석 옮김 / 이소출판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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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의 뒷 부분을 희극에 할애하려고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 부분은 망실되었는지 혹은 저술되지 않아서인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을 <카타르시스>라고 정의했는데 희극은 어떻게 정의를 내렸을까, 궁금해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사실 <농담 따먹기에 대한 철학적 고찰>은 골치아픈 책은 아니다. 저자는 분명하게 <어떤 우스개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목적으로 쓰이는지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생각>이라고 책의 앞부분에서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즉 상황과 목적에 촛점을 맞춘 농담에 대한 철학적 고찰인 셈이다.

저자는 우스개를 <닫힌 우스개> 와 <조건적 우스개>로 설명하고 있다. 닫힌 우스개란 우스개의 배경 조건이 지식이나 신념과 밀접하게 연결된 것이라고 정의한다.  반면 조건적 우스개는 듣는 사람의 기분과 기호, 선입견 등에 의존하는 것으로 일명 <정서적 우스개>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는 이런 설명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세익스피어의 햄릿에 나오는 대사  "수녀원에나 가시오"를 인용하고 있다. 햄릿이 오필리어에게 말하는 이 장면은 현대의 감각으로 보면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지만 당대의 상식으로 볼 때는 아주 미묘한 의미를 전하고 있다. 잉글랜드에서 엘리자베스 1세 시절에는 가톨릭이 금지되고 국교회 체제가 정립되는 시기였다. 이 당시 수녀원은 매춘굴의 속어로 쓰였다는 점이다. 이렇게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단어에 의해 장면의 느낌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스개가 하나의 고정관념을 형성하는데 이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들 역시 그 예로 지방색을 소재로한 많은 농담을 접한다. 그러면서 그 농담을 들을 때 무의식중에 그 우스개가 불편하면서도 어느 정도 신빙성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모든 우스개에 표현된 거의 모든 진술과 착상이 누군가 그것들을 믿게 될 경우, 다른 잘못된 주장들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오류"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예로 저자는 흑인 우스개를 들고 있다. <한 무리의 흑인들이 한 여성을 겁탈하려 할 때 벗어나는 방법은? 농구공을 던져주는 것>이라는 우스개를 분석하면서 우스개가 특정한 집단을 대상으로 할 때 어떤 오류의 위험속으로 빠져들 수 있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즉 우스개를 만드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설정한 규범에 그것을 끼워 맞추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우스개를 듣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그들이 의도한 것에 대한 공범이 되는 것이다.

사실 저열한 우스개에 대해 우리들이 방어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다. 하지만 그 저열함에 대해 분명한 의사 표시는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 저열함에 "그런 게 왜 필요하죠?"라고 물어 본다면 그 순간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 더 이상 회피하지 않고 정정당당히 맞서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신의 논리와 인간의 논리는 동일하다고 말한바 있다. 이 논리에 따른다면 인간의 우스개는 신의 우스개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신이 공평하고 무사한 분이라면 저열한 우스개는 신의 영역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그것은 인간의 시기와 분열속에서 태어난 사생아와 같은 것이다. 우리가 우스개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세상을 의식하는 능력과 그것을 평가하는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이 책은 그 의식과 능력의 경계선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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