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고라니는 말한다
J.G. 니이하트 지음, 김정환 옮김 / 두레 / 2002년 11월
평점 :
절판


예전에 <솔저 블루>라는 서부영화를 본 적이 있다. 서부영화라면 시종일관 기병대와 인디언의 총질이오고가는 영화로 인식되던 시절 이 영화 역시 그런 범주의 영화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영화속의 내용은 너무나 지루하였다. 나는 이제나 저제나 총질 장면이 나오기만을 기다렸지만 내가 원하는 식은 아니었다. 나중에 정말로 총질을 하는 장면이 나왔지만 그것은 인디언을 일방적으로 학살하는 기병대의 모습이었다. 그 장면은 결코 신나는 장면이 아니었다. 오히려 총질이 그렇게 지루하게 느껴졌던 적은 없었다. 어서 빨리 총질이 끝나기만을...

영화속의 인디언은 언제나 점잖고 예의를 지키며 신의를 존중하는 군상들이었다. 물론 간혹 나쁜 인디언이 나오기는 했지만 백인 영화제작자들은 이런 인디언은 잘 드러내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점잖은 인디언 혹은 주정뱅이 인디언만을 보여줌으로서 그들이 왜 자신들에게 땅을 빼앗겨야만 했는가를 교육시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실 인디언의 목소리는 미국이라는 거대한 사회에서 소수의 목소리에도 끼지 못한다. 그만큼 인디언들은 미국의 주역이었으면서도 잊혀진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검은 고라니는 오글라라 수우 족의 예언자였다. 그는 어린 나이에 자신의 부족을 구원할 위대한 계시를 받았지만 결코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없었던 불행한 예언자이기도 하였다. 오히려 위대한 예언이 이루어지기 보다는 자신의 예언을 이루어줄 인디언의 위대한 전사들이 하나 둘 백인들의 총에 희생되어 가는 것을 보아야만 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특히 부족의 가장 위대한 전사였던 미친 말-크레이지 호스-이 동족과 백인의 손에 어이없이 30의 나이에 죽어가는 장면에서는 부족의 희망 역시 함께 사라져 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만큼 인디언들은 미친 말의 죽음에 큰 상실감을 맛보아야만 했던 것이다. 미친 말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이후 인디언 부족의 위대한 전사들이 하나씩 백인들의 간교한 술책에 말려들어 죽어갔던 것이다. 붉은 구름, 앉은 소, 큰 발.. 끝없이 이어지는 위대한 인디언 전사들의 명단을 보노라면 왜 젊은 인디언들이 보호구역에서 알콜에 찌들어 스스로를 죽음의 길로 몰아넣었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

백인은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인디언 전체의 희망을 죽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검은 고라니는 이런 인디언의 무력감을 담담하게 증언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인디언의 종말은 백인들에게 대평원을 빼앗긴 그 순간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대평원이란 인디언의 고향을 되찾지 못하는 한 인디언은 죽은 인디언이고, 죽은 인디언은 백인들에게는 좋은 인디언인 것이다. 하지만 검은 고라니는 이런 역사적 현실 앞에서 좌절하지 않는다. 검은 고라니는 역사의 현실을 받아들이지만 언젠가는 이루어질 위대한 예언을 가슴에 희망으로 품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은 끝장이 났던 것이다. 얼마나 많은 것이 끝장났던가를 그때는 잘 몰랐었다. 이제 이 늙은 내 나이의 언덕 꼭대기에서 되돌아보아도 아직도 그 꾸불꾸불한 협곡을 따라 온통 무더기로 쌓여 있고 널려져 있던 그 살육당한 여인네들과 어린애들의 시체가 나의 젊을 때 눈에 비치던 그것처럼 선명하게 보인다. 그리고 나는 그때 피범벅이된 진흙창 속에서 죽어 눈보라에 파묻혀버린 또 다른 무엇도 볼 수 있다. 한 겨례의 꿈도 그곳에서 죽었던 것이다. 그것은 아름다운 꿈이었다. 그리고 나, 젊었을 때 그렇게 위대한 계시가 주어졌던 나는, 당신이 보다시피 이렇게 아무 한 일이 없이 비참한 늙은이가 되어버렸다. 겨레의 둥근 테는 부서지고 흩어져버린 것이다. 그것의 중심이 이미 사라졌고 성스러운 나무는 죽고 말았다.>

정녕 무너진 꿈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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