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이름 창작노트 - 양장본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3월
평점 :
절판


창작노트라고 하는 것은 글을 쓴 사람의 원초적인 생각을 엿볼 수 있는 틈이 아닐까. 그 틈에 나의 쐐기를 박아 넓히고 싶은 마음... 그러기 위해서는 공유되는 부분 혹은 내가 읽었던 부분을 작가가 언급할 때 얼마나 기쁜가. 이 책을 읽으면서 나 역시 이런 경험을 했다. <누가 말하는가?>의 부분에서 5명의 화자가 똑같은 내용의 말을 주고 받지만 상황에 따른 변화의 폭이 제시되고 있다.  여기서 독일의 성서학자 궁켈의 <삶의 자리> 이론이  접목된 것을 알았을 때 나는 분명히 에코로 들어가는 문의 열쇠를 하나 얻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뒤로 넘어가면서 짧은 내용 속에 너무 많은 내용을 집어 넣은 글을 보았을 때 에코라는 사람의 보폭이 상당외로 넓음을 알고 체념하고 말았다. 어차피 한 인간의 두뇌를 쫓아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다만 그 사람의 글에서 나의 공감대가 1%만이라도 발견된다면 그와 같이 역사를 공유하는 것이라고 위안을 받을 수 밖에...

에코는 이탈리아인이면서 기호학을 전공하였고, 이를 통해 중세를 바라보고 있다. 중세의 모습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할 수 있다. 그 다양함은 중세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형성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중세가 푸른색이라고 하지만 어떤 사람은 주홍이라고 하기도 한다. 중세를 하나의 색으로 규정짓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에코 역시 중세의 모습을 기술할 때 중세에 대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중세에서 쓰고자 노력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래서 아드소가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으로 시점을 잡았던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이 소설을 독파하는데 어려운 점이다.  읽는 사람이 중세인이 되지 않는다면 그 자체의 이야기에서 수도사들의 세력다툼과 속물근성만을 볼 수 밖에 없다. 특히 둘치노파에 대한 이단의 이야기는 수도사들의 입을 통해 재판의 과정에서 잠시 잠시 언급된다. 이것을 자세히 알지 못한다면 종교심문관에 대한 윌리암의 두려움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장미의 이름 맨 마지막 부분에 Stat rosa pristina nomine, nomine nuda tenemus란 문장이 나온다. 그 내용은 장미는 예로부터 그 이름으로 존재해 왔으나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영락한 이름뿐이란 뜻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 로사-장미-는 로마의 잘못이라는 설이 있다. 로사를 로마로 바꿔 다시 해석해보면 로마는 예로부터 그 이름으로 존재해 왔으나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영락한 이름뿐이다. 오히려 이것이 더 그럴듯 하지 않은가.  이 시는 베네딕트 수도회의 베르나르가 쓴 <어디있느뇨?Ubi sunt>의 한 귀절이라 한다.

Est ubi gloria nunc Babyloniae 바빌론의 영화는 어디로 갔는가

O quam salubre, quam jucundum et suabe est sedere in solitudine et tecere et loqui cum Deo  홀로 적막안에서 침묵하고 하느님과 더불어 대화를 나눔이여, 참으로 즐겁고 감미로워라.

Stat rosa pristina nomine, nomine nuda tenemus  장미는 예로부터 그 이름이 존재해 왔으나 이제 우리에 남은 것은 영락한 이름뿐

바빌론의 댓구는 로사보다는 로마가 훨씬 더 합리적이지 않은가. 아마도 필사실의 손이 곱은 수사가 겨울의 추위에 Roma를 Rosa로 잘못 필사한 것은 아닌지.   내 개인적으로는 이 장면이 이 소설의 핵심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누가 아랴...이 책을 읽으면서도 나는 내 확신에 확신을 가질 수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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