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들의 세계사 보르헤스 전집 1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 민음사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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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렌 데이튼의 '아이언크로스'란 소설을 읽었을 때가 생각난다. 이차세계대전이 독일측의 승리로 끝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하는 가상의 역사를 읽었을때 그것은 역사의 다른 축이라고 느꼈다. 역사의 기록은 언제나 승자가 패자에게 보내는 묘비명과 같은 것이었다. '여기 ***가 누워있노라. R. I. P'라는 식의 기록은 승자의 입장에서 보면 정당하지만 패자의 입장에서는 미흡한 것이다.

그 다른축을 보르헤스에게서 다시 느꼈다면 과장된 것일까.  보르헤스에게 있어서 실제와 허구의 차이는 무의미한 것이다. 실제가 허구가 될 수도 있고, 허구가 실제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그가 자유롭게 구사하는 여러 문헌들의 인용이다. 이것을 통해 그는 독자들에게 환상적 사실주의의 세계로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계는 절대로 완결될 수 없는 세계이다. 환상의 세계는 순환의 세계이지 결말이 드러난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보르헤스의 소설을 읽을 때 환상과 사실간의 간극을 조절하기가 쉽지 않다. 드믄 드믄 나타나는 각주는 그 모든 것을 모호하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르헤스의 각주를 읽는 순간 자신이 지금까지 읽고 있는 세계가 사실인 것처럼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그 사실은 어떤 결론에 이르지 않고 매듭지어질  때 허구의 세계속에 있는 또 다른 자신을 느끼게 된다. 그 세계는 환상과 사실의 중간에 있는 나 자신의 세계이다. 이 세계는 지독한 패러디의 세계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인식하는 것은 순전히 우리들의 몫으로 남겨진다. 그러기에 여기에는 풀어진 넥타이 같은 꾸부러진 길을 지나 일광의 폭포속으로 사라지는 열차도 없고,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와 같은 낙엽도 없다. 여기에는 불한당이란 실제와 역사라는 환상이 공존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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