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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 I
아트 슈피겔만 지음, 권희종 외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199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는 유대인 문제에 있어서는 항상 피해자 유대인과 가해자 유대인이란 두개의 잣대를 가지고 있다. 이 만화책은 피해자 유대인의 입장에서 본 이야기이다. 우리는 유대인의 고난에 관한 책을 읽다보면 언제나 두 가지 의문에 휩싸이게 된다. 왜 독일인들은 쓸데없는 일에 그 많은 시간과 돈과 노력을 투자했을까, 또 하나는 왜 유대인들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송아지처럼 아무런 저항도 없이 순순히 자신의 목숨을 나치의 손아귀에 맡겼을까. 만약 나치 치하의 유대인들이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처럼 격렬하게 나치에 저항했다면 유대인들의 운명은 어떻게 변했을까.
이 만화책은 많은 상징성을 담고 있다. 유대인을 쥐로 묘사한 것은 풍요로운 미국의 유대 젊은이가 보았을 때 자신의 부모 세대의 고통을 이해하지만 왜 가만히 있었는가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아닐까. 쥐라는 동물은 언제나 인간의 주변에 기식하고 있지만 인간과는 절대 어울리지 못하는 동물이다. 유대인의 처지와 쥐의 처지는 역사적 사실에서 일치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독일인으로 묘사된 고양이를 보자. 고양이는 인간을 따르기 보다는 자신이 태어난 곳을 선호하는 동물이다. 즉 개는 이사갈 때 버려두고 가면 주인을 찾아오는 감동을 선사하지만 고양이는 데려가도 이전에 자신이 살던 곳으로 도망가는 동물이다. 그리고 고양이는 자신의 영역안에서 언제나 고귀한 자태를 뽐낸다. 민족적 우월주의에 빠진 독일인을 이처럼 가혹하게 묘사한 책도 드믈 것이다. 자신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고양이와 언제나 겉도는 쥐와의 동거는 어찌보면 우연이라기 보다는 필연의 역사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폴란드인을 묘사한 돼지는 정말로 압권이다. 우리는 돼지가 매우 우둔한 동물로 알고 있지만 돼지의 내면은 아주 잔인하고 교활한 면이 많다. 하지만 돼지는 그 풍요로운 고기로 인해 이런 단점이 모두 용서되는 특이한 동물이다. 폴란드는 유대인에게 가해자의 역할을 한 것이 분명하지만 너무 일찍 나치에게 정복당함으로서 자신의 죄과를 감출 수 있었다. 이는 마치 오스트리아인들이 독일에 적극적으로 협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끝난뒤 자신들은 독일에 의해 피해를 입은 국가라고 항변한 것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오스트리아인들이 히틀러가 자국출신임을 잊었듯이 바르샤바의 게토가 폴란드에 있었음을 잊고싶어할지도 모른다.
아트 슈피겔만의 이 쥐라는 만화책은 역사의 피해자로서 유대인을 묘사하고 있지만 "잔인한 이스라엘"이나 "이스라엘의 발명품" "팔레스티나"와 같은 다른 작품은 반대로 가해자 유대인을 묘사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럼에도 이 만화는 아주 매력적이다. 언제 꺼내 읽어 봐도 그렇다.
이 만화의 시작부분에 나오는 한 장면.
"친구? 네 친구들? 그 애들을 방 안에다 먹을 것도 없이 일주일만 가둬놓으면....그땐 친구란게 뭔지 알게 될 거다..."
너무 삶이 가혹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