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옥스퍼드 영국사 - 반양장
케네스 O.모건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구입한 것은 순전히 조세핀 테이의 <시간의 딸>이란 책의 한 구절 때문이었다. <남자의 초상화였다. 15세기 후기풍의 빌로드 모자와 몸에 꼭 맞는 옷을 입었으며, 35-6살쯤 되는 늘씬하고 수염을 깨끗이 깍은 사나이였다. 훌륭한 보석이 박혀있는 목걸이를 걸고, 오른손 새끼 손가락에 반지를 끼려는 참이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반지를 보고 있지 않았다. 어딘지 먼 곳을 보고 있었다. 오늘 오후 글랜트가 본 초상화 가운데 가장 개성적인 얼굴이엇다. 마치 이것을 그린 화가가 자신의 재능으로는 도저히 다 표현해 내기 어려운 무언가를 캔버스에 그려내려고 필사적으로 애쓴 것 같았다.> 이 초상화의 주인공은 세익스피어에 의해 꼽추로 묘사된 희대의 악마인 리처드 3세이다. 여기서 묘사된 그의 초상화가 어떤 모습인지 전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서점에서 이 책을 뒤적이다 리처드 3세의 초상화를 본 순간 위의 묘사와 너무 일치함을 느끼고 충동적으로 책을 구입하였다. 하지만 차근히 읽어보니 영국사에 대한 완벽한 가이드라인을 제공하는 책이면서 깊은 지식도 함께 얻을 수 있는 책이었다.
이 책은 영국사를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앙드레 모로아의 <영국사>와 함께 꼭 권하고 싶은 책이다. 앙드레 모로아의 영국사가 프랑스인의 관점에서 기술된 것이라면 이 책은 순수한 영국인들의 손으로 기술된 역사책이다. 프랑스인들은 영국 역사의 일부가 자신들의 역사 속에 편입되어 있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한다. 영국인들은 그 반대겠지만...모로아의 책이 영국역사의 입문서 구실을 한다면 이 책은 영국사를 본격적으로 이해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번역자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이 책은 가볍게 읽어가기에는 약간 부담스런 책이다. 사실 유럽사에서 영국의 역사는 제3자의 눈으로 볼 때 아주 개성있는 것으로 보인다. 섬이라는 지리적 고립에 의한 그들만의 독특한 역사발전 방식은 이웃 프랑스의 역사와 비교해 보아도 확연히 구분됨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는 잉글랜드의 역사에 대한 자부심이 곳곳에 드러나고 있다. 영국은 대륙과 고립되어 있음으로해서 자신들만의 고유한 방식을 발전시켜나갈 수 있었다. 이런 문화적 토대위에 정복왕 윌리엄이 대륙의 새로운 제도를 가지고 잉글랜드에 상륙함으로서 두 문화는 혼합을 이루게되고 영국인들이 영국적인 것이라고 부르는 것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 책을 읽어가면서 느낄 수 있는 영국 역사의 정신은 끈질김이란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영국의 상징동물을 흔히 불독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영국역사의 감성은 불독과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좋게 보아 끈질김이지 다른 시선으로 보면 철저한 자국 중심의 집요함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다. 이런 영국의 집요함은 프랑스를 대륙의 강국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인것과 러시아의 남진을 막기 위해 온갓 수단을 다 사용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합의를 존중하는 합리적인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이는 섬이라는 영국의 한계성이 도달한 가장 훌륭한 정신이라고 보고싶다. 상대를 부정하는 파멸이 아니라 상대를 자신의 견해에 이끌어 들이는 합의의 정신은 보편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철저히 권력집단과 섬 안에서의 양해사항이었다. 이들은 대륙 바깥에서는 결코 이런 합의의 정신을 발휘한 적이 없다. 오직 무력으로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만을 우선적으로 고려했을 뿐이다. 보어전쟁, 세포이 반란에서 보여준 제국주의 영국의 모습은 합리성이라는 것보다는 무자비함을 드러내주는 것이었다.
이 책은 시대별로 기술하기보다는 왕조별로 기술해 나가기 때문에 영국사가 어떻게 단절됨이 없이 왕조에서 왕조로 이어지는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휘되는 영국인들의 전통에 대한 강박관념에 가까운 집착 또한 엿볼 수 있다. 바로 이 집착이 영국이라는 사회를 이루어낸 한 요소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책을 마지막까지 읽다보면 정복왕 리차드에서부터 지금의 여왕에 이르기까지 족보상 하나로 연결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래서일까 책에 나와있는 왕 혹은 여왕들의 초상화를 과거에서 현재로 혹은 현재에서 과거로 훑어보면 이상하게 닮은 얼굴들이란 느낌을 갖게한다는 점이다. 바로 이런 점들이 영국사가 갖는 자부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