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연금술사
이안 맥칼만 지음, 김흥숙 옮김 / 서해문집 / 2004년 1월
평점 :
절판


18세기 유럽은 불온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너무나 오랫동안 중세의 끝자락을 붙들고 있었기 때문일까, 종교도 더 이상 유럽인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이성이 그 자릴 차지해야만 했지만 이성을 이해하기에는 농민들은 너무나 무지했다. 18세기 유럽은 <도시는 사악했고, 농촌은 무지>했다. 사악함과 무지함은 이성의 발전에는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었다. 오히려 이것을 구실로 더욱더 기존의 권력이 강화되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도시와 농촌에서는 무엇인지 모를  움직임이 느껴지고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당시 이런 유럽을 휘젖고 다닌 2명의 유명한 인물이 있었다. 이들의 행적을 조사하는 것만으로도 당시 사회상을 추측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들의 이름은 한명은 지오반니 카사노바Giovanni Casanova1725-1798였고 다른 한명은 주세페 발사모Giuseppe Balsamo 1743-1795였다.

이들은 18년의 차이를 두고 태어났지만 역사적으로 평가되는 것은 아주 상반되어 있다. 카사노바가 호색적인 명성만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반면 주세페 발사모는 아주 다양한 무늬를 제공하고 있다. 그는 이탈리아의 가장 가난하면서도 기질이 사나운 시칠리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런 환경은 거치른 18세기를 헤쳐나가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지만 반대로 섬세함이 필요한 곳에서는 장애물로 등장하기도 하였다. 주세페 발사모는 후일 알렉산드로 칼리오스트로 백작Count Alessadro Cagliostro로 알려지게 된다. 이 이름은 현재의 독자들에게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1979년작 <아르센 루팡:칼리오스트로의 성의 비밀Arsene Lupin and the Castle of Cagliostro>라는 만화영화가 생각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만화에서도 칼리오스트로의 성을 묘사하는 장면에서는 기괴한 함정과 음산한 분위기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칼리오스트로라는 인물이 어떻게 우리들에게 알려지고 있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

사실 역사적 인물로서 칼리오스트로 백작은 사기꾼이고 협잡꾼의 범주에 들어갈지도 모른다. 그가 일생동안 사칭한 직업만도 가톨릭 수사, 의사, 연금술사, 프리메이슨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는 자신의 변화가 필요한 곳에서는 항상 새로운 인물을 창조해낸 인물이었다. 그는 18세기 유럽이라는 시대를 정말로 잘 이용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시대를 이용할 줄만 알았지 미래를 보는 눈은 없었던 것 같다. 즉 그 자신이 역사적 톱니바퀴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한 인물이었다는 뜻이다. 물론 자신의 역할을 명확하게 이해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자신의 시대에 자신의 사명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그 사명감 속에서 역사적 역할을 수행하려 노력한다. 하지만 칼리오스트로는 그것이 없었다. 그러기에 그는 러시아의 에카테리나 여제에게 갔을 때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지 못하였다. 마찬가지로 프랑스에서는 루이 16세와 황후인 마리 앙투와네트의 보석목걸이 사기 사건에 이용되는 우를 범하기도 하였다. 사실 이 보석 목걸이 사건은 프랑스 혁명의 한 원인을 제공할 정도로 사회적 파장이 큰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칼리오스트로는 자신이 이 사건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칼리오스트로 백작 만큼 가톨릭에서는 이단자로, 프로테스탄트에서는 위험한 인물로 보수주의자에게서는 진보적인 자로, 진보적인 자에게서는 보수적 잔재가 남은 자로 매도된 사람은 드믈다. 그는 어느 계층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하였다. 그는 오직 자신만의 삶 속에서 살아간 인물이었다. 이와 유사한 인물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없이 세르반테스가 창조한 돈퀴호테를 꼽겠다. 그만큼 칼리오스트로는 자유분방함을 추구한 교활한 사기꾼이었다. 그는 결국 자유스런 사상의 전파자라는 누명(?)을 쓰고 산 레오 감옥에서 쇠사슬에 묶인채로 2번의 뇌일혈 발작을 일으킨 끝에 죽고 만다. 그리고 그의 시신은 서둘러 매장되고 그의 존재를 알리는 모든 것은 소멸되었다. 바로 이런 비밀스러움이 그의 죽음 이후 신화로 발전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이 신화는 음모론으로 발전하고 결국에는 칼리오스트로 대신 유대인이 그 자리를 차지하면서 후에 인종학살의 실마리를 제공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신화를 대중화하는데 이탈리아의 철학자이며 작가인 움베르토 에코의 공이 컸다. 그는 푸코의 진자라는 소설에서 칼리오스트로를 프리메이슨,일루미나시오, 템플러기사단, 로젠 크로이츠와 연관시켜 사기꾼을 역사의 선구자로 탈바꿈 시켜 놓았다. 즉 칼리오스트로는 혁명과 모반의 주모자로 각색되어 버린 것이다. 또 영국의 위대한 사상가인 칼라일은 칼리오스트로를 불멸의 혁명가 대열에 위치시킴으로서 영원의 이름을 얻게 만드는 단초를 제공했다는 사실이다.

사실 칼리오스트로의 행적을 읽어보면 별로 인상적인 부분은 없다. 오히려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귀족들과 성직자들을 상대로 사기치는 행위만이 보일 뿐이다. 그리고 권력자를 이용해 자신의 능력을 과시해 보려는 허영의 인물인 것 처럼 보인다. 그런 그는 살아있을 때부터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았고, 죽어서는 그 오해의 바탕 위에 신화가 덮씌워졌다. 그래서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카사노바는 자신이 사람들로부터 경시되는 반면 칼리오스트로는 숭배되는 것을 무척 가슴아파 했다고 한다.

칼리오스트로 백작이 오늘날 사람들에게 약간의 관심 대상이 되는 것은 에코의 말대로 그는 포스트 모던 시대의 예언자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즉 칼리오스트로는 공허한 상징이라는 것이다. 물질적 풍요속에 드러나는 정신적 빈약함으로 인해 나타나는 공허감을 채우기 위해 서구인들은 다양한 실험-폭주족, 히피, 마약등등-을 하였다. 하지만 그 공허함은 채워지지 않는 부분으로 남아있다. 마찬가지로 칼리오스트로의 행적을 보면 너무 뻔히 들여다 보이는 평범함 때문에 지루하다. 바로 이 점이 공허함속에 매몰되어  현실감각이 상실된 사람들에게 다양한 환상을 제공할 여지가 있기에 인기가 있다는 것이다. 에코의 이 말에 80%는 동의한다. 하지만 나머지 20%는 내 상상의 몫으로 남겨둘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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