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1
주강현 / 한겨레출판 / 1996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어린 시절 동네 집 앞에 금줄이 쳐진 집을 보면 우선 먼저 무엇이 달려있는가를 확인하였다. 붉은 고추가 달려있다면 남자가 태어난 것이고, 숯과 솔가지 달려있다면 여자가 태어난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대문에 걸린 금줄을 다시 한번 바라보면 이상하게도 그 집 앞에서는 함부로 행동할 수 없게 만드는 그 무엇이 있었다. 누런 짚의 색깔과 우중충한 나무 대문의 조화 속에서 금줄은  더욱 더 어린 나에게 경외심과 두려움을 주었는지도 모른다. 금줄은 결코 두려운 표식이 아니었다. 오히려 기뻐해야만 하는 표식이었지만 그 줄이 걸린 집 앞에서 왜 떠들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이제 금줄을 치는 집은 거의 없다. 아니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시에서는 금줄을 치기 위해 구해야하는 볏짚도 그렇거니와 왼새끼를 삼을 줄 아는 사람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우리의 문화 하나가 서서히 사라지는 모습을 볼 때 약삭빠른 장사치들이 왜 금줄 산업에는 손을 안 대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구한말 이래 일제 36년의 지배를 거쳐 오는 동안 우리들에게는 전통과 퇴보라는 공식이 기억 속에 자리 잡게 되었다. 이후 우리의 전통은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철저하게 배척되어야만 하는 장애물로 인식되었다. 그 결과 초가집으로 상징되던 우리의 전통적인 스카이라인이 사라지면서 그에 부수된 흔적들이 하나 둘 우리 곁을 떠나갔다. 그래서인지 이제 나는 호젓한 시골길을 걸을 때 나타나는 서낭당을 보고도 침을 세 번 뱉어내고 깨금다리로 내 나이숫자만큼 뛰어가지를 않는다. 어린 시절 아무리 바쁜 걸음이더라도 서낭당을 만났을 때는 우리 모두 이 엄숙한 의식을 꼭 치루고 고개를 넘었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왠지 불안했기 때문이다. 그 불안함은 이제 하나의 추억으로 변했을 따름이다. 뭐랄까, 두려움을 보고도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전형적인 무감각한 현대인이 된 것이리라.

  초등학교 1학년 때인가, 우리 동네에 돼지를 키우는 집에 엄청나게 큰 돼지가 들어왔다는 소식이 들렸다. 우리들은 방과 후 그 친구 집에 들러 새로운 돼지를 구경하였다. 그 돼지는 정말로 엄청나게 큰 돼지였다. 허연 털에 붉은 속살이 살며시 내비치는 <누룩저지>인가하는 이 돼지는 옆 우리에서 정신없이 먹이를 먹어대는 재래종 돼지를 강아지처럼 보이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그 친구 집에 서양돼지가 등장한 이후 우리 동네 돼지 축사에서는 검은 털에 하얀 주둥이가 귀여운 우리의 토종돼지들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듬해 여름 내가 서울로 떠날 무렵에 우리 동네의 돼지는 거의 서양돼지로 바뀌어 있었다.

  문화와 전통의 소멸은 이렇게 소리 소문 없이 그러나 아주 급속하게 진전된다. 그러면서 전통은 자신의 흔적조차 남겨놓지 않고 사라진다. 그래서 한 번 잃어버린 전통을 찾는 다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다. 이는 전통은 사람과 함께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바로 그 시대의 전통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청바지문화 속에 살고 있다면 먼 훗날 이 시대를 바라보는 우리의 후손들은 우리를 청바지문화 혹은 전통을 가진 세대로 부를지도 모른다. 청바지 외에 다른 것을 접해보지 못한 이 세대에서 다른 전통의 흔적을 찾기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전통이란 사람이 사라지면 함께 사라지는 것이다. 

  즉 전통이란 우리의 삶과 함께 이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보는 전통, 혹은 읽어 내려가는 전통은 결코 진정한 전통이 아니다. 그것은 죽은 전통이며 또 다른 전통의 훼손인 것이다. 얼마 전 네티즌들 사이에서 일본의 한 프로축구단의 심벌마크가 <삼족오三足烏>라는 사실을 가지고 설전이 벌어졌던 일이 있었다. 네티즌들은 삼족오가 고구려의 문양이기 때문에 이를 당장 찾아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네티즌들의 이런 주장이 정말로 두려웠다. 그들에게 우리의 고유한 전통이란 한갓 창고 속에 처박혀있는 고형화 된 유물로 인식되어있는 것은 아닌지... 내가 사용하지 않는다면 결코 남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그런 마음은 아닌지... 진정한 우리의 문화는 고립된 것이 아니라 이웃도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일 때 진정한 가치를 뽐낼 수 있고, 자부심을 갖게 되는 것이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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