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황제 - 최고 수준의 중국 역사 문화답사기
진순신 & 오자키 호츠키 엮음, 김정희 옮김 / 솔출판사 / 2002년 3월
평점 :
절판


제국의 마지막 황제가 된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기도 하다. 망국의 과오가 그 한사람에게 집중되기 때문이다. 역사의 인과관계를 떠나서 마지막 황제는 언제나 무능의 정점에 서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망국의 황제에 대한 기록은 새로운 왕조의 붓끝에 의해 기록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역사적 부당성은 그들에게만 집중된다. 이들에게 주어지는 단어 또한 천편일률적으로 유사하다. 포악, 무능, 음란... 정말 마지막 황제들은 그랬을까, 이 책은 이런 마지막 황제들에 대한 보기드믄 변명서이자 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다루고 있는 황제는 隋, 宋, 明의 煬帝, 徽宗, 崇禎帝  세명이다. 중국 역사에서 이들 세명의 왕들이 속해있던 제국은 의미있는 왕조였다. 수 왕조는 후한 이후 분열되어 있던 위진남북조시대를 마감하고 통일 중국의 시대를 다시 열었던 것이다.  송 왕조는 胡漢혼혈왕조였던 당이 붕괴되고 분열된 오대 십국의 시대를 마감하고 漢이래 순수한 한족이 다시금 왕조를 열었던 것이다.  명 또한 몽골의 원을 축출하고 중국의 자존심을 회복시킨 왕조였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들 세 왕조의 뒤를 이은 것은 모두 유목민계통의 왕조였다는 점 또한 흥미롭다.

수의 양제의 업적으로 유명한 것은 대운하라고 할 수 있다. 이 대운하는 히틀러의 아우토반과 유사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점이 재미있다. 양제의 대운하는 회수와 장강 사이의 중원지방을 관통하는 것으로  이를 통해 남북의 경제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중국은 급속한 발전을 이룰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후세의 역사는 이 거대한 경제 인프라 구축을 양제의 유흥을 위한 것으로 축소하였던 것이다.  수의 양제는 진의 시황과 마찬가지로 황제적 질서를 구축하려고 노력하였던 인물이었다. 이런 그의 야망은 중화세계의 이상을 건설하려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세상의 중심에 황제인 자신이 있고 동서남북에 조공국이 있는 고대의 질서를 형성해 나가는 과정에서 고구려라는 뜻밖의 상대를 만남으로서 그가 구상한 제국의 질서가 붕괴되었다는 점이다. 양제는 2차례에 걸친 고구려 정벌을 실패함으로서 자신의 목숨뿐만 아니라 제국까지도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사실 방향을 다르게 잡았다면 훌륭한 제왕의 길로 나갈 수도 있었다. 즉 외적인 확장보다는 내적 치국의 방향으로 잡았다면 수 제국은 중국의 당당한 역사 속에 편입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창업의 군주로서 그는 방향을 잘못 선택함으로서 모든 오명을 뒤집어 쓰고 역사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그가  세운 제국을 딛고 일어선 국가가 중국역사 가운데 가장 활달하고 국제적 성격이 강했던 당이라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정말로 크다고 할 수 있다.

송의 휘종을 처음 접한 것은 서예를 통해서였다. 송 휘종의 수금체라는 글씨는 서예의 역사에서도 언급될 정돌 유명한 글씨체이다. 풍류를 즐기고 글씨를 잘 썼던 황제, 그리고 수호지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황제의 이미지가 전부였다. 이런 조각난 정보가 하나로 합쳐지면 송 휘종에 대한 엄청나게 부정적인 이미지로 증폭될 수 있다는 점이다. 수호지의 예를 들어보자. 수호지에서는 양산박에 모인 108인의 호걸이 선이고 그 반대편의 세력은 악이라고 규정된다. 여기서 송 휘종은 108인의 선을 수용하지 못한 편협하고 치졸한 천자일 수 밖에 없다. 물론 나중에 108인의 호걸들이 송 휘종에게 충성을 맹세함으로서 그 시대의 봉건적 질서의 유지라는 명분을 충족시켜주고 있기는 하지만...  송은 중국 역사상 가장 문치주의적 색채가 강했던 왕조였다. 그래서 흔히 송 시대는 문약하다는 수식어를 붙이고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송 휘종이 재위에 있었던 송은 당시 부라든가 인구와 같은 수치적인 면을 봤을 때 멸망이라는 단어를 언급하기가 약간은 어색할 정도이다. 그럼에도 송이 여진족의 타격에 간단히 무너짐으로서 중국인들의 자존심에 커다란 구멍을 만들었다. 결국 송은 강남으로 옮겨 왕조의 명맥을 이어가지만 그것은 구차한 연명이었던 것이다.  휘종의 초서 천자문을 보고 있자면 예술가로 성공한 황제의 모습에 미술가로 실패한 히틀러가 겹쳐져 생각난다.  이들의 삶은 민중의 삶에 대한 배반의 삶인지도 모른다.  

명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는 이자성의 반군이 들이닥치자 공주들을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 목매 자살하였다. 그 당시 황제의 모습은 머리에는 황제의 관도 없었고 한쪽발은 맨발인 채였다고 한다. 천하를 호령하던 황제의 마지막 모습치고는 초라한 느낌이 든다.  명의 멸망의 조짐은 숭정제의 조부인 만력제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그것은 레이 황의 <1587년 아무 일도 없었던 해>라는 책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이 시기에 명은 이미 자체적인 정화기능을 상실한 신부전 현상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숭정제가 제위에 오른 것은 이런 모든 조건을 그대로 계승한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숭정제 역시 자신이 계승한 왕조의 문제를 깊이 인식하고 있었고 이를 개혁하려 했지만 자신이 그속에 함몰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만큼 부패와 부정의 뿌리는 깊었던 것이다. 그리고 명조는 중국 역사상 가장 황제의 독재권이 강했던 국가였다. 그래서 이런 국가적 시스템이 마비가 되어도 이를 조정할 건전한 비판문화가 제대로 형성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 결과 명은 자신이 만든 시스템에 의해 질식했던 것이다.

솔직히 마지막 황제들에게 어떤 연민을 느끼지는 않는다. 그들은 싫든 좋든 간에 하나의 제국을 책임졌던 최고 통치자였다는 점은 불변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앉아있던 그 자리가 최종적인 결정이 행해지는 자리였다는 점을 좀더 분명하게 인식했어야 했다는 점이다. 그 책임의 분명한 인식이 전제되는 한 그들은 역사속에서 유죄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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