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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랍인형
피터 러브제이 지음 / 뉴라이프스타일 / 1993년 5월
평점 :
품절
영국인들에게 빅토리아 시대는 영광의 시대로 기억된다. 하지만 여성들에게 있어서 이 시기는 억압의 시기이기도 하였다. 빅토리아 시대는 모든 것이 허용된 시대였다. 물론 남자들에게만. 반면 여성들은 자신들의 독립성이 유보된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 남성의 여성관은 과거보다 더 후퇴한 것처럼 보인다. 여성은 정숙해야하고, 보호되어야만 하는 존재라는 당시 남자들의 고정관념은 굳건한 하나의 원칙처럼 고수되었다. 이 결과 빅토리아 시대처럼 성에 대해서 이중적인 잣대를 들이댄 시대도 없었다. 도시의 번화가에서 한걸음만 뒷골목으로 들어서면 거기에는 또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이 세계에서 여성은 정숙하고 보호되어야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음탕하고 학대받는 개체로 존재하였다. 이런 이중적인 모순을 당시의 남자들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다. 이들은 쾌락의 상대는 뒷골목에서 찾았지만 결혼상대는 도시의 앞면에서 찾았던 것이다.
밀납인형이 묘사하는 세계는 이런 이중성의 세계인 것이다. 피아노 다리도 그대로 노출되면 안된다고 하여 가리개 양말을 신겨놓았던 그 시대에 살았던 여성들은 어쩌면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의 한 장식품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이 시기에 자신의 독립을 부르짖던 여성들은 사회의 냉대와 무관심 속에서 좌절을 맛보아야만 했다. 여성에게 모든 출구가 봉쇄된 사회에서 여성들이 자신의 의지를 관철할 수 있는 길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 뒤틀린 사회에서 출구를 찾을 수는 있었을까?
마담 타소가 만들었다는 런던의 명물인 밀납인형 박물관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들을 정교하게 밀납으로 복제하여 전시하는 곳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각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특유의 모습으로 영원히 시간을 정지한 채 고정되어 있다. 작가는 밀납인형을 통해 한 시대의 왜곡된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간혹 추리소설에서 뜻밖의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다. 피터 러브제이의 이 작품 역시 그런 경우라 할 수 있다. 추리소설속에 숨겨져 있는 사회상을 느꼈을 때 그 소설의 묘미는 한층더 비극적으로 다가오게 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