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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옛글 백가지
조면희 지음 / 현암사 / 2005년 5월
평점 :
품절
文字는 精神의 표현이라고 단정한다면 너무 무지한 것일까. 그래도 한번 그렇게 단정을 하고 이야기를 풀어가자.
우리글을 읽다보면 약간의 불만을 느끼는 대목이 있다. 그 불만은 유홍준 선생이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에서 언급한 松江의 將進酒辭 가운데 마지막 <하물며 무덤 위에 원숭이가 놀러 와 휘파람 불 때 뉘우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를 당시 조선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원숭이를 언급하는 대신 메뚜기를 대입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의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선조들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즐거움이다. 글 속에서 인용되는 고전의 숨결을 느낀다는 것은 그만큼 나의 마음을 풍요롭게 만들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 글에 익숙해지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 익숙함의 첫 단추는 語文閣에서 1984년에 출판한 <上疏文>이란 책을 접하면서부터였다. 지금도 그때 읽은 책의 첫장에 나온 李至선생의 상소문의 한귀절 <나무는 먹줄을 튕겨야 바르게 자를 수 있고, 임금은 직언을 따라야 성스럽게 된다>라는 書經의 구절은 두고 두고 잊혀지지 않고 있다. 이 글을 읽었을 때 느꼈던 고전의 깊은 느낌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우리글 100가지를 읽고나면 그 문자의 한 가운데를 관통하는 정신은 <선비士>라는 것이 아닐까. 士大夫란 단어는 벼슬에 나아가면 대부요 물러나면 사라는 뜻이다. 이 단어에는 나아감과 물러남의 뚜렷한 구분이 있다. 여기에는 나아가서 官場에 들어가면 爲民이고 물러나 낙향하면 修身을 본으로 삼는 것이 드러나 있다. 그러기에 여기에 있는 글들은 엄정하면서도 법도가 있다. 엄정은 공평을 뜻하는 것이고 법도는 질서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닌지. 새삼 先學들이 자신에게 엄격하고 권력자에 엄정하게 대하는 모습을 보면 너무나 일상이 가벼운 현재를 사는 내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진다.
문자 속에 정신이 고정될 때 그것은 고인물과 같은 것이다. 문자의 뜻이 시대를 지나면서 물처럼 흘러야 문자속의 정신은 재해석되고 확대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못할 때 죽은 문자에 썩은 정신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