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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1000년과 서기 2000년 그 두려움의 흔적들
조르주 뒤비 지음, 양영란 옮김 / 동문선 / 1997년 6월
평점 :
절판
12세기 중엽 중세기의 가장 매력적이고 흥미있는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인 피오레의 요아킴은 가톨릭의 전통적인 삼위일체 교리를 거슬러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이 삼위일체성이 아니라 사성四性을 내포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요아킴에게 있어서 성부.성자.성령에 이어 제4성이 되는 것은 교회와 그 지체처럼 윤리적인 집합이었다. 요아킴의 취지는 하느님을 재차 인간을 위해 개방시키고 내재적 삼위일체를 돌파하고 체험의 영역으로 이끌어 들이는 것이었다. 요아킴에 따르면 인류는 세 개의 시대 속에서 생활하였다. 첫번째 구약의 시대에 인류는 성부를 대하게 된다. 이 시대는 율법의 시대이며 육신의 시대이며 신도들의 시대이다. 두번째는 신약의 시대로 성자가 지배한다. 이 시대는 제도로서의 교회의 시대요 성사와 성직자들의 시대이다. 이 시대는 세번째 시대인 성령의 시대에 의해 소멸된다. 이 시대는 순수한 영성적 시대이며 교회는가난한 자들의 교회가 된다. 요아킴의 이런 주장은 1215년 라테란 공의회에서 단죄받는다. 하지만 그의 지상왕국의 개념은 후일 많은 시대에 걸쳐 영향을 끼치게 된다.
중세의 1000년은 이렇게 천상의 왕국이 지상에 구현될 것이란 희망 속에서 살아온 기다림의 시대였다. 그러기에 중세의 고통받는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닥친 모든 고통을 새로운 시대가 찾아오는 하나의 징표로 이해하였다. 이런 중세인들의 사고에는 요아킴의 주장이 아니더라도 깊이 깊이 각인된 하나의 다가올 역사였던 것이다. 얼마나 질서정연한가. 구약의 시대. 신약의 시대. 성령의 시대라는 구분에서 이제 자신들이 맞이할 시대가 가난한 자들을 위한 성령의 시대라는 사실은 큰 매력이었다. 그렇기에 중세 유럽의 1000년의 근저에는 유토피아에 대한 농민의 갈망.열망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갈망이 존재하는 한 외적인 고통이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을까. 아마도 미미한 정도였을 것이다.
저자는 중세 1000년의 시기를 이야기하면서 기간은 1000년에서 1200년 사이의 유럽을 조명하고 있다. 그러기에 이 책에는 두려움과 희망이 혼재하고 있다. 중세인들은 두려움과 희망 속에서도 하나의 징표를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혹시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지상의 종말이 오고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 때 자신만이 홀로 낙오되지 않도록 항상 깨어있으려고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 신앙적 열성이 페스트를 이기고, 굶주림의 고통을 잊게했으며, 공동체간의 강렬한 유대를 형성하게 하는 힘이었다. 이 위대한 신앙의 힘으로 중세인들은 영광스럽기도 하면서 고통스러웠던 1000년의 터널을 벗어나게 된다. 하지만 그들이 그 터널을 벗어났을 때 자각한 것은 신의 위대함보다도 인간의 정신이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런 중세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2000년의 언저리에서 컴퓨터 오작동에 대한 고민으로 날밤을 새우던 현대인들의 모습이 생각난다. 이들에게 새로운 2000년은 단지 숫자의 바뀜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숫자의 바뀜으로 인해 전에 쌓여있던 모든 문제가 자동적으로 Del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이런 현대인들의 고민은 중세인들의 고민과는 전혀 다른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중세인들이 고통의 끝에서 신과 인간의 이성을 믿었듯이 현대인들은 이 시대의 끝에서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 과학이라고 믿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중세인들이 1000년의 언저리에서 느꼈던 불안과 미래에 대한 상상이 희망이었듯이 우리들 역시 2000년의 시작에서 그런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