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르 사전 - 남성판
밀로라드 파비치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1998년 12월
평점 :
절판


언젠가 친구들을 만나 한잔 술을 곁들이며 이야기를 나눴던 적이 있다. 우리들은 이야기 속에서 자연스레 과거의 한 시점으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서로와 나누었던 경험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하나의 사건에 대하여 각자 시각이 다름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사건을 보는 시점은 아주 미묘했지만 확실한 것은 그 사건의 중심에 말하는 자신이 놓여있다는 사실이었다.

하나의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은 언제나 현재의 삶이 투영된 과거이다. 이런 시점은 자칫하면 <만약에>라는 가정으로 흘러갈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한 예로 러시아가 그리스 정교를 받아들이게 된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러시아인들은 술을 좋아해 음주를 금지하지 않는 종교를 택했다는 것이다. 이 무식한 농담은 러시아인의 국민성으로 고착되고 여전히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은 러시아가 정교를 선택한 것은 아주 정치적인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역사에서 조차 고려되지 않고 있다.

카자르 사전은 카자르족이란 한 민족이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가운데 한 종교를 선택하여 개종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책은 기독교의 레드북, 이슬람교의 그린북, 유대교의 엘로북으로 구분되어 있다. 그러면서 이 세 종류의 책은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여 들려주고 있다. 서양인들의 시각에서 볼 때 이런 편집은 아주 신선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동양인인 내가 볼 때 이것은 <史記>의 기년체 편집과 유사한 방식을 취하고 있다. 작가 파비치가 이런 방식을 택한 것은 굳이 개종의 역사를 시간의 흐름으로 보지않고 의식의 흐름으로 보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그 현란하고 상징적인 종교적 세계는 실존적인 게오르그의 <25시>나 이보 안드리치의 구도자적인 모습과는 또 다른 의미를 느끼게 한다. 어쩌면 파비치의 세계는 마르케스의 세계와 일맥상통하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유고슬라비아인이었던 파비치가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파비치는 꿈사냥꾼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마수디는 3일동안 자신의 가족이 죽어가는 꿈을 꾼다. 첫째날에는 아버지가, 둘째날에는 아내가, 세째날에는 남동생이 죽는다. 그리고 넷째날에는 두번째 아내가 죽는 꿈을 꾼다. 하지만 마수디에게는 두번째 아내가 없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그는 이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꿈사냥꾼 찾아 나선 길에서 한 노인을 만난다. 그리고 꿈속에서 자신이 죽인 두번째 아내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 노인이 울면서 말한다.

<죽었어! 내가 바스라에서부터 줄곧 따라오고 있었는데... 그 사람의 혼령은 꿈에서 꿈으로 계속 옮겨다녔습니다. 난 지난 3년동안 계속 그 뒤를 밟았지요. 그 사람의 꿈을 꾸는 사람을 찾아 다니면서...>

<한 여자의 뒤를 쫓아서 그렇게 먼 길을 여행하셨군요. 당신은 꿈 사냥꾼인가요?>

<내가 꿈 사냥꾼이냐고요? 어째서 그런 질문을 하는 것입니까. 여보시오, 당신이 꿈 사냥꾼입니다...>

파비치의 몽환의 세계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는 자신의 조국이 내전으로 찟기면서 서로가 서로를 증오하는 그 과정으로 향해가는 현실을 보면서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꿈 속에서 죽인 것은 타인이 아니라 바로 자신들이었음을 고백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고백의 결과가 혹은 현실이 분열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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